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중에! 애들 잘 키웠다고 꼭 칭찬해주세요!
병원 밖으로 나온 영애 씨는 아이들이 내리는 버스 정류장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음이 심란했다. 아직 살아있는 남편의 유언을 들은 날이어서 더 그런 건지 모르겠다.
'저렇게 가족들에겐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그러게 평소에 건강 좀 잘 챙기지...'
'이제 와서 후회하고 원망하면 뭐 하나...'
혼자 생각이 많아진 영애 씨... 눈가는 이미 촉촉이 젖어있었다.
저기 멀리서 102번 버스가 보였다. 허겁지겁 흐르는 눈물을 옷깃으로 닦았다.
아이들이 타고 오는 버스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잠시 후 버스가 정차하고, 뒷 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내렸다.
막내가 오랜만에 보는 엄마가 반가운 듯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와 안겼다.
불과 얼굴을 본 지 하루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영애 씨도 거의 한 두 달 전에 아이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남편 병간호로 아이들과의 시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첫째와 둘째도 엄마에게 달려와 안기고 싶었지만, 막내가 엄마의 품을 독차지하고 있어 멈칫하는 모습이었다.
영애 씨는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고, 첫째, 둘째도 불러서 세 명 모두를 한꺼번에 품 안으로 감싸 안았다.
마치 이산가족이 몇 십 년 만에 상봉하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했다.
"너희들 배 많이 고프제? 뭐 먹을래? 오늘 엄마가 다 사줄게!"
"아니 괜찮아요. 그냥 병원에 가서 밥 먹어요." 첫째가 말했다.
"니 왜 그러노? 오면서 뭐 먹고 왔나?"
"아니요."
"그런데?"
"아니... 그냥 아빠도 병원에 계시고, 어머니 돈도 그렇고..."
딸내미는 뒷말을 흐렸다. 이제 고작 중학생이다. 그런데 벌써 돈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애 씨는 가슴이 뭉개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괜찮다! 엄마 조금씩 일도 하고, 너네 아빠 병원에 입원해 계셔도 회사에서 돈 나온다!"
"니가 몇 살인데 벌써 어른들처럼 돈 걱정하고 있노! 한 번만 그런 얘기하면 엄마 진짜 화낼 거 데이!"
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둘째 또한, 그런 엄마와 누나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어리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철이 든 모습이었다
영애 씨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막내에게 얼른 물었다.
"관돌아! 엄마랑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먹고 싶은 거 없나?"
"돈까스!"
"아이고! 우리 관돌이가 돈까스가 많이 먹고 싶었나 보네? 그래! 그럼 돈까스 먹으러 가자!"
"너네도 괜찮제?"
"네..."
"기운 좀 내라! 오랜만에 엄마랑 외식하는 건데 기분 좋게 먹으러 가면 안 되나? 응?"
영애 씨의 애교에 첫째와 둘째도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막내는 그냥 엄마 옆에 있으니 싱글벙글한 모습이었다.
애들 아빠가 건강할 때는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경양식 집을 찾아 돈까스를 먹으러 외식도 했었다.
그때는 첫째도 둘째도 신나 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것저것 눈치 보지 않고 많이 시켜 먹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진중한 모습들이었다. 일직 철이 든 아이들을 보니 서글펐다.
'왜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커야 되는데... 왜 이렇게 일찍 철이 들어야 되는 건데...'
원망스러웠다. 남편도 원망스러웠고,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이렇게 밝고 이쁜 아이들인데... 앞으로 내가 더 잘 키워야지! 꼭 너네들 엄마가 잘 보살펴줄게!'
영애 씨는 스스로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병원 인근에 있는 분식집에 들러 돈까스를 비롯하여 아이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푸짐하게 시켰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인지라 음식 앞에서는 그 모습을 숨길 수가 없었다.
배가 많이 고픈 듯했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천천히 먹어라! 엄마가 더 시켜줄 테니깐..."
"어머니는 안 잡수세요?"
"엄마는 아까 아빠랑 같이 점심 좀 일찍 먹었다! 그러니깐 내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 많이 먹어라!"
더 근사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은 영애 씨였지만...
솔직히 금전적인 형편이 좋지 못했다. 첫째 딸의 말대로...
남편이 장기간 입원을 하고 있는 탓에 회사에서 나오는 월급은 고스란히 병원비로 사용되어야 했고,
남은 돈의 일부는 생활비로 사용했어야 했다.
그래서 거리가 가깝다는 핑계로 병원 인근의 분식집을 찾은 것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마웠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돈까스, 김밥, 떡볶이, 라면, 순대...
평소 즐겨 먹는 음식들을 이지만, 자주 먹지 못했는지 배가 고팠던지 꽤 많은 양을 먹었다.
그리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빠가 너희들 많이 보고 싶어 하시더라!"
"우리도 아빠 많이 보고 싶었는데... 아빠는 좀 괜찮아요?"
둘째가 아빠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 안 그래도 우리 큰 아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 궁금해하시던데..."
"나는!"
막내가 질투가 나는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빠가 자기보다 형아만 보고 싶어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아빠가 형아보다는 우리 관돌이를 더 많이 보고 싶어 하시지!"
"아빠가 관돌이랑 장기를 얼마나 두고 싶어 하시는데...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궁금해하시더라!"
"맞제? 당연하지! 아빠가 내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형아 봤제?"
막내의 이런 어리광 덕분에 가족들은 그나마 한바탕 크게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삼 남매가 우애 있게 커줘서...
만약 이 중에서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이렇게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영애 씨는 다른 무엇보다도 남매간의 우애를 중시한 편이었다.
누나가 힘들어하면 둘째와 막내가 도울 수 있도록 하고, 막내가 싸우거나 맞고 오면, 누나와 형이 나서서
상대방을 혼내주기도 하고... 이렇게 삼 남매가 똘똘 뭉치면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 나이가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돈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누나는 동생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동생들 또한 누나를 좋아하면서도 겁내하기도 했다.
대견스럽기도 하면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이 입원해 있는 병실로 걸어가면서 영애 씨는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너네는 지금까지 있으면서 아빠하고 언제가 제일 재밌었노? 무슨 기억이 제일 나는데?"
"나는 아빠가 항상 학교 다닐 때 차도 많이 태워주시고, 엄마 몰래 용돈도 챙겨주시고...ㅎㅎㅎ"
"야들은 잘 모를 거다! 아빠가 어머니 몰래도 내 얼마나 많이 챙겨주셨는데..."
"그리고 둘째가 그만큼 컴퓨터 갖고 싶다고 했을 때, 그거 보다 내 피아노 먼저 사주셨잖아!"
"그때 얼마나 좋았는데...ㅎㅎㅎ"
그랬다. 남편은 첫째 딸아이에게 친구 같은 아빠였다. 질투도 많이 느끼고, 애정도 많이 쏟았다.
특히 첫째인 동시에 딸이다 보니 더 했던 모양이었다.
"맞나? 좋았겠네! 그런데 엄마가 일부러 모른 척했지 다 알고 있었거든!"
"그럼 우리 둘째는?"
"음... 나는 솔직히 누나야랑 관돌이만큼 아빠하고 시간을 많이 못 보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아빠 니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는 알제?"
"회사에 가면 우리 아들 잘생겼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공부도 잘하고..."
"에이.. 내가 뭐 잘생겼노?ㅎㅎㅎ"
"그래도 아빠 내 많이 챙겨주신 거 잘 알고 있지. 바닷가 가서 조개도 같이 잡고..."
"그냥 아빠하고 있으면 든든하고 좋았지!"
"그럼 우리 관돌이는?"
"나는 아빠하고 장기 둘 때도 좋았고, 윷놀이할 때도 아빠 항상 내 편해주니깐 좋았지!"
"아빠가 운전도 잘하니깐 차도 많이 태워주시고!"
"우리 관돌이가 아빠랑 제일 재밌게 놀았네?"
그래도 아이들이 남편과의 좋은 추억을 기억하고 있어 안심이 되었다.
혹여나 아빠를 싫어한다거나, 같이 시간을 못 보내줘 미워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남편만큼이나 서로에 대해 좋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니 마음이 놓였다.
"혹시 아빠가 나중에라도 건강해지면 같이 하고 싶은 거 없나?"
"아빠 퇴원해요?"
첫째가 물었다.
"아니... 아직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엄마가 궁금해서..."
"다른 애들 보면 부모님들이랑 놀러도 많이 다니고 하는데, 너희들은 병원에만 오고 하니깐..."
"혹시나 나중에라도 기회 되면 하고 싶은 게 뭔가 싶어서 그냥 물어보는 거지."
그 순간 세 아이들 모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좀 전의 모습들과는 다르게 뭔가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말 수가 제일 적은 둘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나중에 아빠가 건강해지시면 예전처럼 주말 아침에 아빠랑 같이 새벽 어시장 가고 싶은데..."
"어시장?"
"응. 우리 아빠 부지런하잖아! 만날 일요일 아침에 관돌이랑 같이 해서 어시장 가서 횟거리 사 오셔서 직접
잡아주시잖아. 난 그렇게 먹는 회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던데!"
"그리고 차 타고 같이 드라이브도 한 번 하고 오면 좋을 것 같은데..."
옆에서 신중하게 고민하던 첫째와 막내도 같은 생각인지 맞장구를 치며 좋아했다.
"어머니 나도 그게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내가 뼈 있는 회 잘 못 먹으니깐 아빠가 오징어회 해주시잖아!"
"나도 아빠가 다시 건강해지셔서 새벽 시장 다녀오셔서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나도!"
막내도 덩달아 누나와 형아의 말에 신이 났는지 빨리 아빠를 보러 가자고 보챘다.
'그렇구나. 이 녀석들도 그냥 평범하고 따뜻한 가정이 많이 그리웠나 보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나니 벌써 병실 문 앞에 도착했다.
"자! 이제 아빠 보러 들어갈 건데... 혹시나 아빠 주무시고 계실 수 도 있으니깐 조용히 들어가재이!"
"(나지막이) 네..."
그렇게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가려고 했는데, 침상에는 이미 남편이 앉아서 가족들을 반겨주었다.
"어떻게 일어났어요?"
영애 씨는 혼자 일어날 수 없는 남편의 앉아 있는 모습에 놀라 물었다.
"응. 아까 간호사님 잠깐 오셨길래, 부탁 좀 했다. 애들도 온다는데 계속 누워만 있을 순 없잖아!"
"아빠! 내 왔데이!"
"아이고 우리 관돌이 왔나! 언제 이렇게 많이 컸노?"
첫째와 둘째도 남편의 옆으로 가서 안부를 물으며 서로 안아주었다.
따뜻해 보였다. 남편의 컨디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영애 씨였기에 한 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지금 저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체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래도 애들 앞에서 더 이상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남편의 마음을 알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아빠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나 하는 모습이었다.
이게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많고 적음은 이 순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가족 전체가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이런 게 욕심인가? 그냥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이렇게 얘기하고 웃고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인데...'
'왜 이 시간마저도 우리한테는 길게 내주려 하지 않는 걸까?'
'아직 오십 살도 되지 않은 이렇게 젊은 사람을 벌써 데려간다니...'
영애 씨는 하늘이 원망스러웄다. 아니 한탄스러웠다.
저렇게 즐거워하는 아빠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더더욱 분함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 신이 있기는 한 걸까? 부처님... 하느님... 도대체 당신들은 왜 이렇게 이 사람을 빨리 데려가려고
하는 건가요? 좀 더 시간을 주면 안 되는 건가요?'
들릴 수 없는 상대이지만, 영애 씨는 마음속으로 크게 외쳐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을 들을 순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었다.
아이들은 병원에서 자는 것을 원했지만, 잠자리도 비좁고, 내일 등교를 위해서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머니!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되나?"
"아빠..."
막내가 애교를 부리며 떼를 쓰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은 아팠지만, 이 때는 단호한 모습이 필요했다.
"빨리 누나랑 형아 따라서 집에 가야지! 내일 학교도 가야 되고!"
"도착하면 엄마한테 전화해래이!"
"네.. 아빠도 잘 계세요. 우리 또 올게요!"
"그래! 우리 삼 남매 사랑한데이! 보고 싶데이!"
남편은 있는 힘을 짜내어 큰 목소리로 아이들을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얘씨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가서 아이들을 바래다주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남편은 좀 전의 모습과 다르게 혼자서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달래 줄 수가 없었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남편은 지쳤는지 잠이 들어버렸다.
영애 씨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듯한 말투로 혼잣말을 했다.
남편에게 바라는 간절한 소원 같은 기도를...
다음 편에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연재작인데, 시간을 못 지켜 혹시라도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핑계 같지만 회사 업무가 끊이질 않네요... 최선을 다해 연재 요일에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애독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