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갱년기
갱년기 기쁨 편
갱년기의 기쁨 중의 하나는 잘된 자식이다. 20대에는 잘생긴 놈이 가장 부럽고 30대에는 좋은 직장에 취직한 놈이 부러우며 40대에는 돈 잘 버는 놈이 부럽지만, 50대에는 자식이 잘 되면 부럽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녀가 남들도 인정할만한 대학에 들어가 안정된 직장생활을 한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겠다. 부모가 그려놓은 틀에 딱 맞도록 성장해 주는 자식이 있다면 사는 맛이 나겠다. 과연 부모의 뜻에 맞춰 살아주는 자식이 많을까. 요즘은 더 모르겠지만, 남들 눈높이에 맞춰 좋은 대학과 직업의 간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자식으로 인한 기쁨이란 생각은 자연스럽다. 자녀가 공부 잘해서 의대를 가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남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해낸 자녀를 바라보는 일은 먹지 않아도 배부른 기분일까, 상상해 본다. 그러다가도 간판 좋은 것보다는 자식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사는 게 부모로서 기쁨이란 생각도 스민다.
아픈 일 겪지 않고 무탈하게 자라서 평범한 성인이 되는 일이 부모 마음에 안찰 수도 있겠지만, 타인의 시선이나 편견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일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자녀를 옆에서 지켜보는 일. 꼭 좋은 대학에 가지 않아도 스스로의 길을 당당하게 개척하는 모습에서 부모가 안정감을 느낀다면, 이것이 부모의 기쁨이란 생각이 강해지는 요즘이다. 특별히 잘난 구석이 없는 아이들, 몸 고생은 하더라도 마음고생 없이 세상에 적응해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엄마의 기도에 응답이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갱년기의 기쁨 중 최고는 역시 자녀로 인한 기쁨이겠다.
갱년기 슬픔 편
갱년기의 슬픔은 종류가 많다. 우선 몸의 변화 하나만으로도 슬프다. 사춘기와 갱년기를 자주 비교하지만, 질적으로 다르다. 사춘기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갖추면서 생기는 변화다.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과정이므로 아름답다. 어린 꽃이 여물어 가며 생기가 불어나는 시기와, 있었던 것들이 말라가며 잃어버리는 갱년기는 차원이 다르다. 호르몬이 생기는 시기와 호르몬을 잃어야 하는 시기가 어떻게 비슷할까. 내 몸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해서 당황스러운 시간은 상실을 의미한다. 잃어버리는 일은 슬프다. 하나씩 둘씩 생성되는 시간도 낯설지만, 있던 것들이 사라지는 변화는 훨씬 황당하다.
몸의 변화가 두려운데 가족들도 곁은 떠난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며 독립하는 시기라서 빈둥지증후군도 앓기도 한다. 자녀의 독립은 반쪽짜리이다. 물리적인 독립은 힘들어서 아직 부모에게 기대건만, 정서적으로는 독립을 해버려서 마음을 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필요할 때만 찾는 존재가 부모다. 입금이라도 해야, 미안해서 챙겨주는 수준. 쿨하게 떠나갔다가도 육아의 손길이 필요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뻔뻔하게 다시 돌아올 녀석들이다. 여성으로서 끝이라는 자각은 서글프고, 정작 가족이 필요할 때는 없으면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렵건만 엄마의 몫을 강요받는다.
몸의 상실 중에는 뇌의 기능도 포함되어 있다. 기억력은 날이 갈수록 옅어져서 나도 나를 믿지 못한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자주 반복하는 실수 때문에 스스로가 밉다. 영화 속 라일리가 슬픔에 가득 빠져들었을 때처럼, 낮은 자존감은 우울한 블루를 전염병처럼 퍼뜨린다. 이러려고 인생을 열심히 살았나, 자괴감이 몰려드는 순간에는 뼈가 시리다. 시린 자리에는 눈물이 종종 차오른다.
눈물 나는 날에는 다르게 생각해 보려 한다. 아이들의 독립은 홀가분한 일이기도 하다. 어차피 떠날 존재들이니 마음을 비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돌리는 것보다는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낫다. 오랜 살림으로 지친 엄마들에게 자녀의 독립은 선물이기도 하다. 더 이상 밥을 챙겨주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리적 해방감은 심리적 해방감과 이어진다. 나이 들수록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빨라서 하는 일 없이 하루가 훌쩍 지나가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 매였던 과거보다 내 시간이 많아진다. 자신감과 용기가 있다면, 목표를 향해 시도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가능해진다. 잃어버리는 만큼 새롭게 채워지는 영역도 있다. 엄마 사표를 냈더니 허전한 마음에 다시 엄마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이번에는 강아지 엄마다. 자식 키울 때보다 더 큰 사랑과 기쁨을 준다. 자식에게 사랑 주고 상처받느니, 진즉 강아지를 키울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 정도다.
세상을 좀 살아 봤기에 경험치가 쌓였고 그만큼 나만의 데이터를 축적한 인생 시즌이기도 하다. 시선이 넓어지며 어려서는 몰랐던 분야에서 행복을 느끼는 시기이다. 슬픔의 자리는 슬픔에서 끝나지 않는다. 슬픔에는 의미가 있고 교훈도 있다. 슬픔의 눈물이 마르며 성숙해지는 부분도 있다. 슬픔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되어 주기도 한다.
변화의 자유
'살아보니'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은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낼 성숙을 갖추지 못해서 그렇다. '살아도 모른다'가 인생에서 느끼는 가장 정확한 진실이다. 살면서 느끼는 감정 또한 뒤죽박죽이다. 기쁨과 슬픔의 거리가 멀지 않다. 충만한 기쁨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벅찬 순간에 예상하지 못했던 슬픔이 밀려들기도 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슬픔 뒤에 고요한 기쁨이 머물기도 한다. 격랑의 바다가 거짓말이라도 하듯 일시에 잠잠해지듯이.
선명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살면서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경계를 허물어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 어려운 일만은 아니겠다.
그렇게 바꾸고 싶다. 갱년기의 외로움을 혼자서도 충만한 기쁨으로,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허전함은 채우기 나름의 시도와 의욕으로. 몰라서 답답할 때도 많지만, 모르기에 마음대로 답을 만들어도 괜찮다. 인생은 수학 시험이 아니므로 정답이 필요하지 않다. 내 눈에 틀리지 않아서 마음이 용납하면 그만이다.
부모에게 자녀가 최고의 기쁨은 맞다. 새끼가 나보다 소중하니, 내 새끼의 기쁨은 본인의 기쁨보다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이제는 오롯이 나로 인해 기쁠 수 있는 시즌이다. 나만의 기쁨에 취했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가족은 엄마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기쁨은 가족으로부터 찾고 슬픔은 나 때문이라고 단정 내리며 무너지기 쉬운 갱년기의 틀을 바꿀 필요가 있다.
어쩌면 해답은 사춘기때와 같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거슬려할 것 같았던 그때, 집 앞 슈퍼만 가도 남들이 내 얼굴만 보는 것 같아서 모자 푹 눌러쓰고 다녔던 시절. 매사에 자신이 없어서 부러움과 질투가 마음에 가득했던 사춘기는 갱년기 여성의 감정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뻔뻔한 아줌마라서 티는 안 나지만 자신감과 자존감이 낮아지는 시기는 맞다. 처음이 아닌 두 번째는 처음보다 편하다. 사춘기를 겪었으니 갱년기는 익숙해도 되지 않을까.
사춘기 소녀 시절에도 타인의 시선과 관계 때문에 힘든 때가 있었다. 말 한마디가 속상하고 서운해서 눈물이 많았다. 눈물이 많아지면 가장 친한 친구와 하루종일 깔깔대며 마음을 환기했다. 내가 1순위가 분명하다고 믿은 절친인데, 다른 친구를 더 좋아하는 온도가 감지되면 세상에서 나만 혼자인 듯 음악을 틀어놓고 버티기도 했다. 내 마음의 서열을 정리하며 스스로를 보듬었다. 내가 제일 소중해야 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마음 서열에서 스스로를 맨 뒤에 둔다. 제일 꼴찌일 때가 많다. 다 챙겨주고 나서 힘이 남으면 챙길까 말까. 누군가의 시선, 가족으로부터의 관계에서 벗어나 나를 중심에 놓으면 갱년기는 저절로 극복될 수 있다. 내가 주인공이 되면 찾을 수 있는 기쁨은 늘어나고 슬픔은 외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십 대를 보내고 싶다. 기쁨도 슬픔도 비슷해서 기울어지지 않는 마음도 좋고, 사소한 기쁨이 넘쳐서 오히려 철없는 마음도 괜찮겠다. 내 마음만 허락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