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마법 주머니 속 10센트

by 수경

2019년 10월 25일. 친구와 함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넘나들며 보낸 열흘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곳을 떠난다는 아쉬움이 눈꺼풀을 짓눌렀던 탓일까. 일찍이 새벽에 공항버스를 타야 할 시간을 불과 10분 남기고 번쩍 눈을 떴다. 짐을 챙겨 나가기에도 이미 늦은 시간.


결국 슬로베니아를 떠나는 건 비행기뿐이었고, 우리는 예기치 못하게 주어진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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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이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호스텔 사장님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다음 날 탑승할 비행기 티켓을 프린트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환하게 웃으며 단골 인쇄소를 알려주더니, 대뜸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건넸다. 친구의 손바닥 위에 10센트짜리 동전 한 닢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순간의 어리둥절함은 사장님의 한마디에 금세 따뜻함으로 스며들었다.


프린트 요금은 10센트쯤 나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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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 온기를 간직한 채, 인쇄소에 들어서자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가방과 겉옷을 편히 두라며 자리를 안내해 주는가 하면, 시원한 음료와 간식을 한껏 내어주기까지. 호스텔 사장님이 이곳을 추천한 이유가 단순히 가까워서만은 아니었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비행기 티켓을 출력하고 나니 비용은 정확히 10센트가 청구되었다.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계산을 하던 중, 할아버지는 우리의 여행 이야기가 궁금하다며 말을 걸었는데, 열흘 간의 다채로웠던 모험담에 연신 감탄을 쏟아내던 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여행은 마치 마법 주머니 같아요.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르니 더 설레고
즐거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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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가 꽤 있으셨지만 누구보다 총명하게 빛나는, 잔뜩 상기된 할아버지의 눈을 마주하자 내 머릿속엔 단번에 영화 <포레스트 검프> 속 명대사가 떠올랐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
무엇을 얻게 될지 모르지.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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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하게 주어진 하루, 그 안에서 이뤄진 포레스트 검프와의 만남. 이 모든 것이 마치 할아버지의 마법 주머니에서 나온 선물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법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욱 선명해졌는데, 여전히 활기로 가득한 밤의 류블랴나.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이 뒤섞인 광장 어디선가 익숙한 향이 퍼졌다. 무엇인가 했더니 크로아티아에서 처음 맛본 뒤 단번에 반해버린 군밤이었다.


친구와 나는 동시에 지갑을 꺼내 남은 돈을 탈탈 털어보았지만, 꼭 10센트가 모자랐다. 절묘하게 모자라는 금액에 탄식하며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친구는 갑자기 멈춰 서고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곤 외친 한마디.


사장님이 주신 10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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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3유로를 딱 맞게 채워 군밤을 얻어낸 우리는 뜨거운 밤을 호호 불어가며 달콤함을 머금었다. 그러다 새삼 하루를 돌아보니, 모든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스텔 사장님의 작은 친절로 주어진 10센트 한 닢이 우리를 인쇄소의 할아버지에게, 따뜻한 군밤에게, 연달아 연결해주었다. 이때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대단한 무언가가 삶을 바꿔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정작 가장 깊고 따뜻한 변화는 아주 사소한 다정함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날의 우리는 삶이라는 마법 주머니에서 10센트를 꺼냈지만, 그건 그저 단순한 동전이 아니었다. 작은 다정함이 하루를 바꿀 수 있음을 알려준 거대한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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