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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현 Nov 13. 2024

놀이터 엄마들


놀이터에 가면 가끔 주눅이 든다.

젊고 예쁜 엄마들..

잘 정돈된 손톱, 예쁜 네일아트..

예쁜 피부, 길게 올린 속눈썹..

비교가 안 되는 젊음에 혼자 주눅이 들어

부러운 눈빛으로 마냥 응시한다.


처음엔..

어쩜 애기 엄마가 저렇게 예쁠 수 있을까?

애 키우면서 안 힘드나?

와~~~ 내가 너무 게으른가?

젊을 때 결혼해서 그런가?

늦은 결혼에 노산한 나는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든다.

그래서 옛말에 애는 일찍 낳아야 좋다는 건가?

저 아빠는 좋겠다..

그래.. 남편들의 행복도에

와이프 외모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데..

그래. 맞아. 여자는 꾸며야 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일찍 결혼할 걸 이란 생각에

그간의 내 삶이 스쳐가곤 한다.

나도 나를 좀 가꿔야지.. 하며..

그렇게 반성의 시간을 좀 갖다 보면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어도

아이들 노는 것, 우는 것, 싸우는 것 등이

모두 한눈에 보인다.

저 아이가 왜 우는지, 왜 혼자 있는지 등..


내가 세상을 공부한 건

바로 이 놀이터 안에서

그 예쁜 엄마들의 행동들이었다.




놀이터는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는 곳이며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마음을 펼치고

놀이를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이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이를 혼내는 엄마의 스타일들을

분류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아이들 다툼이 일어났을 때

제각기 다른 대처들을 보고 현재의 엄마들이

많은 혼돈스러움을 느끼는구나를 알 수 있었다.


TV에서는 많은 육아 전문가들이 이야기한다.

아이를 이렇게 해줘라, 저렇게 대해줘라.

아마 이걸 본 엄마들 중에 지나친 팔로워들은

엄마의 줏대는 없고 아이의 존중만이 남는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성장하는 과정의 아이가

제대로 된 판단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아이의 뜻을 들어주고 존중해 주는 일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엄마가 아이의 말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줄 때

아이는 어떤 느낌일까?

아마도 아이는 최고의 안정감을 느낄 것이다.

어느 동화에 나오더라..

아이가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은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야!’

엄마는 아이에게 이런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 엄마와 아이가 대립 후에

아이말을 따라준다면 이때에도 안정감을 느낄까?

‘그것 봐! 내 말이 맞잖아.

내가 엄마를 이겼어. ’

아이들이 이렇게 말을 하지는 않지만

얼굴로 표정으로 목소리 톤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런 사고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1차원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이런 본능적인 사고가 자연스럽게 가능한 것이다.


보통 이런 아이들의 특징은

엄마를 이용할 줄 안다.

자신의 투정을 엄마가 못 견딘다는 걸 아는 순간

아이는 이걸 자기도 모르게

습관 영역에 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엄마는 엉덩이가 가벼운 엄마이다.

놀이터 안에서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으며

많은 눈들이 보고 있기에

대부분 아주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 아이만 보이고

내 아이의 소리 데시벨은 높게 들리는 게

바로 엄마이다.

아이가 무슨 일이 일어나가도 전에,

‘이~잉!’ 소리 나기 전에 ‘ㅇ’ 소리만 나면

앉아있다가도 달려 나가는 엄마들이 있다.


내 소중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조금이라도

생긴 것 같으면 바로 가서 해결하는

부지런한 엄마라 하겠다.

달려가자마자 묻는 대부분의 시작은 ’왜?‘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말이든 몸이든 울음이든 답을 한다.

이 광경을 처음 본 상황에서는 몰랐다.

이것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느껴졌다.

’아~ 이 아이들은 학습됐구나.. 습관이구나..‘


이런 것이 학습된 아이들의 특징이 있다.

첫 번째. 용모가 깔끔하다.

두 번째. 자기중심적이다.

세 번째. 기다릴 줄 모른다.


위 특징을 가진 아이 엄마들의 특징도 있다.

남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내가. 혹은 내 아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주목적에 있다. 아마 자신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초점이 ‘남들 시선’에 있다.


우리는 어쩌면 내가 받은 학대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난 어릴 때 엄마가 손발톱도 잘 안 깎아주고

옷도 잘 안 사줘서..

여러 번 졸라야 겨우겨우 사줬는데..

정말 장난감이 갖고 싶었는데..

난 허구한 날 방치됐었는데..

그래서 내 아이에게는 필요한 즉시 아니 어쩌면

필요함을 느끼기도 전에 준비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깔끔한 엄마들은 어릴 적 지저분하고

다소 더러운 환경이 너무 싫었을 것이며,

깔끔한 외모를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인정 욕구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로 인해,

내 아이는 마음을 풀어놓고 마음껏 즐겨보는

경험은 제한이 있었을 것이며,

부족함이나 불편함을 느껴보는 경험을

못 해 본 것이다.

(이것을 자부심으로 갖는 엄마들도 있더라.. )


부족함.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아~ 갖고 싶다. 씻고 싶다. 하고 싶다. ’라는

욕망을 갖게 하고 동기유발을 시킨다.


이것이 학습으로 연결되면 어떨까?

이 부족함은 학습에서 그렇게 목놓아 외치는

‘자기주도학습’에서의 ‘동기’가 된다.

자기 스스로를 조절하는 능력은 동기에서 나오기에

그 많은 전문가들이 동기유발에 집중하는 것이다.


불편함.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

불편함은 순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에

참는 연습이며 기다림을 학습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모든 발전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진화된 것이며, 불편함을 경험해 보아야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긴다.


이것이 학습하고 연결되면..?

그렇다.

초, 중, 고등의 긴 학습과정을 견디는 힘이

되는 것이다.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하고,  

하기 싫은 것도 하고 견디는

그 의지의 초석이 될 것이다.


어떤가?

이렇게 좋은 장점이 많음에도

내 아이의 불편을 바로바로 해결해 주고 싶은지.  

그래도 어릴 적 내 부모가 나를 방관했던

모든 순간들이 원망스러운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람은 놀이 따로, 학습 따로,

이렇게 따로따로 분리되어 발달하지 않는다.

우리의 뇌가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지 못하듯 말이다. (눈을 감고 손을 올려 손안에 레몬이 있다고 상상하라~ 그리고 그것을 먹었다고 상상하라~ 상상만으로도 침이 나올 것이다. 눈을 떠보면, 실제 레몬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

그래서 놀이와 학습은 별개가 될 수 없다.


가끔 놀이터에서 아이를 밀착으로 따라다니느라

힘든 엄마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본인이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엄마들은

오히려 아이에게 일정거리 떨어져 앉아 지켜보는

엄마들의 잘못을 얘기할지도 모른다.

(또.. 안타깝게도.. 이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성격상 그걸 못 보겠다는 엄마들도 있다. )


그러나 분명한 건,

깔끔한 외모와 남들에게 보여주기식의 혼내기 등.

이런 건 몇 초의 만족에 불과하다.

집에 돌아가면 허무함만이 남을 것이고

생활은 또다시 반복이 되어

결국 그것은 우리 아이의 습관으로 남을 것이다.


엄마의 철학이나 관념은

아이의 세계 아니 우주가 될 터이니,  

나의 정신을 가다듬어보자.

소중한 ‘나의 뿌리’를 굳건히 하자.

내가 바로서야 우리 아이가 바로 설 테니.

그래야

내 아이가 스스로 가지치기를 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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