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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 Apr 23. 2024

쉬운 회복도, 쉬운 용서도 없다. 그전에 필요한 건

#타인을 이해하기 전에 '나'와 먼저 만들어둬야 하는 것

https://youtube.com/shorts/ekZCctZzOOk?si=Q6YT0r9LEzVPzJB4

<미나 씨, 또 프사 바뀌었네요?> 드라마 중에서


여기, 두 자매를 키우다가 너무 힘이 든 나머지, 친정 집에 둘째를 맡긴 채 첫째만 데리고 떠나 1년을 지냈던 엄마가 있다. 이 과정에서 둘째에게는 아무런 사전 예고가 없었고, 그저 홀로 남겨져 떠난 엄마와 언니를 생각하며 할머니 댁에 억류되어야 했었다. 엄마를 따라 함께 떠났던 첫째엄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엄마의 힘든 삶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이해할 있었지만, 할머니 댁에 덩그러니 남겨졌던 둘째어렴풋이 이해는 하지만 그런 엄마로 인해 버려졌던 상처와 충격을 여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다시 만나 지내면서도 엄마와 언니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기에는 떨어져 있던 시간과 상처만큼 큰 틈이 벌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고 가끔 엄마는 둘째에게 아픈 과거를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 쉽게 해석해 말을 꺼내곤 한다. "나는 첫째랑 둘째를 똑같이 키웠는데, 둘째는 좀 더 손이 많이 가서 힘들다"라고 하는 말들이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발끈한 둘째는 묵혀뒀던 상처를 꺼내며 똑같지 않았다고 반기를 들고, 엄마 옆을 지켜왔던 첫째는 엄마의 편을 들며 둘째를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고 만다. 그저 철없이 징징대기만 하는 철부지로 전락해 버린 둘째의 설움은 그 어디에서도 해소받지 못한 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되었을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도 위의 상황과 비슷하다면 비슷했다. 엄마는 당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조금 달랐던 것은 그 힘든 상황들을 옆에서 고스란히 같이 보고 느끼며 지냈기에 힘들던 와중에도 엄마를 이해하는 것까지 가능했었다. 그의 힘듦은 내 몫이 아니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편안해지는 방법을 기꺼이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정서적 보호자 역할로 떠밀리게 되었다. 받아본 적 없는 보호를 타인을 위해 해야 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가진 힘보다 무리하게 에너지를 썼어야 했고, 어쩌다 지쳐 나도 안전한 관계에 있음을 확인받고 싶어서 했던 행동들은 철딱서니 없는 행동들이 되어버렸었다.


위 영상 사례에서 두 자매의 입장 모두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첫째는 첫째대로 엄마가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지해 주며 키워줬던 고마움을 기억하는 입장과, 둘째는 둘째대로 버려졌던 아픔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해하고 지나던 과거의 설움을 안고 살아가는 입장 모두 비난받을 이유가 하등 없다. 그러나 문제는 엄마의 입장이었다. 엄마의 지난 힘든 상황이 힘들었던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힘들었던 상황을 별 수 없는 방법으로나마 극복하고자 했던 본인의 선택에서 아이에게 어쩔 수 없는 피해를 줬다면 용서를 구하고자 최소한의 노력을 했어야 했고, 그 아이의 용서를 결코 가볍거나 쉽게 생각해선 안 됐다.


미숙했던 엄마로서 자신이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두 자식에게 나눠줄 음식을 몇 차례 몰래 한쪽에게만 나눠줬던 것을 '나는 똑같이 나눠줬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첫째와 둘째를 똑같이 키웠다는 것은 의도이자 목표였을 뿐, 과정 속 선택은 전혀 그러지 못했음을 인지해야 했고, 이를 인지했다면 그렇게 가벼운 말로 재차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상처를 주는 상황을 이어가서는 안 됐다. 또한 첫째와 둘째의 입장차이가 분명할 수밖에 없으니 두 사람의 말다툼을 방치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자매들에게 과정에서의 차이가 있었음을 설명해 주는 것도 필요했다. 어쨌든 자매들은 '엄마가 힘든데도 나에게 음식을 나눠줬었다'라고 기억하는 첫째와 '엄마는 힘들면 언제든 나를 포기했었다'라고 기억하는 둘째는 그저 각자 겪었던 자신의 경험만을 기억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자매들이 다른 입장차를 다루는 대화까지 나눠지길 바라는 것은 좀 더 뒤로 미루기로 하자.)


필자가 원가족과의 소통과 관계를 포기해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여기에 있다. 내가 당신들을 용서하고 이해해서 넘어갔던 일이 부모님에게는 '당연하고 쉬운 일'로 인식이 되었다는 것과, 나와 다른 경험으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기에 좀 더 부모님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다른 형제자매에게는 제대로 된 설명 없이 그저 '같은 편'이 아닌 공격의 대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에서 더는 여기에 에너지를 쏟을 의지가 사라졌다. 이런 상황은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불편한 상황들로 이어져 나타났다. 당연하게도 어린 나이에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의 당시 상황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고, 부모님을 이해하고 용서하기까지도 엄청난 감정들을 다스리고 진정시키면서 괴로웠었다. 그러나 당신들의 입장에 처해 돌아봐주지 않은 이 모든 과정들을 묵인하고 회피해 왔기에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쉽게 치부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필자의 실수도 없지는 않다. 당신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순간에,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과정이 있었음을 충분하게 상대방에게 전달했던 적이 있었는지다. (물론 이런 대화 자체도 거부당했다면 별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사건 이 전에는 늘 싸움이 있었다. 싸움 이전에 사소한 다툼, 다툼 이전에 불만, 불만 이전에 불편함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전에는 의아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 과정의 가장 초반에는 그저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그러면 대부분의 문제는 쉽게 넘어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나에게서 불편함이 인지되었다면 여기서부터는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보통 그 힘을 쌓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신뢰감 있는 성숙한 상대와의 소통경험이 요구되는데 문제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가정환경에서 이런 경험을 쌓아볼 기회가 극도로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없다. 그리고 내가 불편하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이 불편함을 외면하기 위해 애를 쓴다. 나는 괜찮다고, 이 정도는 이겨내면 된다고. 그렇게 자신을 속이기 시작한다. 본래 어릴 적부터 편안한 환경에서 성숙한 어른들과 관계를 맺었다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나'를 보호하는 기준이 바닥조차 세워지지 않은 채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는 눈에 분명히 보이는 가치이지만 그 상위 단계의 욕구에 더 큰 사회적이고 고유한 가치가 있다. 소통과 관계로 함께 성장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배가 고플 때 이를 외면한다면 나는 굶어 죽게 되듯이, 안전한 관계를 맺고 바른 소통을 하지 못하면 사회적인 성장은 죽는다. 고작 의식주만 해결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이렇게 긴 역사가 이어져온 것이 아니듯이, 배워온 지식과 지혜들로 각자의 가치를 파악하며 사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아가야 한다. 여전히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국한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퇴행을 부르고 같은 아프고 힘든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만' 지키는 힘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불편할 때마다 상대방을 잘 공격해 온다. 비난이나 지적, 부탁한 적 없는 평가나 충고들이 그 방법들이다. 그들에게는 나를 위한 것이 가장 당연하고 기본적이고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물리적 가치이기에 이를 매 상황마다 더 큰 가치의 시선으로 확장시켜 이해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모두를' 지키려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이 공격에서 늘 불리하다. 그저 용기 있게 사과하고 이해해서 다음을 도모했던 것이 의도와는 다르게 사회적 '죄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같은 모습의 더 사소하고 다양한 가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선택했던 배려가 어쩌면 그들에게 유리한 착취로 굳어진 건 아닐지 내 불편함을 면밀하게 다시 보고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모두를 지키려는 힘을 가진 이들에게 먼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기준과, 나만 지키려는 이들을 상대할 매뉴얼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나를 지키지 못한 상위 가치는 자주 물거품처럼 사그라지곤 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과 매뉴얼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함께 해야 하는 '마음훈련'은 불가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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