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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 Apr 12. 2024

증오의 맨 처음은, 어쩌면 그저 귀여운 부러움이었을 뿐

#안녕, 나의 첫 감정


때로는 좋은 부모님을 만나 자랐던 티가 넘치기에, 늘 다정하고 안전한 에티튜드를 밑바탕으로 지닌 채 늘 유연한 자세로 나긋하고 고운 언어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필자의 주변에서도 그런 이들을 종종 찾아볼 수가 있는데 가장 가깝고 오래 관찰했던 이가 바로 남편이었다. 남편은 기저에 불안함이 크지 않았고 누군가가 큰 소리를 내는 소동이 있어도 크게 동요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기에 그런 남편이 신기했고 부러웠었다.


연애시절과 결혼 초반에는 열등감이 생길 만큼 남편의 환경과 그로 인해 얻게 되었을 온화하고 높은 자존감이 질투 났었다. 그런 남편을 곁에서 오래 바라보고 관찰하며 부러워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건 나에겐 행운이었다. 점차 그는 그대로 나와 반대되는 강점이 있는 뒷면에 약점이 똑같이 존재하고, 마침내 우리가 서로를 강하게 공감해 줄 수 있는 면이 공존하고, 반면에 미처 성장하지 못한 약점들을 서로 보완해 줄 수 있는 면이 있었다는 것까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론으로 정리하는 건 이렇게 간단한 몇 문장이지만 마음으로 온전히 이 글을 현실로 접목해 이해하는 것은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한 십년?)


켜켜이 쌓인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 다시 성장으로 가져가는 건 그렇게 견고하고 꼼꼼함이 요구되는, 그러나 스스로를 엄청나게 뿌듯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전 글에서 언급했 듯 상처를 많이 받아보고 성장의 기회를 수 없이 가져봤던 나는 신랑에 비해 굉장한 에너지소모가 필요했고 극단적으로 감정이 요동쳐야 했으나 장점도 있었다. 그만큼 간절하고 긴박했기에 상처에서 극복하는 과정의 복잡한 학습들에 대한 이해도 빨랐고 그러기에 목적지까지도 좀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귀찮게 왜 일일이 감정을 이해하고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빠르게 흡수되었고, 굳이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의 사례를 전부 새로 학습하지 않아도 지난 경험으로 지겹도록 이미 학습됐기 때문이다. 나를 살리기 위해 필자는 모든 감정들을 단순히 0,1,2,3... 의 자연수로 보지 않고 0.1,0.2,0.3... 의 소수로 펼쳐 보일 정도로 심리공부에 매진하며 내면에 집중해야 했었다.(당시 나의 시각을 자연수와 소수로 표현해 준 친구의 표현력에 감탄한다.)


반면 신랑은 어떠한 불편한 감정이 있을 때 그 마음을 굳이 해석하고 바르게 해소해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가 크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갈등을 적당한 임기응변으로 넘기고 적당히 사회의 틀에 맞춰지는 편을 선택했다. 그걸 또 타인이 볼 때 적절하게 너무도 잘했기에 나도 어쩌면 그런 방법이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인내심 넘치고 내면이 굳건했던 남편이 무너졌던 건 내가 그를 이해해 주고 보듬어줄 에너지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사회에서의 갈등까지 겹쳐져 낯선 건강의 이상으로 나타나버렸었다. 이 때의 신랑을 떠올리면 안쓰럽고 미안해지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제부터라도 함께 성장할 길을 찾아 같이 갈 수 있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는 불가피한 경쟁구도와 서열화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보이기에 그럴듯한 성공 트로피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트로피가 되어보는 경험이 많은 이들에게는 역으로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에 취약하고 그 취약점에서의 성장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반증이 된다.

필자의 주변에도 당장 부모님의 트로피로 자라 성공한 사례부터 시작해 화려한 지인부터 적당하게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이를테면 남편과 같은 케이스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한 때는 그런 각양각색의 성공을 나만 가져보지 못한 것에 또 지지리 못난 자격지심이 불타오르기도 했었다.


지금도 종종 부러워하는 것도 사실인데, 이런 부러움이 적어도 나를 갉아먹는 행위까지 갔던 것을 한 방에 싹 해결하게 되었던 과정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이제 그들이 부럽지만 그저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지금은 성공 트로피를 가진 그들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며 그 과정을 성공으로 이끈 것을 진정으로 부러워하지만 결단코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졌다. 부러움의 이유를 알지 못해 돌고 돌아 스스로의 가치관이 그와 맞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삶이 다른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방향이 대중들이 원하는 트로피가 있는 길과 달리 그저 좀 낯선 길이기에 아무도 나를 여유 있게 안내하거나 응원해 줄 수 없었을 뿐이다.


부러움과 질투의 시작은 아마도 우리가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학교에서부터가 처음이었을 테다. 처음 만나는 친구의 뽀얀 피부나 알록달록한 예쁜 옷, 근사해 보이는 학용품부터 그 친구가 다른 친구와 웃고 이야기하는 모든 모습이 부러웠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상대적으로 나를 초라하고 비참하게끔 느끼게 했었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친구와 친해지는 것을 얄미워하기도 하고, 그 친구가 가진 물건을 똑같이 따라 사거나 예뻐 보였던 표정이나 말투 따위를 집에서 남몰래 따라 해보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운 질투의 순간이었다.


문제는 이런 부러운 마음을 결국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여전히 배우거나 해결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귀여웠을 부러운 감정은 점차 나를 부끄러움으로, 비참함으로 물들게 하고 질투를 넘어서서 시기하는 사람으로 몰아갔었다. 그 미해결심리는 결국 나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었으며 종국에는 주변 모든 것들의 존재를 불편하게 느끼도록 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버린 뒤에 이 거대한 감정은 결국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되고, 반드시 타인의 강점을 깎아내려야만 안도하고야 마는 못난 언행으로 튀어나가 버린다. 어쩜 이렇게 잘 아는지를 묻는다면 나 역시 그래봤기에 알고, 이제는 내가 왜 그랬었는지 정확히 알고 극복했기에 용기 있게 지난 시절의 나를 고백하고 이제는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부디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 더는 자신의 부러움을 부끄러운 행동으로 표출하지 말고 그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수용해 보는 성숙한 행동을 할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너무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좋다. 예를 들면 TV에 나오는 예쁘고 인성까지 좋으면서 공부도 잘했다는 연예인을 보며 그 연예인의 사생활에서 흠집을 찾아내는 대신에,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는 그 부러운 마음을 찾아내보고 어떻게 하면 나도 그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 그 시작이다.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신을 응원한다.


다음 글에서는 이 부러웠던 감정을 어떻게 해소하면 좋을지에 대한 이어지는 후속 글로 새로운 성장을 지속해서 제안해보고자 한다. 부러움을 스스로의 성장목표로 인지한 당신도 이어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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