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인사이드아웃
"엄마 제일 친한 친구 아줌마 알지? 그 아줌마가 내년 연애운 좀 봐달라는데 봐줄 수 있니?"
빵 터질 뻔했다. 이제 곧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도 연애운이 필요한 건가.
여기서 잠깐, 소설을 쓴다면 소재로 삼고 싶었던 아줌마의 인생사를 풀어보자.
그녀는 군인과 결혼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베트남 참전을 위해 떠났다. 신혼 시절 떨어져 지냈던 남편이 돌아왔는데, 어쩌면 좋을까. 혈기왕성한 나이에 전쟁이 힘들었는지 몹쓸 병을 얻어와서 더 이상 자녀를 가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마침 누군가, 그녀의 집 앞에 아이를 버려두고 갔다. 누구네 아이인지 알 것 같았다. 지독하게 가난한 어느 집에 막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이 다섯을 키우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꼬박꼬박 가져다주는 월급이 있고, 아이는 가질 수 없는 형편이니 아이를 키우기로 했다. 그러나 남편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3년 만에 서류 정리 없는 이혼을 했고 그녀는 혼자 살기 시작했다. 남편은 죄책감 때문인지 아이 하나를 키울 만큼의 땅을 주었다. 땅을 팔아 아파트 두 채를 샀다. 아파트 한 채는 딸과 함께 살고, 한 채는 월세를 받아 생활비로 썼다.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아도 아이 하나를 키울 만큼은 되어서 넉넉하지는 않아도 괜찮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기가 있었다. 엄마는 신내림을 받으라고 했지만, 무서워서 받지 않았다. 신내림을 받지 않았는데도 가끔은 다른 세계의 존재가 보일 때도 있고,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 미래가 보이기도 했다.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데려온 남자가 그랬다. 딱 2년 살면 헤어질 얼굴이었다. 강하게 결혼을 말렸지만 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엄마의 예감처럼 2년 후에 이혼했다.
얼굴이 자그마하고 몸이 야리야리한 그녀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젊은 시절부터 허리가 좋지 못해서 사교댄스를 배우러 다녔는데 남자들이 줄줄 따랐다. 어느 날 꿈에서 선명하게 보았던 남자를 사교댄스에서 만났다. 똑같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남자는 그녀의 애인이 되어 20년을 함께 했다. 유부남이었지만 집안끼리의 결혼이라 아내와 애정이 전혀 없다고 했다. 남자의 아내도 어딜 가서 물었다는데, 해가 되는 여자가 아니니 둘의 관계를 인정하라 했단다. 그래서 남자의 어머니와 본부인의 허락하에 연인 관계로 지냈다.
3년만 살고 헤어졌지만, 업둥이 딸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던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인생에 갑자기 황금기가 찾아왔다. 딸이 큰 후에도 아파트 월세를 꼬박 받고 있어서 혼자 사는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지만, 서류상의 남편은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군인 연금에 베트남 참전 연금까지 600만 원이 넘는 연금을 유족 연금으로 받게 되었고, 남편 명의의 집 두 채가 그녀에게 상속되었다. 한 채는 재개발지 물건이라 곧 새 아파트가 될 예정이다.
유족 연금에 월세, 그리고 네 채로 늘어난 집의 상속 처리를 도와준 사람은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법이나 세금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를 대신해 준 남자 친구는 그녀의 재산이 얼마인지 속속들이 알아버렸다. 20년의 남녀관계라면 부부나 다름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갑자기 늘어난 재산에 딴마음이 생긴 그. 차를 바꾸고 싶다며 졸라대기 시작하더니 각종 콩고물을 바라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도와 달라는 동생과 집 사는데 보태달라는 딸의 등살에 지친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재산이 많아지자 달라진 태도에서 정이 뚝 떨어졌다.
예쁘장한 얼굴에 날씬한 몸매, 꽤나 공들여 관리한 피부에 비싼 액세서리와 고급스러운 옷 덕분에 언제나 인기가 많은 그녀는 남자란 존재가 의심스러워졌다. 남자의 본심을 알 수 없어서 더 두려워졌다. 남자를 안 만나면 그만이지만, 20년간 연애를 해와서 그런지 갑자기 혼자란 사실이 외롭다. 20년간 곁을 지켜준 남자친구와 재회는 하기 싫고 괜찮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 돈에 흑심을 품은 남자가 아닌, 존재 자체를 사랑해 줄 수 있는 괜찮은 남자를 만날 수는 없을까?
예전에 찻집에서 손금을 봐준 아저씨가 그랬다. 70살 후반에 큰 부자가 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가 되는 방법은 로또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로또를 열심히 샀다. 로또는 당첨된 적이 없길래 접었다. 부자의 운은 남자와의 인연에서 왔다. 국가와 전쟁은 그녀에게서 남편을 빼앗았지만, 국가와 전쟁 덕분에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아저씨가 80살 넘어가면 좋은 남자가 나타날 거라 했다. 그 말이 맞는지 요즘 몹시 궁금하다.
엄마의 부탁으로 아줌마의 사주를 보았다. 신기를 짐작할 수 있는 천라지망의 글자, 술 해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그물을 품기에 아줌마는 음습한, 음기가 강한 사주가 아니었다. 봄의 병화라서 밝고 솔직한 성격으로 어디서나 눈에 띌만한 사람이었고, 일간이 백호살이라 신기를 다스리며 살 수 있어 보였다. 신내림을 받지 않아 가끔 아프다고 했는데,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양기가 가득했다.
"엄마 썸이란 단어 알아?"
-알지
"내년에는 썸 정도 타면서 인기 유지 할 것 같고, 내후년이 되면 인연이 닿을 것 같아. 80살 이후 대운에 정관이 들어와 합이 되거든. 아마 괜찮은 남자분이 나타나실 것 같아.
그런데 엄마는 아빠 돌아가신 지 20년인데 한 번도 연애를 안 해? 57실이면 할 만도 했는데?"
-아빠처럼 엄마한테 잘하주는 자상한 남자가 어디 있겠니.
늘 아빠에 대한 칭찬으로 귀결되었던 엄마의 연애 부정은 친구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른 속내를 비치기도 했다.
-나이 들면 예쁜 년, 안 예쁜 년 차이 없다는 건 옛말이야. 늙어도 예쁜 년이 인기가 많아.
엄마 친구가 사교댄스에 진심이라 엄마도 가봤는데, 엄마 친구는 예쁘고 날씬해서 그 나이에도 비교불가더라. 남자들이 주변에서 맴맴 돌아.
게다가 피부에 뭘 하는지 윤기가 자르르 흘러. 뭘 쓰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어. 분명 비쌀 거라서.
엄마는 날씬하지도 않지, 엄마 친구처럼 관리도 안 했지. 비싼 옷이 있기를 하니, 액세서리가 있니. 엄마 친구처럼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연애하면 돈도 많이 들 텐데 엄마는 딱 엄마 쓸 돈 밖에 없잖니. 무슨 연애를 하겠어.
다른 건 몰라도 연애와 관련한 영역에서는 현저히 엄마의 자신감이 낮아 보였다. 연애를 하려면 아무리 할매라도 이쁘고 날씬한 동안의 조건이 유리한데 그렇게 보이기까지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청춘의 나이보다 훨씬 비싼 관리 비용이 필요해 보였다.
"엄마, 엄마 친구가 워낙 이뻐서 그렇지, 엄마도 나이에 비해 훨씬 동안이야. 건강하시기도 하고. 엄마 친구가 특별한 경우지 엄마도 젊어 보이거든. 상당히 괜찮아."
위로가 아닌 진실이었지만 엄마에게 와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엄마를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엄마는 연애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성향은 아니다. 누구보다 독립적이라서 혼자서도 잘 지내시고 외로움을 타지 않는 편이다. 어쩌면 말버릇처럼 들은 그 말이 나에게도 세뇌가 되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남편 사별 후, 깊은 연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친구처럼 지내며 교류를 하는 친구부터 늘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친구분들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이 가진 속성에 대해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도 예쁜 년과 안 예쁜 년의 구분은 확실하다는 이야기에 빵 터지도록 웃으면서도 내심 많이 놀랐다. 연애를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동안 모드를 관리하는 엄마 친구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관계의 안주에 대해서도 곱씹었다.
법과 서류가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성의 애정이 필요한 사람에게 관리는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은 연령대와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관리를 위해서는 노년에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팩트도 새로운 자각이었다. 청춘도 돈이 많이 들어서 연애를 포기하기도 하고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한다는데 노년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사이의 일은 연령대와 상관없다는 결론이 낯설었다.
엄마처럼 꿋꿋하게 독립적으로 살 수 있거나 반대로 한 사람과 정착을 한다면 미모와 경제력은 필요 없겠지만, 서류의 허가 없이 이성 간 만남을 추구하거나 인연을 이어간다면 여러 각도에서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 엄마의 친구분들 외에도 종종 어르신들의 연애 이야기를 다른 루트를 통해 듣기도 한다. 정착되지 않은 관계, 법의 테두리 밖의 관계일수록 여성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와닿지 않았었나 보다. 들었던 이야기들의 틈을 떠올리며 복기해 보니 싱글 여성의 문제는 중년이나 노년이나 비슷했다.
최근 배우자와 사별한 노년들의 사랑 이야기를 책으로 읽으며 노년의 삶을 생각해 보는 중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확실한 진리란, 인생이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면 살수록 인생은 장담하는 것이 아니란 교훈을 뼈저리게 깨달은 날들이 많다. 미래와 관련한 막연한 기대나 어설픈 상상은 오히려 독이 될 때가 있어서 차라리 아무것도 예상하지 않는 것이 낫다. 앞으로의 인생을 함부로 설계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것이 결과적으로 나을 때도 많다. 섣부른 기대의 결론은 쓴 맛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오늘은 다르다. 이미 내 시즌을 거친 노년의 인생문제를 간접적으로 상담하며 보편적인 상식 하나를 배운 기분이다. 어린년이나 적당히 나이 든 년이나 늙은 년이나. 싱글이란 조건이 같다면, 비슷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 수밖에 없겠다. 80살이 다 되어가도 연애운 보면서 내년에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언제 내 짝이 나타나려나, 기대와 기대만큼의 외로움은 여전하려나 보다.
막연한 계획이나 섣부른 설계는 통로를 차단해 두었는데, 가볍게나마 생각해 보고 싶어지는 날이다.
80살에도 연애운을 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