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쉬었습니다!
입사 절차에 따른 연봉과 직급, 시작일을 확정하고 다시 직장 복귀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있다.
지난 세 달여 간의 기간 동안 스스로 선택했던 안식월을 마무리하고 있다.
읽고 싶던 책도 많이 읽고 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무엇보다 글쓰기를 시작했다.
참 좋았다. 역시 노는 게 제일 좋은 모양이다.
퇴사를 결정하였을 때,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심정으로 next plan에 대한 준비도 고려도 없이 무작정 내려놓았었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 반 부러움 반(?)을 뒤로하고 호기롭게 일을 저질렀다.
다시 일을 해야 할 텐데 얼마나 쉬게 될까? 언제부터 다시 준비해야 하지?
걱정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저 순간을 즐기고자 노력하였다. 새로운 경험과 시도,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신선한 경험도 있었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삶에 쉼표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6개월, 1년, 그렇게 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역시 현실적이지 못하다.
현실과 이상의 타협은 언제나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쉼의 중요성을 이번 기회에 많이 느꼈으니, 앞으로의 삶의 태도도 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회사로의, 아니 일로의 복귀를 준비하면서 세운 기준 하나가 있다.
욕심 내지 말자, 그간의 내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름 쌓아온 경력과 급여 수준, 직급 등등.
조금 부족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나는 욕심 내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들이 이제 나의 우선순위에서 그리 중요치 않다고 느껴진다.
삶에는 서로 다른 면이 있다는 작은 깨달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삶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한걸음 물러서서 살펴본 회사 또한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회사는 목표를 공유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장소와 시간, 공동체일 뿐, 나름의 전문성을 통해 이익 창출에 기여하고 약간의 보람과 경제적 보상을 얻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신의 꿈과 자아실현을 위한 이상보다는 나 만의 일과 삶을 위한 현실, 정체성을 찾아가는 현실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자본주의에서의 개인 한계를 명확히 정의했다.
"자본주의 안에서 기업(회사)은 끝없는 성장을 지향하지만 그 안의 구성원인 개인의 행복은 무한히 높아질 수 없다."
회사는 법인이라는 용어로 불리는 말 그대로 법적으로 정의되고 인가된 공동체 일뿐이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실체는 모호하지만 우리 삶에, 특히 그곳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영향을 끼치는 집단적 존재이다.
개인은 회사라는 거대한 유기체 안에 속한 하나의 세포와 같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대한의 역할을 해내기를 요구받는다. 하지만, 회사라는 유기체가 성장하더라도 세포 하나하나는 성장하지 않는다.
분화하여 더 많은 세포로 채워지거나 새로운 세포로 대체될 뿐이다.
owner 가 아닌 이상 말단 사원이든 임원이든 유기체 안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의 역할을 수행하는 개별 세포와 같은 존재 들일뿐이다. 머리카락 세포든 뇌 세포든 근본적인 기전은 동일하다.
조용한 퇴사가 유행어처럼 들리는 요즘이다.
하지만 회사 또한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다. 널널이 일하는 사람을 가만히 둘리 없다.
나 역시도 다시 일을 시작하면 또다시 실적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는 스트레스, 갈등에 번뇌하며 다시 또 퇴사를 꿈꿀 수도 있고, 결국은 전과 다르지 않은 삶의 모습들에 후회하며 땅을 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삶의 변주가 전과는 달라질 것이란 믿음이다.
조용한 퇴사는 삶의 우선순위에서 일을 내려놓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직장생활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우선순위에 대한 고려는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눈앞에 놓인 실적과 목표, 사람들 간의 경쟁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다만, 내 삶에 다른 면도 있고 나는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삶의 다양성을 느끼고 배우며 내 삶의 가치가 보다 높은 곳에 있음을 깨닫는 것,
나의 사명이 회사가 추구하는 이익과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만 있지 않음을,
내 나름의 사명으로, 삶의 가치관으로 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조용한 퇴사를 위한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이제 2 ~3주 후면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유리잔 보다도 약한 나의 신념과 깨달음, 무한히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 같은 삶으로의 회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삶에 기대를 갖는 건 매 순간순간 나에게 부여될 시간의 소중 함을, 작별의 시간에 펼쳐질 환희의 순간이 내게도 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같이 화려한 엔딩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엔딩을 위하여,
50이 되니 다시 가슴이 뛴다. 전과는 같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