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다시 마주할 수 없는 순간일지도...
영애 씨는 잠든 남편 곁으로 걸어갔다. 많이 울었던 탓인지 얼굴이 더 수척해 보였다.
'참 복도 많은 사람이면서도 복이 없는 사람...'
'저렇게 아빠를 좋아하는 애들을 두고서도 먼저 떠나야 된다니..'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고, 영애 씨도 아래쪽 간이침대를 꺼내어 누웠다.
오랜만에 가족 전체가 함께 보낸 하루라서 행복하기도 했지만, 신경을 너무 많이 쏟은 하루였다.
눕자마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영애 씨도 금방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여긴 병원이 아닌 듯했다.
'어! 어디지?'
찬찬히 둘러보니 익숙한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전축, 장롱, 커튼...
여긴 집이었다.
지금 영애 씨가 누워 있는 곳은 어젯밤 병원에서 남편의 침대 밑에서 꺼낸 간이침대가 아닌 집에 있는 넓은
침대였다. 그리고 옆에서 술 냄새도 조금씩 진동했다.
'웬 술냄새지? 내가 술을 마셨나?'
옆을 둘러보니 웬 남자가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누구지?' 가만...
자세히 보니 남편의 뒷모습이었다.
'이 사람이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병원에 있어야 될 사람이 왜 지금...'
잠시 후, 조심히 방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었다.
"어머니 일어났어요? 아빠는 아직 자요?"
"응?"
"오늘 아빠랑 아침에 시장가기로 어제 약속했었는데... 아직 주무시네... 힝!"
갑자기 둘째와 막내가 침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야들아! 뭐하노! 지금 너희 아빠 몸상태 안 좋은 거 모르나? 그렇게 깨우면 안 된다!"
영애 씨는 본인도 모르게 갑자기 아이들에게 소리를 쳤다.
아이들은 엄마의 고함에 장난치는 행동을 멈추고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며 민망한 듯 가만히 서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남편이 뒤척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왜? 무슨 일이고? 아침부터 왜 애들한테 소리치노?"
"무슨 일 있었나?"
남편의 반응에 영애 씨가 오히려 더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여보... 괜찮나?"
"응? 뭐가? 아... 어제 술 조금만 먹고 빨리 들어오려고 했는데... 회식이 좀 늦게 끝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오늘 애들이랑 어시장 가기로 했는데... 내가 늦잠 자버렸네. 몇 시고?"
"아니.. 몸 괜찮냐고..."
"아! 뭐.. 어제 술 그래도 많이 안 마셔서 이 정도는 괜찮지! 그것 때문에 애들 혼냈나?"
"얘들아! 아빠 일어났데이! 아직 6시밖에 안 됐네! 아빠 씻고 올 테니깐 시장 같이 갈 사람?"
"저요! 나도!"
둘째, 셋째가 아빠의 말에 신이 났는지 다시금 기분이 좋아졌다.
남편은 서둘러 세수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고, 그 모습을 지켜본 영애 씨는 순간 멍해졌다.
'아... 다시 상황이 바뀐 거구나!'
영애 씨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현재의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든 밝은 가족들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당신도 오랜만에 같이 갈래?"
"아니요. 그냥 애들이랑 다녀오세요. 저렇게 기다리는데 빨리 갔다 오세요!"
"그래! 그럼 우리 이쁜 공주님이랑 집 잘 보고 있어래이!"
두 아들 녀석들을 데리고 남편은 시장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니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한 것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광경이었다. 아니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를 모습이다.
첫째는 아직 자고 있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첫째가 자고 있는 방으로 건너가 보았다. 늦게까지 공부를 한 모양이었다.
책상에는 책이 펼쳐져 있었고, 좋아하는 라디오를 계속 들었던 모양인지 여전히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도 그렀지만, 우리 딸은 진짜 여전히 어릴때 부터 많이 부지전했네!'
"우리 딸! 아직 자나?"
"으응... 어머니 일찍 일어났네요? 지금 몇 신데?"
"아이다. 아직 더 자도 된다. 이제 7시도 안 됐다. 어제 늦게까지 있었나 보네?"
"응... 숙제할 것도 있고... 아빠는?"
"동생들이랑 시장 가셨다."
"아! 나도 같이 가기로 했었는데... 그냥 있다가 밥이나 먹어야겠네."
"그래 피곤할 건데 좀 더 잘래?"
"응... 좀만 더 자고 일어날게요."
평온한 하루였다. 오랜만에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는 그런 평온하고 기분 좋은 하루 같았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즈음,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왔다.
올라오는 계단에서부터 시끌벅쩍한 소리가 들렸다.
'뭐가 저리도 신이 나는지... 참...'
"어머니! 우리 왔어요! 누나야 일어났나?"
막내가 고함을 지르면서 뛰어들어왔다.
"맛있는 거 많이 사 왔나?"
"아빠가 오늘 회랑 매운탕 끊여 주시로 했어요! 고기도 엄청 큰 거 많이 사 왔어요!"
"누나야 준다고 오징어도 사 오고... 근데 누나야는 왜 뼈 있는 회가 더 맛있는데 그걸 못 먹노?"
남편은 딸아이의 식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싱싱하고 맛있는 회를 먹이고 싶었지만, 가리는 음식이 많은 탓에 그나마 좋아하는 오징어를 사 와서
함께 해주기로 한 것이다.
"아빠 오징어 사 왔어요?"
뒤늦게 일어난 딸이 아빠를 보자마자 물어본다.
"당연하지! 우리 공주님 좋아하는 건 따로 사 왔지! 쫌만 기다려봐래이!"
그렇게 일요일의 요리사가 부엌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게 몇 년 만인가? 아니 이걸 다시 한번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남편은 생전에 주말이면 일찍 일어나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많이 준비해 주었다.
특히, 어촌에서 자란 탓에 생선류의 요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아이들도 회를 좋아하였다. 특히, 아빠가 해주는 음식을 특히 더 잘 먹고 좋아했었다.
"오늘 아침에 이거 먹고 우리 드라이브 한 번 갈래?"
"얏호! 아빠, 어디로 갈 건데요?"
"우리 관돌이 어디 가고 싶은데 있나? 관돌이 가자는 대로 가야지!"
"경주!"
"그래! 그러면 경주로 한 바퀴 돌고 오자!"
"당신도 괜찮나?"
남편은 현재 전혀 아픈 기색이 없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당연했다.
지금 이 시점은 아픈 상태의 시점이 아니었으니깐...
"그래요. 밥 먹고 그럼 같이 나가요!"
어제 늦게 들어온 탓에 피곤한 기색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주말에는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를 쓰는 남편을 보니 든든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술이랑 담배를 줄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이라도 잔소리를 하면 좀 듣으려나? 그러면 나중에 상황도 바뀔 수 있을까?'
남편이 손수 차려준 아침밥상.
웬만한 횟집에서 먹는 상차림보다 더 푸짐하고 호화로워 보였다.
그냥 회사원으로 지내기에는 솜씨가 너무 아까워 보이기도 했다.
지금 같았으면 회 안주에 소주도 같이 곁들여 먹고 싶은 영애 씨였지만...
이 때는 소주를 거의 입도 못 댄 시절이었기에... 남편 앞에서 술을 마시기라도 한다면 무척 많이 놀라워
할 것이 뻔했기에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괜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할까 봐 밥만 먹었다.
'아쉽네. 이렇게 싱싱하고 좋은 횟감에 소주 한 잔 하면 딱 일건대...'
영애 씨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이 사람은 뭐라고 생각할까?'
'생전에 같이 술 한잔 해 본 적도 없었는데... 지금은 소주 한 병은 거뜬히 먹을 수 있는 내 모습을 저 위에서
지켜본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이게 전부 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준 건데... 설마 나한테 술 먹는다고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살아 생전에 마음 터놓고 이렇게 같이 한 잔 마셔봤으면 좋았으려나?'
그리고 나선 혼자 피식 웃었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은 후, 설거지까지 남편이 다 끝낸 후,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차는 여전히 남편이 회사에서 직원들의 출퇴근을 시켜주고 있는 봉고차였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 경험들이 많은 하루였다.
아니 다시 말하지만, 오랜만이지만 이제 다시는 못해 볼 수 있는 경험들일 수 있다.
차 문을 열자 그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회사 작업복 냄새와 예전에 맡았던 남편 차 안의 고유한 향...
오래간만에 맡을 수 있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옆 자리는 막내 관돌이 차지였다. 남편이 운전하는 옆 자리에 앉아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도 혹시 위험할까 봐 영애 씨가 옆 자리에 같이 앉고, 첫째와 둘째는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가족들이 온전히 모인 드라이브를 시작하기 위해 출발하는 순간이다.
뭉클했다. 다른 가족들은 느낄 수 없는 영애 씨만의 그 묘한 감정...
'아! 이게 도대체 몇 년... 아니 몇 십 년 만인가? 정말 꿈이지만, 꿈만 같은 현실이네...'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 남편의 활짝 웃는 그 표정...
진짜 잊고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옆에서 이런 순간들을 다 볼 수 있다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을 잘 보내고 싶었다. 슬픈 생각은 하기 싫었다.
그냥 현재 있는 그대로의 순간만을 오롯이 즐겨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난 30대 영애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 30대 영애다!'
'과거도 미래도 어떤지 잘 모르겠다! 그냥 이 순간만을 온전히 즐기고 싶다!'
그렇게 웃음소리가 끊이질 앉는 봉고차는 영애 씨의 다짐과 함께 경주로 출발했다.
다음 회차에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