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도 푸른 바다도 그대 론데... 왜 허전한 마음이 드는 걸까?
'이게 무슨 소리야?'
눈을 뜬 영애 씨는 이젠 익숙한 듯이 먼저 주위를 살폈다.
'이번엔 또 어디로 왔을까?'
싱크대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깥에선 뭔가 시끌벅쩍한 소리도 함께...
아이들 소리였다.
'아! 이제 꿈에서 다 깨어난 건가? 꼬맹이들 소린가 보네... 그래. 이만하면 됐지!'
'학교 늦겠네. 나가봐야겠다.'
몸이 무거웠지만 스스로를 재촉하며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생각했던 상황과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남편의 모습은 여전했다.
어제와 다른 건 앞치마를 두르고 빨간색 고무장갑을 끼고 싱크대 앞에 서 있는 모습만이 다를 뿐,
어제 그대로였다.
'아직 애들 학창 시절 그때 그대로인가?
그래도 다행이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라도 더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생겼으니...'
옆 방에서 애들 목소리도 들려왔다.
'참! 그럼 얘네들도 빨리 학교 가야 되는데... 준비는 잘하고 있으려나?'
그 때나 지금이나... 아니 지금이 아니다. 그 때나 미래나 이거 하나만큼은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아이들 '등교전쟁!!!'
늘 아침은 바빴다. 아이들과의 전쟁으로...
한 명을 깨우면, 한 명이 자고 있고... 또 다른 한 명을 깨우면 자기만 먼저 깨운다고 투정 부리고...
목청이 남아나질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지만...
솔직히 내 자식 등교 전쟁까지만 참전하면 다 끝날 줄 알았다. 말 그대로 그 전쟁에서 해방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내 아이의 아이의 전쟁까지 내가 지휘하게 될 줄 미처 생각을 못했다.
그 전쟁터의 지휘관은 다시는 맡고 싶지 않았었는데... 꿈애서조차 말이다.
'참! 지금이 꿈이니깐... 이건 꿈에서는 알았다고 해야 되나?'
아무튼...
여긴 일단 현실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니깐... 꿈이든 현실이든 간에 얼른 전쟁터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영애 씨는 서둘러 애들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방 구조가 어제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어! 여긴 어제 아파트 아닌데... 우리가 살았던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지?'
방 구조 또한 이제껏 살아본 적도 없는 2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위층에서 남자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서 일단 계단을 따라 올라가 봤다.
'내가 이런 곳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나?'
올라가는 중에 창문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쫙 비쳐 왔다. 그리고 뭔지 모르게 눈부심이 느껴졌다.
'어? 바다?'
그때, 갑자기 2층 문이 열리고 두 명의 남자 아아들... 아니 어제 본모습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 건장해질 수 있다고?
분명 어제 본 우리 아이들은 국민학생... 고작 해봐야 중학생 정도?
놀이공원 수준을 좋아하는 정도의 꼬맹이들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들은 달랐다. 그냥 얼굴만 봐도 다름이 확연히 느껴졌다.
얼굴에 거무튀튀한 수염 자국도 있고, 달려오면서 자기네들끼리 다투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낯설었다. 어제까진 꾀꼬리처럼 가늘고 예쁜 미성의 목소리였는데...
굵은 톤... 변성기를 지난 남자의 목소리?
'진짜 쟤네들 맞는 거야?'
영애 씨는 하룻 밤새에 아이들이 저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봤다.
영락없는 둘째와 막내가 맞았다.
그럼 얘는 어딨 지?
첫째가 보이지 않았다. 궁금했다. 어떻게 변했을지.
분명 아이들의 성인이 된 모습까지도 지켜봐 온 영애 씨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모습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남편도 아직 옆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 말이 안 된다기보다는 그냥 현실이 아님이 확실했다. 그 생각뿐이었다.
'여긴 지금 분명 현실이 아니다. 꿈이다. 알고 있지만 일찍 깨고 싶진 않다. 조금만 더... 여기서 지내고 싶다!'
영애 씨는 둘째에게 물었다!
"누나야는 어디갔노?"
"누나야? 1층 화장실에 있나? 관돌아! 누나야 어디 있는지 아나?"
"누나야? 음..."
"아! 맞다! 아까 전에 바닷가 구경하러 간다고 먼저 나갔지 싶은데? 아빠한테 얘기하고..."
'바닷가? 여긴 어디지?'
분명 2층 계단을 올라가면서 창 밖에 바다가 보이긴 했다.
그런데 그땐 자세히 보지 않았기에 어딘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때 뒤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일어났나? 어제 많이 피곤했나 보네? 못 마시던 술 한잔 해보니깐 피곤하더제?"
"응? 내 어제 술 마셨어요? 기억이 잘 안나네..."
"그래! 니 어제 소주 2~3잔 내하고 같이 마셨지! 내 먹는 게 맛있어 보인다면서...
얼마나 맛있길래 맨날 술 마시고 오는 건지 궁금하다면서... 내가 한 잔만 마시라고 그만큼 말렸는데, 니 말
잘 안 듣던데... 내 술 취해서 오는 거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먼저 취해서 술주정하던데...ㅋㅋㅋ "
"속은 좀 괜찮나?"
영애 씨는 살면서 남편과 술을 마셔본 적이 거의 없다. 연애 때도 거의 마신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영애 씨는 남편이 돌아가기 전까지 술을 입에 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워낙 남편이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기에 술 자체를 싫어했다. 담배는 물론이고.
그런 영애 씨가 어제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남편과 함께.
정신을 차린 영애씨...
"어. 그래요. 얘기 들으니깐 좀 기억나긴 하네. 한 잔만 마신다는 게 어제 기분이 좋았나 보다."
"속은 좀 어떻노? 북엇국 끓였으니깐 같이 먹자!"
"어쩐 일로? 맨날 내가 해장국 끓였었는데..."
"밖에 나왔는데, 이런 날도 있어야지! 어떻게 나와서까지 내가 당신 해주는 거 먹을 수 있겠노? 이런 날에는 나도 우리 마누라한테 봉사 좀 해드려야지! 여왕처럼 모시고!"
'밖이라고?' 궁금했다.
"그런데 여기 어디고? 그거 한 잔 먹었다고 다 까먹었네. 나는 술 마시면 안 되겠다."
"여기 내 고향 00 아이가? 애들 그렇게 바닷가 바닷가 노래를 부르는데... 안 올 수가 있나? 그래서 방 좀 좋은 데 하나 빌리기로 했잖아! 니 어제 침대에서 잘 자데?"
"아! 그래... 이제 다 생각나네요."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는 영애 씨. 이곳은 남편의 고향 집 근처 바닷가였다.
분명 처음 와 본 곳은 아니었지만, 이 집은 많이 낯설었다. 어쨌든 집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첫째는 어디갔노?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바닷가 갔어요?"
"그래! 아까 바다 보고 싶다고 먼저 나간다고 하더라. 니 계속 기다리다가 안 일어나서 혼자 가던데...
빨리 나가봐라! 야들은 내가 집 정리하고 수영복 갈아입혀서 같이 데리고 갈게.
수영도 하고 싶고 낚시도 하고 싶어 지금 난리 났다. 준비시켜서 같이 갈 테니깐 첫째한테 가봐라!"
생각하기 싫지만 지금 분명 남편은 입원해 있다. 아니 남편은 이미 죽었다.
여긴 거듭 말하지만 현실이 아닌 꿈이다.
꿈에서 몇 번이고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었다.
'아빠랑 하고 싶은 게 뭐가 있는지... 그리고 뭐가 가장 재밌었는지...'
아이들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냥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를 좋아했고, 그리워했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은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가족들의 모임 장소 대부분이 병실이었다. 그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아픈 아빠를 데리고 놀러 갈 수 도 없을뿐더러, 아이들 또한 아빠를 두고 놀러 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저 가족 전부가 같이 있으면 장소가 어디든 행복했었던 그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행히 병실이 아닌 바닷가. 그것도 남편이 좋아하는 자신의 고향.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어촌에서 생활해 왔기에 수영도 잘했다. 베도 잘 탔다. 또 하나, 낚시도 잘했다.
아이들은 그런 아빠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멋있어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지금 이 순간... 그 추억의 장소로 다시 온 것 같았다.
남편을 믿고 얼른 첫째를 만나러 뛰어갔다. 어떤 모습일까?
동생들이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면... 첫째는 아마 대학생의 모습일 거다. 궁금하다.
저 멀리 백사장에 앉아 있는 하양 피부의 소녀가 눈에 띄었다. 내 딸이었다.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자기도 기다렸던 엄마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얼른 엄마 쪽으로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엄마에게 안기며 반가워했다.
"어머니! 잘 주무셨어요? 아까 내가 계속 깨웠는데... 어제 아빠랑 술 한잔 드셨다면서요? 속 좀 괜찮나?"
"그래. 나야 머... 니 많이 기다렸나? 바다 오랜만 이제? 니 많이 컸네!"
"응? 많이 컸다고? 어제 봤는데 무슨... 하루 만에 커봤자 얼마나 큰다고..."
이 말을 들은 영애 씨는 순간 뜨끔했다. 이 모든 건 나만 아는 사실이니깐...
당연히 아이들 입장에서 영애 씨의 말은 우습게 들렸으리라...
모녀는 어깨동무를 한 채 따쓰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해변가를 천천히 걸었다.
잠시 후...
함성이 들려왔다.
"와! 바다다! 어머니! 누나야!"
뒤를 돌아보니, 둘째와 막내의 모습이었다. 준비를 다 끝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남편의 모습도 같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오면서 긴 대나무 막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웬 대나무?'
드디어 다섯 명의 식구가 다 모였다.
"오예! 아빠 이제 머 할 건데?"
막내의 질문을 마친 후,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빠를 입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입을 떼는 남편.
"배? 얏호!"
"아빠! 그런데 우리 배 있어요?"
"기다려봐라! 여기 이 동네 배 전부다 아빠 말 한마디면 다 탈 수 있으니깐!"
허세 가득한 남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세등등한 남편의 기를 괜히 꺾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100미터 정도 떨어진 방파제 인근에서 뱃고동이 울렸다.
"아! 아빠다! 어머니! 저기 아빠 있어요!"
10명 남짓 탈 수 있는 어선에서 경적을 울리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빠가 운전하는 것 같은데... 빨리 가봐요!"
첫째와 둘째, 그리고 막내는 얼른 배를 향해 달려갔다.
영애 씨도 같이 향했다. 배를 향해...
아니 남편을 향해...
'그런데 왜 이상하게 이 순간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걸까?'
'저렇게 아이들도 좋아서 웃고 있는데... 남편 또한 행복에 겨운 모습인데...'
'왜 나만 허전하고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거지?'
그렇게 영애 씨는 가라앉는 기분을 얘써 감추며 가족들을 향해 달려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