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독일 뒤셀도르프: 룸메이트와 20센트

by 수경

스웨덴에서의 교환학생을 마치고 홀로 독일 여행을 시작한 지 3일째.


늘 친구들과 함께했던 150일의 일상에서 벗어나 혼자가 되니 어색한 외로움이 찾아왔고, 뒤셀도르프의 회색빛 적막은 그 감정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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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차 한잔이 기분을 달래줄 듯해, 라인강을 따라 걷다 카페에 들렀다. 문을 열자마자 은은한 홍차 향이 코끝을 스치니 기분이 좋아져 사장님께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잠깐의 고민 끝에 메뉴를 고르고 카드를 내밀었지만, 현금만 받는다는 사장님의 말에 지갑을 뒤져보니 20센트가 모자랐다. 별 수 없지 하고 가게를 나서려던 찰나, 사장님은 다급하게 손짓하며 외쳤다.


잠깐만, 그냥 줄게요!


내 상식 밖의 호의였기에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사장님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단호했다. 결국 부족한 돈이라도 받아달라며 가진 현금을 모두 드린 채 연신 감사 인사를 하자, 사장님은 조용히 미소로 답했다.


흐릿하고 차가운 뒤셀도르프의 풍경 속에서, 마음 한구석에 온기가 내려앉은 첫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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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이벤트로 마음이 몽글몽글해진 채 숙소로 돌아왔다. 늦은 밤인데도 텅 빈 6인실을 보고, 이 넓은 방을 혼자 쓰려나 보다 내심 기뻤다. 샤워도 하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도 틀어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는데— 하나둘 룸메이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남자였다는 것. 그동안 사용했던 다인실에서는 보통 같은 성별끼리 배정해 주던데, 이곳은 아주 얄짤 없었다.




그중 첫번째로 들어온 남자는 어린 여자애가 혼자 여행하는 게 신기한지, 계속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어? 왜 혼자 여행해? 어디어디 가봤어? 어느 나라가 가장 좋아?'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TV 바로 앞 자리를 차지한 백발의 할아버지는 조용히 뉴스를 시청했고, 보헤미안 여행가 스타일의 중단발 남자는 짧은 인사 후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내 윗침대를 쓰게 된 단정한 금발의 남자는 이불을 폭 덮어쓴 채 부스럭부스럭 과자를 씹었다.


나이도, 생김새도, 아마 국적도 제각각인 조합이었다. 이들과 이틀 밤을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에 걱정이 들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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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도 홀로 도시를 돌아다녔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동네를 걷는 내내 그 누구와도 말을 할 일이 없었다. 그저 고요함 속을 가없이 걸어다녔다.


그러다 저녁 무렵 숙소로 돌아오니, 어젯밤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TV를 보고 있었고, 몇몇은 침대에 누운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며, 프로 질문러는 또다시 내게 다가와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오늘 처음으로 적막하지 않은 순간이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경계심과 어색함이 감돌았던 이 공간이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하루 종일 혼자 돌아다녔던 탓인지, 아는 얼굴들이 모여있는 게 반갑기까지 했다. 불과 하루 만에 이런 기분이 들다니, 스스로도 우스운 와중에 귀찮았던 질문들까지 재미있어 한참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또 하룻밤이 지나 뒤셀도르프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캐리어를 정리해 나가려는데, 침대에 누워있던 룸메이트들이 모두 문 앞까지 나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는 다음 여행지가 어디냐고 묻더니, 미소를 띠며 "즐거운 여행 되길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던 청년은 "한국까지 조심히 돌아가”라며 악수를 청했고, 나머지 두 명도 상냥한 미소를 띈 채 손을 흔들어주었다.


짧지만 함께한 시간 덕분일까, 방을 떠나며 문득 이들 덕분에 칙칙하고 우울한 도시에 정이 들어버린 걸 깨달았다.




뒤셀도르프에서 홀로 보낸 5일을 마무리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다정함은 요란하지 않아도 된다. 사장님이 기꺼이 베푼 20센트, 룸메이트들과의 소소한 교류가 내 여행의 기억을 통째로 바꿔 놓은 것을 보아하니. 사소한 친절이 마음속에 스며들어, 음울하고 고요한 도시를 따뜻하게 기억하도록 했다.


여행 뿐만 아니라, 인생도 결국 우리가 주고받은 작은 다정함으로 기억되는 게 아닐까. 나도 누군가의 길 위에 작은 온기로 남아, 그의 여정을 더 따뜻하게 기억될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뒤셀도르프의 인연들이 내게 그래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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