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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Sep 28. 2024

17. 연애는 연애라서

돌싱 라이프


딱 좋았다!   존재한다는 자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아침이다.  하늘이 그러라고 시킨다. 삶은 달라진 계절을 실감하는 피부처럼 푸석거리지만, 하늘은 어린아이의 여린 속살처럼 투명하다. 버석거려서 넘어가지 않는 모래알을 물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고개를 들어 하늘 한 번 보고 나면 웃음이 퍼진다.


유일하게 마음을 달래주는 건 날씨다. 출근길에 한 번 보고 퇴근하며 바라보는 하늘. 의심의 여지없는 행복의 표상이다. 하늘만 바라봐도 그저 좋은데 뭘 더 바라면 안 될 것 같아서 마음을 도닥인다. 행복이 마음먹는다고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행복하라고 하늘이 시킨 것 같으니, 하늘의 뜻대로 행복하기로 한다. 고개 들어, 올려다보기만 해도 행복할 수 있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들 중에 아름다운 하늘이 있어서 다행이다.  딱 좋다!


연애는 연애일 뿐이다. 갑자기 뜬금없을 갑툭튀에 놀랐을 누군가를 위해 변명을 해보자.

내실을 기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려다가 라테가 그리워 카페에 들러 책을 꺼냈다. 책에 눈은 두었으나, 글자가 들어오지 않는다. 생각은 다른 우주에 있다.  마침 생각을 끊어주는 무거운 톡,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전화. 오랜만의 안부가 반갑다.  노란 화면의 짤막한 톡은 지구의 핵이라도 뚫고 들어갈 것 마냥 중압감이 큰데,  다른 이와의 통화는 발랄함이 샘솟는다. 온도 차이가 극명한 연락이 동시에 오는 것도 오랜만이다.


타인의 현재에서 감지되는 마음의 울림을 '연애는 연애일 뿐'으로 표현하고 싶다. 이별이 쉬운 연애. 사랑이 뜨겁게 무르익을 때나 이별이 어려울까. 막상 헤어질 결심을 하면, 공기 중에 퍼지는 발라드의 선율보다 가볍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 'The end' 보다 울림 없는 것이 현실 연애다. 굳이 "끝"으로 단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연애는 지저분한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다. 좋은 것만 보고 즐기면 된다. 삶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갑자기 피곤해진다. 연애는 삶과 분리되어야 유지된다. 삶의 지분이 커진 연애는 의미를 상실한다. 복잡한 삶이 끼어들기 시작한 연애의 끝은 이별일 수밖에 없다. 연애의 결론은 이별.  


깊은 연인관계라 해도 생활을 공유하는 결혼생활과는 다르다. 남자 친구는 남자 친구이고 여자 친구는 여자 친구이다. 남편도 아내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묶이는 관계가 아니므로 좋으면 만나고, 아니라면 헤어지면 그만이다. 생활을 넘나들지 않는 남녀의 사랑은 영역이 확실한 만큼, 책임에서도 자유롭다. (누군가 아니라고 한다면, 반론을 펼칠 논리는 없다.)



연애의 관계는 느슨해서 짝꿍을 찾아봐야 하나 를 생각했다. 아니 상상했다.


- 같이 살면 밥도 해줘야겠지. 화장실 더러운 것 싫어하는데, 화장실 깨끗하게 쓰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평생 함께 해와서 익숙해진 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과 공간을 공유하는 일이 오래오래 행복하려나?


내가 아플 때 같이 병원에 가 주고, 간호해 줄 존재가 필요할 텐데. 거꾸로 내가 병시중을 들 상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안 되겠다. 그냥 혼자 살아야겠다. 혼자 살자니 벌써부터 아플 일이 걱정이다. 다쳐서 운신 못하면 누가 병원에 데려다주려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 머릿속에 맴돈다. 싱글은 다쳐도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급박한 순간에 의지할 데라곤 없다. 누가 있을까 헤아리니, 집에 있어주는 유일한 가족은 강아지뿐. 초코를 쳐다보니 한숨이 깊어진다.


의지처를 생각하니 실버타운이 떠오른다. 오래전부터 실버타운에 관심이 많았다. 마침 카페에 실버타운 현장 답사기가 올라왔다. 삼성 노블카운티와 더클래식 500. 개인적으로는 둘 다 비싼 곳이라서 실버타운 리스트에 올려놓지 못한 곳이긴 했지만, 궁금해서 다시 확인을 해보았다. 삼성 노블카운티는 보증금 7억. 은행에 맡기면 이자만 해도 한 달에 200만 원은 되는 돈이다. 거기에 월 600만 원이 드니 한 달에 800만 원을 내고 사는 꼴이다. 더클래식 500은 더 하다. 9억이면 이자만 얼마냐. 200만 원도 넘는다. 생활비까지 합치면 800 이상 들겠다.  돈만 내고 손가락 빨 수도 없으니 개인 용돈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한 달에 월천은 되는 월천대사들이 들어가야 하는 곳이 맞겠다.




노년에 운동도 하고 문화생활도 가능한, 럭셔리 실버타운도 못 들어가게 생겼다. 아이들에게 집을 물려주지 않고 어찌어찌해본다고 해도, 그 돈 아까워서 입주를 못할 것 같다. 우아하게 주는 밥 먹고 문화생활과 운동을 한곳에서 하며 노년을 외롭지 않게 보내려고 했더니 인어공주의 거품 수준, 환상 동화다. 젠장.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가 뱉은 소리에 놀라서 정신을 차려보니  어이가 없다. 연애? 우아한 싱글? 떠올린 단어들이 우습다. 연애는 연애일 뿐이라니. 내게 허락된 영역이 아닌데 무슨 기만인가. 거기에 짝꿍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우아한 싱글도 멀기만 하다.  가질 수 없는 허상을 나열해 놓고 상상 놀이를 한 기분이다. 복권은 사지도 않으면서 '만약에 로또에 당첨이 된다면 뭐 할까?'처럼 영양가 없는 헛된 상상들. 그래놓고 연애의 결론은 이별이고 싱글의 결론은 고독사라며 혼자 쓸쓸해한다. 이런 나에게는 요런 질문이 딱이다. 

"왜 사니? "

아침엔 하늘만 보고 걸어도 딱 좋은 날이 분명했다. 하늘만 보면 마음이 한껏 부풀었는데, 해가 지고 하늘이 사라지자 인생이 반전된 기분이다.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방향을 못 찾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왜 사냐고 묻는데 답을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그런다고 한탄할 수도 없다. 그 정도의 인생 경력은 아니니까. 한숨은 싫으니 자기 합리화 겸 위로를 하기로 한다. 의미부여라도 해야 사는 일이 힘 빠지지 않겠다.


연애를 안 하니 이별하지 않아서 좋고,

짝꿍이 없으니 신경 쓸 게 없어서 좋다.

우아한 싱글인척 한답시고 고급진 실버타운 들어가서 기죽어 사는 것보다, 혼자니까 더 건강에 신경 쓰고 사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한심해서 물었다. 왜 사냐고.

힘 빠지지 않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하늘만큼은 딱 좋다.  사는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겠다.  

"하늘이 딱 좋아서,  
딱 그만큼 살고 싶어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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