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옛사랑

by 여산희

선선한 기운이 아침저녁을 감싼다. 이따금 살랑살랑 갈바람이 불어온다. 어느덧 9월 중순, 세상은 초가을의 정취를 풍긴다. 가을이 되면 마음속으로 그리움이 스며든다. 흘러간 날들과 만남을 떠올리다 보면 그림처럼 피어나는 풍경이 있다. 그중 어느 옛사랑에 마음이 닿았다.


20년쯤 전이다. 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그저 은빛으로 반짝이던 작은 미니벨로만 또렷이 떠오른다. 그때 차를 제쳐두고 미니벨로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짧았지만 신바람나는 나날이었다. 바쁘고 치열한 일상 속에서 미니밸로는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안양천을 따라 싱그러운 풀꽃들의 세상을 선물했다. 그러다 야근이 잦아지고 퇴근 후 약속이 많아지면서 미니밸로와 차츰 멀어졌다.


이후 자전거를 잊고 살았다. 20, 30대에는 넘쳐나는 일을 해치우느라 취미를 가질 수 없었다. 출장이 잦고 일상은 불규칙했다. 40대가 되면서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고, 자주 걷는 습관을 들였다. 그리고 50대인 지금까지 걷기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다. 앞으로도 그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 봄부터 자전거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사랑처럼 말이다. 안양천을 걸을 때면 다시 페달을 밟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는 군복무 중인 작은아들의 튼튼한 애마가 쇠줄에 묶여 있었다. 그 녀석을 깨워서 함께 나가볼까 했지만 곧 그만뒀다. 크고 무거운 그 녀석을 감당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대신 반짝이던 옛사랑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마음 가는 대로 곧장 찾아 나섰다. 지난 6월 중고 마켓을 통해 아담한 미니벨로를 만났다. 가볍지만 단단하고 기어가 없는 픽시 자전거였다.


옛사랑을 다시 찾으니 일상이 확 달라졌다. 아침이 되면 출근 전부터 무척 설렌다. 오늘도 즐겁게 달리자는 생각에 싱싱한 기운이 솟아난다. 안양천을 지나다가 새로운 꽃이 보이면 잠시 멈춘다. 그래도 버스로 출퇴근할 때보다 시간도 단축되니 아침의 여유를 덤으로 얻은 셈이다. 더구나 자전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있다.


자전거는 먼저 힘주어 말한다. 치우치지 말고 균형 있는 삶을 꾸려야 한다고 말이다. 자전거의 경우, 균형을 잡으면 얼마든지 질주할 수 있지만 균형을 잃는 순간 곧바로 넘어질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치우치거나 균형이 무너지면 낭패를 겪을 수 있다. 자전거는 또 생각과 행동이 일치해야 이상적인 삶이라고 일러준다. 자전거 앞바퀴는 가야할 길이나 방향을 정한다. 그러면 뒷바퀴는 군소리하지 않고 앞바퀴를 따른다. 두 바퀴가 호흡을 척척 맞춰 달리는 자전거를 보라, 얼마나 멋진가! 나는 앞바퀴는 생각이고 뒷바퀴는 행동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니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터득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자전거는 계절과 호흡하면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자전거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매력을 훤히 꿰고 있다. 따라서 자전거와 함께하기만 하면 계절의 변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꾸 발견할 수 있다.


다시 찾은 소중한 옛사랑. 그 사랑을 어찌 놓칠 수 있을까. 어찌 저버릴 수 있을까. 하여 옛사랑과 더불어 균형 있는 삶,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계절과 호흡하는 삶을 언제까지나 즐겁게 나아가고 싶다.


2023년 9월 12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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