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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돌 Apr 21. 2024

여보! 당신은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는데?

좁은 방 한칸에서 가족들이랑 다시 뒹굴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

병실 문 앞에 서 있는 영애 씨를 본 남편은 있는 힘을 다해 반가운 듯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 왔나. 좀 쉬지 일찍 왔네..."

남편의 첫마디였다. 이렇게 남편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기는 솔직히 싫었다.

아니 이 모습을 다시 보는 것 자체가 자신이 없던 영애 씨였다.

며칠 전에 남편의 제사를 지내고 온 영애 씨였다. 그런데 다시 살아있는 남편과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

혼란스러웠다. 건장한 시절의 남편을 만났더라도 당황스러웠을 텐데, 더군다나 영애 씨와 마찬가지로 남편

또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인 이 순간으로 다시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언니야! 뭐하노? 왜 계속 거기에 서있노!"

동생의 한 마디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래. 니 고생 많았제? 아침부터 웬일이고? 내가 오면 되는데..."

"그냥 형부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왔지. 형부도 내 보고 싶을 것 같아서... 맞지요?"

"허허허"

대답대신 그저 사람 좋은 미소로 웃는 모습을 보여 주는 남편.

남편은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저 좋은 사람이었다. 순하고 착하고 아이들을 잘 챙기는 아빠였으니...

그러나 정작 영애 씨는 남편의 모습이 그리 좋은 기억만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고집세고, 술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과 살아온 영애 씨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고충도 많았었기에 행복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순간도

많았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라는 사실은 영애 씨도 부인하지 않았다.


"좀 어때요? 어제 보다 좀 괜찮나?"

"그래. 니가 걱정이지."

"뭘 내 걱정을 하노! 당신이 아픈 사람인데... 내야 어디 아픈 데가 있나?"

"내가 빨리 일어나야 되는데..."

"그거 잘 알고 있으면 쫌 빨리 일어나소! 애들도 아빠 언제 오는지 계속 기다리네."

"맞나... 그래 내가 가야지..."

"내일 애들 올 거다. 누나가 지 동생들 다 데리고 같이 온다고 하데요."

남편은 좋은 듯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처지가 괴로운 듯한 모습이었다.

"밥은 좀 먹었어요?"

"아니... 계속 입 맛이 없네."

"밥 나오는 거 잘 먹어야 된다고 했잖아! 내가 몇 번을 말하노! 그래놓고 빨리 나을 수 있겠나!"

영애 씨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투로 화를 내었다. 속상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집불통인

남편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바로 미안해졌다.

'그래... 아픈 건 이 사람이고, 더 힘든 것도 지금 이 사람이다...'

"내 화낸 거 아니데이. 그냥 당신이 밥 좀 잘 먹고 해야 기력도 차리고 하니깐 걱정돼서 그만..."

"알겠다. 이따 간식 준다고 했으니깐 그거라도 먹을게. 미안하데이."

"말 많이 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힘없는데, 그냥 누워 있으세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조차도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영애 씨는 남편을 부축해 다시 침대에

눕혀주었다. 많이 가벼웠다. 여자인 영애 씨가 들어도 전혀 힘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젊은 시절의 남편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땅땅한 모습으로 건장한 편이었다.

회사 체육대회가 열리면 달리기 선수로도 출전을 한 적이 있었고, 야유회 때 노는 것을 즐기는 편이어서

노래자랑에도 참가를 하는 등 활발한 편이었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영자야! 니는 밥 먹었나?"

옆에 있었지만, 동생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다. 

"나? 그냥 오면서 대충 먹고 왔는데, 언니야는?"

"나도 대충... 그럼 밑에서 커피나 한 잔 할래? 니도 가야지?"

"아! 그럴까? 형부요! 나 이제 가봐도 되겠는교?"

"갈라고? 그래... 처제 고맙데이."

"고맙기는... 형부 내 또 올 테니깐 우리 언니야 속 섞이지 말고 말 잘 들어야 됩니데이!"

남편도 처제의 말에 멋쩍은지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해 주었다.

"내 영자랑 밑에서 커피 한 잔 하고 바래다주고 올게요. 그때까지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그래. 갔다온나."


병실에 남편을 홀로 두고 동생을 마중하기 위해 잠시 나왔다.

솔직히 잠깐이었지만 병실 안에 있는 동안 영애 씨는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제 조금 살 것 같았다. 

"언니 뭐 마실래?"

"나? 그냥 커피 한 잔 시켜주라."

동생이 커피를 주문하는 동안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가만... 그럼 혹시 저 사람과도 오늘이 마지막인가? 지난번 엄마도 이렇게 하루 지내고 보냈으니...'

'그런데 예전 이 사람은 이렇게 마지막을 보낸 건 아니었는데... 병원이 마지막이 아니었는데...'

'왜 하필 이 시점으로 돌아온 거지?'

"언니야! 커피 마셔라! 다 식었겠네!"

"응? 아... 그래. 언제 나왔노?"

"한참 됐는데? 언니가 무슨 생각하는 것 같아서 가만히 놔뒀는데,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서..."

"맞나? 내가 머리가 좀 아파서... 니는 요즘 좀 어떻노?"

"내야 뭐 똑같지. 장사한다고 정신없지 머... 형부가 얼굴이 더 많이 상한 것 같네..."

"이제 얼마 안 남았제? 언니야...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고..."

"응? 뭔데? 또 무슨 일 있나?"

"아니... 일은 아니고... 언니야가 하도 정신이 없는 것 같아서... 옆에서 챙길 수 있는 건 챙겨야 될 것 같긴

한데... 말 꺼내기가 좀 조심스럽긴 하네."

"뭔데? 말해봐라. 괜찮으니깐..."

"있잖아... 형부도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게 사실이고 하니깐... 아직 기력이 좀 있고 말도 할 수 있는 그런

상태일 때 유언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좀 남겨놔야 되는 거 아닌가 해서..."

"어? 유언..."

영애 씨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직 50도 채 되지 않은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의 유언이라...

TV 드라마에서나 나오던 그런 말이었다. 드라마에서도 유언은 할아버지 같은 연세가 지긋한 사람들이나 하던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아직 이렇게 새파란 나이의 남편도 유언을 남겨야 된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영애 씨였다. 

'유언... 그래. 필요할 수도 있겠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깐...'

'맞다! 그때도 유언을 남겼었었지?'

기억이 났다. 그 당시에도 동생이 있을 때 남편의 말을 녹음했었던 그날을...

그런데 그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얀 백지장이 된 것처럼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영애 씨는 다시 녹음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영자야... 니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너희 형부한테 뭐라고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맞제! 그래도 애들한테 형부도 하고 싶은 말씀도 있을 거고...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하시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언니야가 말하기 힘들면 내가 대신 말해주까?"

"좀 그래 줄래? 나는 도저히 말할 자신이 없네..."

"그럼 내가 이따 집에서 녹음기랑 챙겨서 다시 올게. 좀 기다려 봐래이."

동생은 그렇게 얘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영애 씨는 바로 병실로 올라가지 않고, 병원 주변길을 잠시 서성거렸다. 온통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나 그

가족, 아니면 의사와 간호사들 뿐이었다. 병원 자체가 숨 막혔지만 그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하지? 지금 이 순간을 내가 어떤 힘을 써서 안 아픈 시간으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 순간 첫째 딸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 뭐 하세요? 밥은 좀 드셨어요?"

"그래. 니는 뭐하노? 애들은?"

"우리는 이제 청소 다 하고 그냥 집에 있어요. 아빠는 좀 어떠세요?"

"아빠가 너네들 많이 보고 싶어 하시네."

"내일 갈게요. 오늘 하루만 좀 참으라고 하세요. 내일 일찍 갈게요."

"그래. 니가 동생들 챙긴다고 고생 많네. 엄마가 미안하데이."

"어머니가 미안할게 뭐 있어요? 어머니도 좀 쉬고 하세요."


애들은 이미 벌써 철이 든 상태였다. 국민학교 3학년인 막내도 벌써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철이 들었었다.

한창 뛰어놀고, 투정을 부려야 될 나이였지만, 누구 하나 엄마에게 그런 티를 내지 않았던 아이들...

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들이 고마운 영애 씨였다. 

'그래. 남편은 일찍 보냈어도, 저것들 때문에 사는 거지.'

영애 씨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남편이 누워있는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남편은 눈만 뜬 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수건을 물에 적셔 남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지그시 웃어 보이는 남편.

많이 찝찝했던 것 같았다. 미안해서 말을 못 한 듯했다. 

"얼굴 많이 찝찝했나? 말을 하지..."

"아니다. 그냥 닦아 주니깐 시원해서 그런 거지."

"여보! 계속 누워있으니깐 많이 힘들제? 애들도 많이 보고 싶고?"

"그렇지. 니한테 제일 미안하지. 이렇게 놔두고 갈 줄 누가 알았겠노..."

"니한테 애들 다 맡기고 갈라니 면목이 없네..."

기력이 없는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당신은 살면서 언제가 제일 좋았노?"

순간 영애 씨는 궁금했다. 남편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그 순간을 한 번도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되돌아가고 싶은데?"

남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영애 씨도 남편이 대답할 때까지 시간을 주기로 한 것 마냥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십 분정도 지난 시점에 남편은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나는... 애들이랑 같이 놀면서 시간 보내는 것도 좋았고..."

"첫째랑은 학교 바래다주면서 둘이 얘기하는 것도 재밌었고, 둘째는 수영같이 하는 것도 좋았고,

막내랑은 장기 두는 것도 재미 었지..."

"그리고 니랑 처음 만나서 결혼한 것도 좋았고... 우리 식구들이 한 방에서 같이 자기도 했는데..."

"나는 우리 가족들 방 한 칸에 모여서 같이 자고 했을 때가 그립네..."

"참나... 그 좁아터진 방에 같이 자는 게 뭐가 그렇게 좋았다고... 고작 좋았던 게 그때였나?"

영애 씨는 남편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들었을 때, 울컥했지만 티를 내기 싫었기에 괜히 시큰둥하게

말을 했다. 남편은 가족들과 같이 시간을 보낸 그 순간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 순간들을 이제 다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건 당신이 이제 퇴원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건데... 집에 오면 다시 같이 한 번 자자!"

영애 씨는 시큰둥한 말투로 남편을 위로 아닌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내랑 결혼한 거 후회 안 하나? 내하고 결혼한 게 뭐가 좋다고 그러노?"

"허허허"

또 대답 대신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남편이었다.

"그때 니 이뻤다. 내한테 시집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니 많이 이뻤다."

평소 이런 표현은 전혀 하지 않은 남편이었는데... 놀라기도 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은 영애 씨.

"그래. 내가 지금은 이렇게 안 꾸미고 하니깐 그렇지만, 처녀 때는 예쁘긴 했지!"

"우리 애들이 내 닮아서 다들 한 인물 하는 거지! 어휴... 그때 내가 뭐 좋다고 당신한테 시집온 건지..."

"맞제? 니도 내 안 만났으면 좀 나았을 건데... 미안하데이."

"오늘 왜 이러실까? 자꾸 바른 말씀만 하시네. 그만하시죠?"

영애 씨는 듣기 싫었다. 남편의 평소와 다른 모습이... 분명 평소에도 속으로는 이런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로는 절대 표현은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가끔 좋아하는 안개꽃 선물도 해주는 등 요즘말로 츤데레 같은 스타일이긴 했지만...

'이쁘다', '사랑한다'라는 표현은 거의 하지 않은 남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런 표현을 하는 남편의 모습이 익숙하지도 않기도 했지만, 왠지 반갑지도 않았다.

이런 표현 자체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더더욱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난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와 있다. 그렇다면 난 이 순간 뭘 해야 될까?'

'남편을 보내고 난 후, 내가 가장 후회가 되었던 것은 뭐였을까?'

'다시 남편을 만난다면 무슨 얘기를 해보고 싶었을까? 아니 물어보고 싶었던 게 뭐였을까?'

'언제 어느 순간 내가 남편이 가장 그리웠을까?'

이 순간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영애 씨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분명 어떤 의미가 있기에 돌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 내 옆에 이렇게 남편을 보내준 것이다. 아니 내가 남편 옆에 온 것이다.

이 시간 또한, 이제는 다시는 맞이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또한 영애 씨다.


'더는 후회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지 않다.'

순간 궁금한 질문이 떠올랐다. 아니 왜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인지 영애 씨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영애 씨는 남편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하루종일 말을 많이 한 탓에 피곤했었는지 이미 깊이 잠이 든

상태였다. 안쓰러웠다. 팔다리는 이미 여자인 영애 씨 보다 더 앙상하게 마른 상태였다.

많이 수척해진 얼굴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이 사람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으니..'

'일어나면 꼭 한 번 다시 물어보고 싶다.'


"여보...


다음 회차에 계속해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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