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터닝포인트
#갑진년
버라이어티 하다
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올해였다. 내 인생. 삶의 고갯길을 오르며 숨이 차서 벅차기도 했고, 내려가는 길이 쉽다고 방심하다 넘어져서 고꾸라지는 경험도 있었지만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좋은 일은 고만고만하게 좋았고 나쁜 일이 있더라도 급하게 오르내리는 격한 그래프는 아니었던 기억이다. 기억의 왜곡일지도 모르겠지만.
갑진년, 청룡의 기운을 제대로 받았는지 용의 기운처럼 변화무쌍한 에너지를 제대로 마주했다. 몇 년에 걸쳐서 일어날만한 일들을 올 한 해 다 경험한 기분이다. 인생이 이토록 예측불허라면, 재미있어서라도 살아볼 만하겠다. 마주한 일들이 모두 긍정적이고 좋은 일만은 아니어서 마음 상하고 힘들고 고달프기도 했지만 부정의 감정이 오래 머무르지 않을 만큼 새롭거나 특별한 경험도 많았다. 참 유난한 한 해다.
차디찬 겨울, 한 사람을 만났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인연에 설레었고 설렌 만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갔다. 벚꽃이 흐드러진 봄의 기운을 마음껏 느끼며 시간을 함께 했다. 특별히 갈등이 없어서 싸울 일도 없었다. 평안한 관계였으니 오래 지속되어도 괜찮을 듯했다. 착각이었을까? 인연의 시간은 짧았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깊은 곳의 진심은 아니었나 보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처음이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인연의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또다시 배우고 익혀야 했다. 여행하며 우연히 발견해서 잠깐 머물러 보는 간이역 같은 시간이라 여긴다. 기억에서 금방 옅어지며 사라질 정도는 아니지만 감정의 자국이 쉽게 흐릿해졌다.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에 생채기는 남았지만 크게 좌우될 정도는 아니다. 살아가며 충분히 겪어볼 만한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
여름엔 동료들과 함께 작업했던 책이 출간되었다. 필명이지만 내 이름이 들어간 책은 처음이라 뜻깊었다. 얼마나 팔렸는지도 모르겠고, 지금도 서점에 자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되어본 경험은 특별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맡겨진 몫은 작았고, 긴 시간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이 걸린 일이었다. 공들인 시간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이름을 얻는 일은 감격스러웠다. 갑자기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일은 마음의 동요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내 생각만 해와서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일은 아니었다. 마음을 먹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서며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맞아 보였다. '나의 책 출간!' 첫 경험의 힘은 강했다. 강한 에너지의 여운은 지금도 유지 중이다.
가을, 또 다른 인연이 시작되었다.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사건이란, 그 일이 있을 법한 원인이나 동기가 있을 텐데 이번에는 작은 신호조차 없었다. 갑자기 시작되었고 순식간에 일어났다. 뜻밖의 인연이라 해도 사람을 알게 되고 알아가는 시간이 있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달랐다. 사람을 알고 마음에 들이는 일이 한 여름의 태풍 같았다. 일기예보조차 예고하지 않은 종류의 태풍. 미처 대비할 수 없었던 자연 현상처럼.
살아오며 한 번도 누군가에게 먼저 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다. 청춘 시절에도 그랬다. 오히려 다가오는 사람이 겁이 나서 도망을 친 적이 많았다.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있어도 표현하지 않았다. 감정의 솔직함보다 자존심이 먼저였다. 특별히 마음에 쏙 든 사람도 드물었다. 마음을 온통 빼앗아 버린 사람이라도 속으로만 품었다. 운도 좋게 처음 품어본 사람이 먼저 마음을 전해서 자존심을 걸 필요가 없었다. 젊은 날에도 사랑은 순조로웠다. 첫사랑 성공!
올 가을의 일은 살아오며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사람에 대한 호감을 먼저 가져 본 것도, 호감을 표현한 것도. 대범해지다 못해 뻔뻔해질 만한 나이가 된 걸까?
' 뭐 어때? 까이면 까이는 거지. 살면서 한 번쯤 까이는 것도 괜찮잖아?'라는 생각으로 첫 도전을 했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왔다고.' 내 마음에 들어온 사람 자체가 처음이어서 스스로도 놀랐는데, 마음에 들어왔다고 고백을 하는 나를 보면서 또 한 번 놀라기도 했다. 살수록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건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에 대한 호감만으로 관계를 시작하기에는 걸리는 현실이 많은 나이다. 어릴 때는 좋아하는 마음 하나면 충분했는데 중년이 되어보니 마음만으로 안 되는 일이 무척 많다.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다. 이 나이에 누가 눈에 들어오기라도 해야 뭐라도 해볼 텐데, 어느 아저씨가 마음을 흔들까. 내 처지는 다른가. 나라고 누구 눈에 들까. 나도 마찬가지다. 외적 조건도 이러하니, 나와 상대의 마음이 일치하는 것은 더 어렵다. 어쩌다 마음이 맞는다고 해도 고려해야 할 현실 조건이 힘들면 인연을 이어가기가 힘들다. 가볍게 만나서 즐기는 상대가 아니라면 다양한 조건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살아오며 생긴 잔가지들이 너무나도 많아져서 쳐내기가 어렵다. 굳어진 고목처럼 유연하지 못한 나이이기도 하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일단 시작을 했다. 좋은 여건은 아니다. 어린 나이였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현실 조건이다.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아직까지 별 문제는 없다. 가끔은 현실 때문에 갑작스럽게 끊어질까 봐 겁이 나기도 한다. 아직 잊히지 않은 생채기의 기억이 불쑥 떠오르면 이번에도 그럴까 봐 두려울 때도 있다. 사랑의 순서가 정해져 있어서 뜨거운 마음의 종착역을 향해 가는 청춘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좋아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같이 있고 싶어 져서 결실을 맺게 되는 단순했던 그 시절과는 차이가 확실하다. 상대에 대한 마음이 어떻게, 어디로 흘러갈지 가늠하기 어렵다. 보편적인 순서대로 흘러갈지, 만남만큼 갑작스러운 일을 마주하며 변화 앞에서 망설일지 당사자도 모른다. 인생이란 장담할 수 없음을 오랜 시간 학습했고, 학습의 효과는 아직도 유효하다.
누가 들으면 시작하지 않을 현실 여건이지만, 어쩌면 젊지 않아서 시작을 한 것도 같다. 아니, 마음은 젊은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순수만으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마음의 끈은 어느 때보다 단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왠지 자신이 없기도 하다. 마음의 끈만으로도 충분한 건지 잘 모르겠다. 아직은 판단이 어려운가 보다. 그저 현재에 충실하고 있다. 현재 마음의 에너지에 충실한 것이 더 정확하겠다. '앞으로'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알 수 없는 미래를 내 입맛에 맞게 떠올리기에는 스스로도 미래에 대한 생각이 불투명하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볼 뿐이다.
겨울에는 집이 팔렸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 또한 갑작스러웠다. 팔 의지가 있으니 부동산에 내놓았겠지만 꽤 오래전에 내놓았고, 아무래도 팔지지 않을 것 같아서 가지고 있으려고 했다. 목표한 가격에 매수자가 나타나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성급하게 결정을 해버린 것도 같다. '앞으로' 경제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전문가들의 의견도 분분한데 숙고하지 않았다. 어쩌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쉽게 집이 팔려서 당황했다. 아무 생각 없이 쉽게 샀던 집이라서 그런지 보내는 일도 순조롭다.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것과 비슷한 상실감은 있는데 이렇게도 계약을 하나 싶도록 편안하게 매도 중이다.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는 깔끔한 거래가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입금이 되는 순간부터 현실이 인지되며 마음이 급해진다. 뒤늦게 '앞으로 집값전망'을 검색하며 부동산 시장과 경제전망을 살펴보는 일이 상당히 버겁다. 그래봤자 유튜브에서 떠들어대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예측이자 견해라서 믿을만한지도 모르겠어서 누구한테 물어가며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헷갈린다.
오랜 시간 데이터가 쌓여서 예측가능해 보이는 경제전망도 예측불허일 때가 많다. 정치 상황과 맞물리며 예상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다. 갑자기 일어나는 일에 대비하지 못하면서 맞게 되는 큰 사건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IMF를 비롯한 경제위기를 많이 거쳐왔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숫자도 틀릴 때가 많은데 한 사람의 인생 앞에 놓인 일들을 어떻게 예상할 수 있을까. 부동산 전망은 부동산 데이터만 살피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부동산과 관련한 여러 가지 경제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아파트 가격이 전 세계 경제와도 얽혀 있다. 뻔해 보여도 뻔하지 않은 것이 세상의 일이니, 뻔하지 않을 한 사람의 인생을 내다보는 것은 가볍지 않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현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이다. 대한민국 시민으로 25년간 집을 사고팔아왔던 경험에 전문가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공부를 해도 어떤 판단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인지는 지나 봐야 안다.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 내 예측과 맞아떨어지며 좋은 결실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로 고생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진심을 다해 최선의 노력을 해볼 뿐이다. 사람 사이의 일은 더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최선을 다 해 볼 뿐이다. 나의 최선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지나 봐야 안다. 어떤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할지는 나도 모르겠어서 '앞으로'를 생각할 수 없다. 현재에 충실하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모르겠으니 그렇게 하기로 한다.
인생에서 한 번쯤 해볼 만한 특별한 경험을 갑진년엔 계절별로 했다. 특별한 경험이라서 인생의 큰 변곡점을 만난 기분이다. 이 시간을 기점으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겁도 난다.
무서워서 소원 하나를 가져보고 싶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 필요할 때는 이성을 발휘하고 직관이 필요한 시간에는 적당한 직관대로 판단하며 감정이 요구되는 일에는 충분히 감정을 살필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빈틈이 많은 사람이라서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역량을 발휘해서 변화의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내고 싶다. 미래의 언젠가 지금을 생각해 보면, 참 잘했다고, 좋은 선택이었다고. 나를 칭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