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직종, 비슷한 또래와의 만남에서 비교가 되는 것은 능력이다. 타인의 성공이나 재능을 축하하거나 부러워하는 것은 괜찮은데 비교를 시작하면 왠지 나만 못나 보인다. 평생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전문성이 없다는 자괴감은 자책과 반성을 통해 희미해진 열정을 다시 불러올 때도 있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대학원 진학은 그랬던 내 마음에 대한 보답이었다. 전문성 신장과는 다른 보편 교양만 조금 맛보는 수준이었지만.
목마른 전문성이 채워지지 않길래,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나를 갈아 넣으면서까지 일하지는 못하지만 스트레스받지 않고 즐겁게 일하는 태도에 만족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며 타협했다. 마침 열정이 독이 되는 시기를 맞아 우울의 시간을 보내는 많은 동료들을 보면서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함을 피부로 느꼈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린 동료들이 겪는 고통을 삶의 교훈으로 여겼다. 작은 재능의 구슬들을 잘 꿰어서 자신만의 스펙으로 살려낼 줄 아는 스마트함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말자며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을 접었다. 말만 이럴 뿐 3040 시절을 나는 직장인보다 엄마의 무게를 몇 배는 더 크게 느끼며 살았다. 성공이나 성취는 젊은 시절에도 내 인생에 큰 비중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
이혼을 하고 싱글모임 활동을 하며, 능력보다 외모 비교가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살아오며 전혀 느껴보지 못한 영역이라서 더 크게 느껴졌다. 모임에 따라 10년 어린 여성들과도 교류를 하다 보니 나이 듦이 확연하게 체감되곤 했다. 여자의 나이란 왜 이리 적나라한 걸까. ' 이혼을 할 거면 차라리 젊었을 때 했어야 하나. 이 나이에 이혼하면 누가 거들떠나 볼까.' 억울했다. 오랜만에 싱글이 되었으니 사람 사이의 사귐도 있어야 할 텐데, 왜 나는 그 사이 이렇게 늙어버린 건지.
요즘 참여하는 또래 동료들과의 연수도 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노화를 또렷하게 느끼게 한다. 비슷한 경력의 동료들과 모여있다 보니 40 후반부터 50 초반의 우리들의 노화가 눈에 띄게 보인다. 멋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동료들의 얼굴을 실감한다. 중력에 자꾸만 가까워지는 우리들의 무게는 상당하다. 엄마로, 커리어 우먼으로 평생 열심히 살아온 그녀들의 얼굴엔 경력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이 남았다.
외출하기 전, 그나마 조금이나마 꾸민 후에 아들에게 엄마가 몇 살 정도로 보이느냐, 혹시 조금 어려 보이지는 않느냐, 라며 던졌던 질문이 부끄러워진다. 아이가 난감했겠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나이를 깎아주는 아들은 아니라서 단 한 번도 기대하는 대답을 들은 적은 없다.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딱 엄마 나이로 보여. 요즘 연예인들 봐. 40대가 20대 같잖아. 엄마는 딱 그 나이 중년 아줌마야'였다. 아들의 눈이 정확했음을 다시 한번 실감 중이다.
여성 혼자라는 사실은 싱글이라서 기대할만한 일을 기대하지 않음에도 외모를 신경 쓰게 만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키보드만 두드리는 직종이 아니라서 정장보다 편안한 스타일을 추구해 온 옷차림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늘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는 직장 동료들에 비해 원피스를 좋아하는 내가 수수한 쪽은 아니었음에도 다른 영역의 타인들을 만나기 시작하니 '이건 아닌가?' 돌아보게 만들었다. 편안함과 멋 사이에서 편안함을 100% 선택했던 관성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나 고민이 시작되었다.
명품 가방 하나 없이 에코백 달랑 들고 룰루랄라 다녔던 과거가 부끄럽지는 않지만, 괜스레 신경이 쓰인 시간도 있었다. 처음에는 주눅 들었지만 차차 적응하는 시간을 거쳤다. 나이의 무게는 여전히 아쉽지만, 젊고 예쁜 여성과 비교해서 소심해지는 일은 사그라들었다. 포기가 가장 컸지만 내가 살아온 과정이 괜찮았다는 자각 때문일 것이다. 한 때는 괜찮았던 지적능력도 이제는 맥을 못 추도록 허접해졌고 거울을 보면 거슬리는 노화의 증거들이 볼품없다는 생각이 여전하지만 밝은 텐션으로 깔깔대며 잘 웃는 모습, 온도를 잃지 않는 다양한 분야의 호기심은 아직 내가 늙지 않았다는 위안을 준다.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라며 스스로에 대한 비하보다 토닥임을 더 많이 해주려고 한다. ' 아직 괜찮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거는 위로가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연민'이 아니길 바라며.
가끔은 정반대 현상이 재미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공대에 다니는 여학생, 혹은 간호대학이나 유아교육을 전공하는 남학생이 떠오른다. 싱글들의 활동이라서 이성에 대한 예민함이 살아 있는데, 호르몬의 신호가 교묘하게 교차하는 분위기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모임의 성격에 따라 성별의 비율이 맞지 않을 때가 있는데, 소수 성별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이다. 집단에서는 소수보다 다수의 의견이 파워가 있지만 이성의 관점에서는 소수의 파워가 세다. 소수가 대접을 받다 보니 딸 많은 집의 막내아들처럼, 또는 아들 많은 집의 공주님처럼 스스로를 인플루언서로 여기는 분들도 만날 때가 있다.
은연중 자기객관화를 잘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는 않다. 자기객관화를 잘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완벽한 객관적 지표라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자기 객관화'라는 말 자체가 객관적이지는 않다. 비교란 상대적이어서 주변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내 현재의 위치에 따라, 내 주변 사람들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평가다. 데이터로 객관적 지표를 만들어 평가를 해보면 엉뚱한 결과가 나올 때가 더 많다. 직관적으로 순위를 정해놓고 데이터를 짜 맞추는 것이 오히려 정확할 때도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부족한 부분은 채우려고 노력하고 가득 찬 부분은 비워낼 줄도 아는, 균형을 잡는 일을 자기 객관화라고 하면 좀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완벽한 데이터를 적용해도 합리적이지 않을 때가 많아서 스스로를 객관화하라는 말은 어렵다. 굳이 의미부여를 해보자면 , 과한 착각을 하거나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줄 알아야 내 수준에 맞게 살 수 있다는 것. 그래야 욕망과 욕망의 결핍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 필요하다는 정도일까. 객관화를 하면 상황이나 관계에 따라 상처 입는 일이 덜할 것 같긴 하다. 정신승리의 능력이 탁월해서 내상을 전혀 입지 않거나,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내공이 단단하다면 객관화라는 단어에 묶일 필요가 없어도 되겠다.
노화를 마주하며 외적으로 자신감을 잃어가야 하는 시기는 대체로 비슷하니 외모나 미모에 대한 자기 지적은 거두는 것이 건강 유지에 좋겠다. 중요한 것은 거울에 비친 얼굴만큼이나 자주 마주하는 내면. 내 얼굴은 나보다 타인과 더 많이 만나지만, 남들은 모르는 내 속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 어쩌면 객관화는 비교가 쉬운 외적 데이터보다 내부의 저울이 되어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는 용도가 되어야 맞을 것 같다. 나란 존재가 한없이 저렴해질 때는 반대 영역에 추 하나 놓아주고, 반대로 끝도 없이 날아오를 때는 한 번쯤 점검의 추를 놓아주는 일. 필요한 데이터를 적절할 때 꺼내어 ' 똑바로 직시해.'라는 조언을 해주거나, ' 이 정도면 괜찮잖아?' 라며 치켜세워주는 방식은 사는 내내 필요해 보인다.
유난히 자신에 대한 후한 평가가 필터 없이 드러나는 사람, 그럴 필요가 없는데 과한 겸손으로 소심한 사람,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도 빛이 나는 사람, 어떡해서든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모여서 지낸다. 보이는 모습에서 타인을 인지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나를 조율해야 맞는 '객관화'라는 저울로 나도 모르게 남을 평가하기도 한다. 짜고 달고 매운맛은 기호일 뿐인데 내 입맛이 정답인양 굴었던 것도 같다. 살다 보니 재미있는 일이 필요해서 타인의 외면을 가벼운 양념의 용도로 쓰기도 했나 보다. 타인에게 거울 좀 보고 살라며 꺼냈다가 나를 먼저 비추었더니 내 얼굴 보고 화들짝 놀란 꼴이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사는 일이 그래.' 가볍게 속닥거리면 그만이지만, '너는 충분해, 너는 누구보다 멋있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쓰다 보니 자존감과 더불어 자기애를 생각하게 되었고 흐름은 자기 객관화에 이르렀다. 말을 곱씹다 보니 객관화라는 단어를 지독하게 주관적으로 의미 짓고 있었다. 달리 생각해 보니 내가 틀린 것 같다. 공감을 통해 위로를 해주고 싶었던 언어의 시작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의미를 부여하게 했다. 글을 쓰는 일이란 게 이런 건가 보다. 출발의 의도와 결론이 달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맺음은 같다.
본인이나 잘하세요.
올 가을 출근길의 풍경. 매일 마주하면서도 새로운 가을의 산책처럼 매일 마주하는 나도 괜찮은 사람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