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조리원의 세계
첫 번째는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혹은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아이 위주로 친구를 사귀며
비슷한 사람끼리 무리 지어 다닌다.
그러다 두 번째는 아이가 대학을 어디에 갔느냐에 따라 친구가 혹은 주변이 또 바뀐다는 것이다.
특히나 아이가 좋은 대학에 진학할수록
바뀔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노년에는 사는 정도와 건강에 따라 친구가 바뀐다는 것이다.
건강하여 두 다리로 걸어서 같이 다닐 수 있는지와 경제적 여유가 되는지에 따라 친구가 바뀐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태어나 유치원을 다니고
초, 중, 고, 대학교에서 학연으로 인한 친구와
사회생활 혹은 커뮤니티를 통한 지연으로
친구를 사귀게 된다.
그렇게 사귄 친구들이 평생을 가는 경우도 있고
함께 보낸 시간에 온 마음을 다한 경우에도
한 순간에 이별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험들로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우정에 대한 정의를 다시 재정립하는 경우들이 많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상처받듯 우정에서 받은 상처 역시 작다고 할 수 없다.
누군가는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는 경우도 있으니까.
재밌는 사실은
우리는 친구 관계 즉 사람 관계를 통해
배우고 성장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을 다치는 경우에는
더 큰 깨달음이나 교훈을 얻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한다.
‘난 평범한데..’
누구나 자신의 주변 친구들은 평범하다고,
혹은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 주변 내가 보는 환경이 전부일테니
그것이 자신만의 평균인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필자 역시 난 평범하고
대부분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4가지의 혈액형, 8가지의 MBTI로 나뉘는 것이 아니었다.
5천만 인구가 있다면 아마 5천만 가지의 생각이 존재하리라~
필자는 이것을 아이를 키우며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알았다.
엄마가 되면서..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다.
엄마가 된 사람도, 엄마가 될 사람도,
엄마가 되지 못하거나 안 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엄마가 있고.. 있었다.
엄마!
엄마라는 존재.
엄마의 마음이 시작되는 곳
그곳은 어디일까?
아마 아이를 낳고 처음 접하는 커뮤니티.
이름하여 산후조리원.
아이를 낳고
여자에게 엄마라는 이름이 처음 불리워지는 곳.
요즘 같은 세상에는
등급이라 여기는 이들도
계층이라 여기는 이들도
또는 분류라 여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여기는 단지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낳아본 여자들이
몸을 추스르는 곳이다.
많은 엄마들이 이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며
첫 마음의 싹을 틔운다.
그러나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이곳에서의 싹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곳의 많은 엄마들은 같은 일을 달성하여
같은 곳에 왔지만
목적만큼은 제각기 다르다.
비싼 산후조리원의 금액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고가의 산후조리원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풍족한 경우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룹핑이 잘되고
그 모임 또한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고
얘기하는 엄마들도 있다.
이름하여 조리원 동기.
‘조동 모임’을 갖기 위해
입소하였다고 말하는 이도 보았다.
물론 경제적으로 풍족한 경우에도
가치에 따라 조리원의 비용을 아끼려고
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여럿 보았다.
그럼 산후조리원에 입성하는 순간
가장 큰 이슈는 뭘까?
바로 모유수유이다.
모유수유에 정답이 있을까?
당연히 없다.
모유수유가 정서발달에도 건강에도 좋다지만
분유를 먹고 자란 아이의 건강과 정서발달이
더 훌륭한 경우들도 많으니
이건 의미 없는 고민이며
상황에 맞게 의지대로 하면
그것이 정답인 것이다.
분명한 건,
모유수유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엄마들의 조리원 생활의 질이 달라진다.
모유를 직접 수유하면
엄마들은 두세 시간에 한 번씩 가서 젖을 물리고
돌아와 쉬거나 식사를 하고
또 가서 젖을 물리고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분유를 먹이는 경우는 다르다.
엄마는 마사지로 부은 몸과 마음을 챙길 수 있으며
여가시간에 온전한 쉼을 선물 받을 수 있다.
이 경우는 엄마의 성향에 따라
휴식을 즐기는 엄마들과
무료함을 사교성으로 드러내는 엄마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식사시간이 되면 엄마들의 눈치는 바빠진다.
아니 본능적으로 작동한다.
혹자는 무슨 대단한 정보를 얻을 기세로
염탐을 시작하는 엄마들,
삼삼오오 모이면 끝없이 시작되는 수다들,
처음 듣는 정보에 놀라며 궁금해하는 엄마들..
이런 광경들은 산후조리원이 또 다른 커뮤니티라는
반증일 것이다.
엄마들끼리 모이면
가장 큰 화두의 시작은 ‘요즘은..‘으로 시작했으며
‘카더라’의 희소성 있는 부류들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 시절 이러한 얘기만큼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얘기는 없으리라~
그러나 열을 내고, 동조하고,
집중하고, 돌아오고 나면
바로 헛헛함이라는 게 찾아온다.
헛헛함.
이것의 정체를 이때는 감히 알지 못한다.
헛헛함은 아이의 초등시절까지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초등학생이면
엄마도 엄마나이 초등학생인 것이다.
실제 나이에 상관없이.
지나고 보니 산후조리원의 시간
내 아이를 이렇게 키워야지 저렇게 키워야지..
혹은 ‘나는!’, ‘나는 꼭!’, ‘나는 다를 거야!’를 다짐하며
그 마음을 견고히 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산후조리원에서 엄마들이 빠지는 생각구멍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친정엄마.
나를 학대한 엄마 혹은 고마운 엄마, 보고 싶은 엄마,
증오하는 엄마, 불편한 엄마, 보고 싶지 않은 엄마..
그 마음들이 풀려지지 않은 채,
덮어진 채로 생각한다.
난 엄마처럼 키우지 않을 거야.
이런 마음을 막연한 무의식에서 가져볼 것이다.
그리고 표정으로 드러낸다.
바로 옆에 엄마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난 당신보다, 그 누구보다 잘 키울 거야 ‘라는
다짐의 눈빛과 양끝 입꼬리의 단단함을 볼 수 있다.
나의 분신이라 생각하는 내 아이를 보며
반드시 훌륭히 키워내리라고 다짐하는 그러한 시간들이었으리라..
언제나 마음과 이론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엄마나이 시절에..
그럼
당시 갓난 아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단지 먹고 싸는 것만 할 줄 아는
그 갓 난 아이들은 배고프면 우는 수밖에 없다.
본능적으로 울었을 것이며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내가 울면 먹을 것을 바로 주는구나.
내가 울면 기저귀를 바로 갈아주는구나.
만족지연능력의 첫 단계였으리라.
만족지연이란 자기 통제의 하위영역 중 하나이며, 더 큰 결과를 위하여 즉각적인 즐거움, 보상, 욕구를 자발적으로 억제하고 통제하면서 욕구충족의 지연에 따른 좌절감을 인내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는 성장하고 공부하며 사회에 나아가서도
결과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회 및 교육 분야에서도 중요한 연구 분야로
다루고 있으며 성장과정에 꼭 길러야 하는
능력으로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기도 하다.
말만 하면 이루어지는 물질만능주의를 사는
현시대의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욱 더
필요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만족지연능력은 생후부터 발달한다고 했던가.
이걸 모르는 엄마들은,
더욱이 엄마가 처음인 엄마들은
아이가 우는 것을 죄악시하며
참기 힘들었을 시기일텐데 말이다.
조리원마다의 분위기도 다르겠지만
아이가 울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 마냥
엄마들을 바로 달려오게 만든다.
무의식이 조성된다는 이 시기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마음을 준 것일까?
[만족지연능력을 언제부터 길러줘야 좋을까?의
길라잡이는 다음편인 문화센터 입성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