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처음 가는 곳이 어디일까?
빙고!
맞다. 바로 문화센터이다.
막 100일 넘었을 때를 시작으로
유치원 입학 전까지
아이의 신체발달을 목적으로 다닌다.
그럼 신체발달은 학습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엄마들은 산후조리 중에도,
바깥에서 모유수유나 분유를 타서 먹여야 하는
여러 가지 난제에도 불구하고
유모차에 짐을 한가득 싣고 나와서
앉아있는 것일까?
문화센터를 한 번이라도 가본 엄마들이
아래의 말을 들으면,
아마 바로 이해할 것이다.
‘저 아이 낳고 첫 외출이에요’
자~ 이제 어떻게 들리시는가?
‘저 초보엄마라 잘 몰라요.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아이랑 외출할 겸 신청했어요.’
그렇다.
문화센터는 여자로 살다가
엄마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엄마들의 첫 모임인 것이다.
이름하여 ‘문화센터동기.‘(문센동기)
조리원 동기 모임이 잘 형성되지 않은 엄마라면
아마 더욱 그럴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의 자식 사랑이 본능이지만,
유독 출산 직후부터 돌 때까지 내 아이 존재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가 아니라,
누가 내 아이 손 끝 하나 다치게 한다면
아마 온갖 흉한 꼴은 다 볼 수 있는 시기라 하겠다.
이건 모성애와 초심에서 나올 수 있는
마음의 합이라 더 거대하지 않을까?
수업시간.
낯선 분위기 속 문화센터 강사의 가르침에 따라
내 아이를 매만지며 눈 맞춰가며
각자 강좌명에 맞는 놀이를 시작한다.
’어머~ 저 엄마는 정말 잘 놀아준다.‘ ,
‘어머~ 저 엄마는 애기도 엄마도 잘 웃는다.’ 등..
놀이가 시작되면 당연히 내 아이를 보지만
엄마의 눈치들은 벌써 클래스 안의 아이들 스캔이 끝난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잠깐의 모유수유 타임이나
쉬는 시간에 각 아이들의 물건들 및 용품들.
그 역시 어디 브랜드 것 인지도 스캔이 끝난 상태일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스캔의 능력이 똑같지가 않아
유독 뛰어난 엄마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등의 수업을 하게 되면
강사가 같이 쓸 물건을 풀어놓는다.
그럼 엄마들은 좋은 걸로 쏜살같이 챙겨서
아이에게 가져다준다.
그리고 엄마 선호도에 의한 것들로 앞을 채워준다.
그러나 그 반대의 엄마들도 있다.
가만히 기다려주며 아이가 선택하게 하고
아이가 직접 가지고 오게 하는 엄마들도 있다.
물론 웬만한 것들은 잽싸게 가져갔기 때문에
몇 개 안 남은 상태 안 좋은 것들 중에서
아이들이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이때 중요한 건
물건이 예쁘고 안 예쁘고가 아니다.
이때 배울 수 있는 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선택하고 가져오는 연습을 하는 건 아닐까?
엄마가 모든 걸 챙겨다 주는 아이를 생각해 보자.
그 아이는 엄마가 준 것으로만 노는 것이다.
그 아이는 엄마의 취향으로 노는 것이다.
그 아이는 선택의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리고 배웠을 것이다.
내가 무얼 하지 않아도 엄마가 해 줄 거라는 사실을.
어쩌면 문화센터의 수업들은
스스로 무언가 해 보는 생애 첫 훈련인 것이다.
스스로 해서 얻는 만족과 그냥 얻어지는 만족.
이 둘 중 어느 쪽의 만족감이 클까?
물론 성인이 된 필자 역시 후자 쪽이 편하고 좋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가 할꺼야! 내가!‘라고
외치는 경우를 많이 봤을 것이다.
한 번은
필자의 딸아이가
그것도 고작 3살이 넘은 딸아이가
신발장에서 본인이 신발을 신겠다며
신발 신는데 20분이나 걸린 적이 있다.
당시 몸이 아프기도 했거니와
딸아이와 맞서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 하는지
그냥 가만히 지켜만 봐줬다.
속이 터지지만 인내라는 걸 해봤다.
그리고..
드디어 마치고 일어나는데..
신발장 거울로 딸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뭐가 그렇게 만족스럽고 좋은지.. 심지어 자신감까지 차 보였다.
엄마를 20분 넘게 세워놓고
그렇게 만족스러운 입꼬리와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딸아이를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어린이집 버스는 떠났으며
아이를 직접 등원시켜줘야 하기에
나의 브런치 약속은 날아갔으며
아침부터 체력이 바닥났기에..
이날의 딸아이 표정을 기억한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만족지연능력을 TV에서 보게 되는데,
방망이로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만족지연 능력은
생애 초기부터 발달이 시작되어
만 2~3세에 크게 발달하고,
5세가 되면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11~12세가 되면 복잡한 지연의 원칙을 이해하며
청년기까지 크게 변화하지 않고 지속된다.
몇 해 전, EBS에서 마시멜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 무방비로 책상 앞에 마시멜로를 두고
이걸 먹어도 되지만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15분간 참으면 마시멜로 사탕을 10개는 더
준다는 식의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실험에서 더 큰 만족을 위해
당장의 유혹을 참은 아이들은
불과 10% 정도에 불과했다.
그 달콤함의 유혹을 참고
만족을 최대로 느낀 아이는 뭐가 달랐을까?
실제 아이 엄마와의 인터뷰는 충격이었다.
너무 대수롭지 않아서 충격이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약속을 잘 지켜주었으며
뭐든 아이가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
전부라고 하였다.
내 아이만큼은 꼭 갖게 해주고 싶은 이 능력에는
엄마의 안정감, 믿음, 기다림이 필요했으며
당장의 상황을 기피하려는 눈속임이나
사탕발림을 지양한 것이다.
이 만족지연능력은 실제 우리 아이들의
길고 긴 학업에도 영향을 미치며
대입, 취업,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심지어 결혼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중요한 능력은
그 어느 대단한 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엄마들의 ‘작은 노력의 일관됨’이었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만족을
아이 스스로 해보게 하는 일이 어려운 일일까?
육아를 해봤다면..
국민문짝이라고 들어봤을 것이다.
아이들을 자극시키는 것들을 모아놓은 집합체이다.
국민문짝은 아이들이 만지면 튀어나오는 것,
누르면 돌아가는 것, 소리 나는 것 등이
다양하게 섞여있다.
잘 생각해 보시라~
내 아이가 문 열면 소리 나는 것에 집중되어 있을 때,
윗부분에 소리 나는 것이나
누르면 튀어나오는 것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ㅇㅇ야! 이거 봐라~‘하고
아이의 놀이 흐름을 중단한 적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시라~
내 아이가 놀이를 통한 뇌발달 시간에
내 아이의 집중을 깨서
내가! 아이를 산만하게 만든 건 아닌지.
‘이거 봐봐~ oo아! 우와~ 이것도 봐봐~!’
그 소리가 안쓰럽게 들린다.
아이가 다른 것에 집중을 잘하고 있는데
아이의 집중을 깨는 소리.
아이를 정신없이, 한꺼번에 이거 저거 다 가르쳐주고 싶은 엄마의 절규로 들린다.
그러고서 하는 그 엄마의 말은
‘얘는 집중력은 없는 것 같아요’이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아이가 다 크기도 전에
이런 말을 하는 엄마들을 자주 보았다.
어린아이의 집중력은
발달상으로도 성인보다 짧다.
성인이 20~25분이라고 한다면
아이의 집중력은 10~15분 정도일 것이다.
그 시간을 적절히 이어나가는 노력은
후천적으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10~15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을 온전히 스스로 집중을 하는 동안에
아이의 뇌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스로 몰입할 때 효능감은 아마 최고조일 것이다.
지금 그 현란한 놀이들을 다 알 필요가 전혀 없다.
무턱대고 덮어놓고 다 알려주고 싶은 그 마음은
아이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 생각해 봐야 한다.
육아에 있어서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것은 없다.
무엇이든 우리 아이가 사랑으로 느꼈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엄마가 아이를 앉아줄 때
안정된 심박수를 느꼈을지..
불안한 심박수를 느꼈을지..
이 시절 아이들은 아마 알았을 것이다.
말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편안한 포옹과 불안한 포옹을..
아이들은 귀신같이 안다.
자신을 예뻐하는 사람과
자신을 예뻐하는 척하는 사람을.
이 글을 읽는 이들 중 아마 절반쯤은..
‘우리 엄마도 날 믿어주지 않고 면박만 줘서
나도 만족지연능력이 없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키워주냐고?’
아마 이렇게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
‘기다림이란 게 이렇게 중요한 능력이었는지
이제와 알았는데 어떡하냐고?’
괜찮다.
우리는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아마 내 아이도 훗날 느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그 감정처럼.
[오늘은 만족에 대한 자율성을 느끼셨다면..
다음화는 기다림의 필요성을 느껴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