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의 밤을 너무 뻑적지근하게 즐긴 걸까. 일어나자 배가 살살 아팠다. 다행히 조식 메뉴에 흰 죽이 있어 죽 한 술을 뜨고 후에역으로 갔다. 기차에서 별 탈이 없기를 바라며 다낭행 열차에 올랐다.
남편과 내 좌석은 앞뒤로 떨어져 있었고, 어제 일일투어 때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다낭 현지인이 또 옆자리였다. 세상이 좁은 것인지, 한번 지나칠 인연은 아니었던 것인지. 같은 열차, 같은 칸, 그것도 바로 옆자리에 또 나란히 앉았다. 우연치고는 영화 같은 만남에 서로 웃었다.
기차 안은 1970년대 영화 장면 같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가죽 시트, 선반에 바리바리 쌓인 짐들, 덜컹거리는 창문, 창밖으로 스치는 기찻길 옆 허름한 집들까지.
스낵, 음료수 등을 싣고 통로를 오가는 카트는 홍익회에서 귤이나 계란을 사 먹던 옛날 기차여행의 추억을 소환했다. 점심 무렵이 되자 밥과 국을 큰 통에 싣고 다니는 이동 밥차도 오갔다.
구불구불한 산허리를 돌다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해안선을 지나며, 다낭에 도착했다. 여전히 뱃속은 불편했지만 별일 없이 왔다. 집만 한 곳이 없다는 말은 잠깐 외유한 여행지에서도 해당되는 말이다. 호이안과 후에에서 4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다낭의 숙소가 집처럼 편안했다.
반갑게 맞아주는 호텔 직원들도 가족 같았다. 호텔 입구엔 못 보던 붉은 꽃 장식이 생겼다. 우리를 환영하는 꽃다발은 아니겠지만 노랗고 빨간 꽃들이 마치 웰컴 플라워 같아 일단 기분 좋았다.
음력 새해를 위한 장식이라고 직원이 알려주었다. 베트남에서도 설날은 최대의 축제 기간이다. 노랗고 빨간 꽃은 새해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깊은 의미가 있다.
노란색은 부를 상징하는 금을 뜻하고, 빨강은 행운과 악귀를 막아주는 색이다. 세뱃돈을 주는 문화도 우리와 비슷하지만 빨간 봉투에 넣어준다.
내내 속이 불편해서 쉬다가 미케 비치로 바닷바람을 쐬러 나갔다. 호텔에 있는 붉고 노란 꽃들이 곳곳에 보이고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렇구나. 설날이 오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잠시 잊고 지냈던 날들이었다. 집 생각이 났다. 집에 돌아갈 날이 가까지고 있다.
무심히 해변을 걷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다낭에서 첫 한 달 살이를 하고 있다는 부부는 한국 사람이 고픈 것처럼 반가워했다. 우리 부부보다 10살쯤 더 보였다. 바닷가 우엉탄 아파트에 머물고 있다며 초면에 초대를 했다.
온통 한국인이지만 막상 말 붙일 또래의 상대가 없었던지 간절하게 청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낯선 도시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럼없이 대화가 이어지고 인생 한 조각을 나누는 일은 여행이 주는 마법이자 매력이다.
머리가 하얀 두 남자는 미케 비치가 내려다보이는 베란다에서 한 잔 술에 기대어 각자 걸어온 길 위의 풍경들을 꺼내 놓았다. 밤바다의 바람과 파도는 마치 그들이 건너온 거친 세월처럼 멈추지 않고 출렁였다.
속이 안 좋은 나를 위해서 부인은 누룽지까지 끓여 주었다. 부드럽고 구수한 누룽지 한 그릇에 속도 마음도 따뜻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사람에 치여 떠나온 여행에서 때론 사람으로 인해 위로받는다. 모르는 이들이 건네는 다정함이 뜻밖의 감사한 선물이 되고.
내일이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길로 가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