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또 다른 얼굴 : 성차별, 성희롱, 성추행
고등학생이 되며 생활 반경이 순식간에 확장되고 보니, 세상은 넓고 변태는 많았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엉덩이나 가슴께를 스치는 미심쩍은 손들이 적지 않았다. 대놓고 허벅지나 등에 몸을 딱 붙이고 부비대는 미친놈들도 있었다.
학교라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굳이 팔뚝 안쪽으로 손을 넣어 부드러운 살을 꼬집고, 다 큰 아이들의 엉덩이를 두드리거나 브래지어 끈이 지나는 등 가운데를 쓰다듬는 남자 교사가 꼭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의 상황은 정말 심각했다. 옷차림이나 근무 태도를 핑계로, 알바비를 담보로 접근해 오는 업주들, 돈을 내면서 상품과 함께 어린 여자를 희롱할 권리도 샀다고 착각하는 손님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갔다.
⟪출처⟫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민음사, 2016. 63~65p 중 일부
마지막으로 가장 끝자리에 말없이 앉아 고개만 끄덕이던 중년의 남자 이사가 물었다.
“여러분이 거래처 미팅을 나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래처 상사가 자꾸 좀, 그런, 신체 접촉을 하는 겁니다. 괜히 어깨도 주물주물하고, 허벅지도 슬쩍슬쩍 만지고, 엉? 그런 거? 알죠?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지영 씨부터."
김지영 씨는 바보같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도 안 될 것 같고, 너무 정색하는 것도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할 것 같아 그 중간 정도로 답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자료를 가지고 오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며칠 후 김지영 씨는 면접 전형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혹시 마지막 대답 때문이었을까. 김지영 씨는 왠지 기운이 쪽 빠졌다. 어차피 떨어질 텐데 하고 싶은 말이나 다 하고 나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개자식은 손모가지를 부러뜨려 놔야지! 그리고 당신도 문제야! 면접이랍시고 그딴 질문하는 것도 성희롱이라고! 남자 지원자한테는 이런 질문 안 할 거 아냐?"
혼자 거울을 보며 큰 소리로 하고 싶던 말들을 다 쏟아 냈지만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다. 자다가도 억울하고 열이 올라서 이불을 몇 번이나 걷어찼다. 그 이후에도 숱하게 면접을 보았고, 종종 외모에 대한 지적이나 옷차림에 대한 저속한 농담을 들었고, 특정 신체 부위를 향한 음흉한 시선,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겪기도 했다.
⟪출처⟫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민음사, 2016. 101~103p 중 일부
소설의 이 대목들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이 불편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꺼내 들어야 할지 여전히 고민입니다. 그러나 불편한 사실을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8화에서 이야기했듯, 누군가의 고통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고통이 될 수 있으니까요. 지금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침묵한다면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변화의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불편함을 꾹 눌러 담고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성추행이라고 말하는 것의 법적용어는 강제추행입니다. 강제추행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추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소설의 어느 대목도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여기서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가 있는 이상 그 힘의 대소강약을 불문한다는 것이 법원의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버스나 지하철, 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은 모두 강제추행에 해당할 수 있겠지요. 더욱이, 대중교통에서의 행위는 지금이라면 「성폭력처벌법」의 ‘공중 밀집 장소에서의 추행’에 해당하게 됩니다.
소설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소에서의 불미스러운 행위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만약에 업주들이 위계나 위력으로 추행을 하였다면 「성폭력처벌법」의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이 적용됩니다. 김지영 씨가 고등학교 때에는 없었던 내용이지만, 현재 사업주들은 근로자가 고객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할 경우 근무장소 변경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법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법전에 기재되기 전이라도 사업주에게 당연히 기대되는 행위일 것으로 보이는데, 근로자를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본인이 추태를 부린다면 어린 영혼들이 믿고 의지할 어른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씁쓸해집니다.
대중교통, 학교, 아르바이트 장소 등등 어린 여자아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곳들이 가득 묘사된 소설을 보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떠올랐습니다. 중학교 1학년, 그때 대부분의 여학생 교복은 치마였습니다. 길이는 무릎을 덮는 정도.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에 가까운 남자 영어 선생님은 여자아이들을 체벌할 때는 꼭 교탁 앞으로 부르곤 하였습니다. 교복을 입었을 때 드러나는 종아리는 매질의 흔적이 남으니 교복이 덮어줘서 보이지 않는 허벅지를 때린다는 명목으로 교탁 뒤에 서서 치마를 허벅지까지 들게 하였죠. 어린 나이, 선생님의 훈육 방식을 대놓고 항의하지는 못하였지만 우리들끼리는 “변태”라면서 쑥덕거렸더랬죠. 거의 30여 년 전의 일인데도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팍 안 좋아지네요. 소설의 이야기가 어느 특수한 학교에서 발생한 유별난 상황은 아니었겠지요.
면접장에서의 상황은 어떠한가요? 김지영 씨는 면접장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혹시나 그 대답이 당락에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운 마음에 벙어리 냉가슴 앓았겠지요. 면접 탈락 소식을 듣자 그제야 마음에 품었던 말을 쏟아냅니다. 김지영 씨는 이를 ‘성희롱’이라고 하는데요. 그 질문 자체가 법적으로 성희롱에 해당할까요?
김지영 씨가 면접을 본 시기는 대학교 4학년이던 2004년으로 보입니다. 김지영 씨는 식품회사에 입사하고 싶어 했으므로 입사지원서를 제출한 곳이 국가기관이 아닌 사기업으로 추정되니까, 「남녀고용평등법」이 적용됩니다. 이 법은 직장 내 성희롱을, ‘사업주ㆍ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근로조건 및 고용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김지영 씨는 아직 취업을 하지 않은 구직자이므로 ‘직장 내 성희롱’이 적용되지 않을까요? 현재의 「남녀고용평등법」은 근로자는 범위에 ‘취업할 의사를 가진 자’를 포함하고 있어 면접에서 겪는 성희롱도 규율범위에 포섭하고 있으나, 이는 2006년 이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김지영 씨가 겪은 사례는 「남녀고용평등법」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만(「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금지하는 차별행위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낼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구직자도 대상에 해당된다는 전제로 면접관의 발언이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면접관의 질문 자체는 명백한 성차별적 행위입니다. 김지영 씨는 면접관이 여성 구직자에게만 해당 질문을 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지만, 대상자를 달리했다는 것 이전에 질문 그 자체가 「남녀고용평등법」에서 금지하는 차별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희롱에 해당하려면 해당 발언이 성적 언동으로써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이 느껴지는 것이라고 일반인의 관점에서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질문을 해서 뭇매를 맞은 일부 기업들은 위기관리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일 뿐 성적인 의도는 없다고 뻔뻔스럽게 변명하기도 합니다만, 어떤가요? 제가 보기에는 김지영 씨가 받은 질문은,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어 성적 굴욕감을 유발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입니다. 설사, 성적 언동이라고 볼 수 없을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인식은 언제든지 성희롱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발언 그 자체가 문제 됩니다.
2014년에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이 운영하는 채용정보 사이트 ‘워크넷’에 성희롱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한 면접요령이 아래와 같이 실려 있었습니다.
최근 성희롱 관련 재판도 많고, 지나치게 예민한 여성 사원에게 곤란을 당한 회사도 있다. 도량을 넘어서 독자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이 좋다
☞ 대답 : 기본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에 대한 가벼운 말 정도라면 신경 쓰지 않겠고, 농담으로 잘 받아칠 정도의 여유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 너무 지나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상대방에게 완곡하게 대화하여 제 생각을 표현하겠습니다.
답변이 가관이지요. 직장 내 성희롱을 근절해야 할 고용노동부의 공식 입장이 위와 같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위 답변은 크게 논란이 되어 금방 삭제되었지만, 빠르게 삭제된 만큼 인식이 변하였을지는 의문입니다. 2018년 인터크루의 설문조사 결과 면접 구직자들은 성범죄 피해를 당하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여전히 받고 있었고(경향신문, 2018. 3. 20), 심지어는 경찰 면접에서도 해당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지영 씨는 어렵게 취직을 합니다. 취직 후 거래처와의 회식자리에서 벌어진 일 또한 고개가 가로저어지는데, 다음 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그 문장이 내게 말을 걸었다, 조용히.
그래서 써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