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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Jan 20. 2022

8.   한강 / 작별하지 않는다.

<사랑에 대한 소설>





한강 같은 작가가 있기에 작가라는 직업에 경외함을 갖게 된다.  진정한 작가란 작품을 통해서만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손가락이나 검은 나무, 눈 새를 상징적 의미로 표현하였다.  경하, 인선, 정심은 모두 통증을 가지고  있다.   경하는 계속되는 위궤양과 편두통에 시달리고 사는 것이 힘들다.   


수면의 질이 차츰 더 나빠지고 호흡이 짧아지던- 왜 숨을 그렇게 쉬는 거야.라고 아이가 불평했다.

오랫동안 깊은 잠을 자지 못했으며 악몽과 생시가 불분명하게 뒤섞인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에게 믿기지 않는 장면이 포착될 때, 아마도 그의 첫 번째 반응은 자신에 대한 의심일 것이다.  내가 정말 저것을 보고 있는가?  이 순간은 악몽의 일부가 아닌가?  나의 감각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전히 깊이 잠들지 못한다.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  여전히 숨을 짧게 쉰다.  나를 떠난 사람들이 못 견뎌했던 방식으로 살고 있다.  아직도.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쓴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모두에게 보내는 작별편지를.(45p)     


인선은 손가락이 잘렸다.  괴사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24시간 삼주내내 상처에 신경이 죽지 않도록 바늘을 찔러 넣는 동작을 해야 한다.  손가락에 대한 상징적 의미는 인선의 통증에 대한 고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것. 인선은 경하에게 이야기한다.  엄마의 어두운 슬픔과 고통이 전염되어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고.   정심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며 50여 년 동안 통증과 괴로움에 시달린다.

학살 이후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한 생존자의 고통과 투쟁의 삶이었다.    

 


만 열일곱 살 아이가, 얼마나 자신이 밉고 세상이 싫었으면 저렇게 조그만 사람을 미워했을까?  실톱을 깔고 잔다고.  악몽을 꾸며 이를 갈고 눈물을 흘린다고, 음성이 작고 어깨가 공처럼 굽었다고.(p82)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 이상 내 방으로 기어 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 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314p)     



작가는 이러한 통증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역사적 사건의 상처와 통증을 겪은 이들의 아픈 기억과 통증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셋은 분리되었으면서 하나인듯하다.  그것은 한강 작가의 눈으로 시를 쓰듯 상징적 '눈'으로 표현된다.  검은 나무에 눈이 내리는 꿈을 꾸는데, 검은 나무는 4.3 사건의 희생자들의 모습 같다. 눈은 검은 나무를 덮지만 검은 나무를 다 덮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기억하자. 눈이 온 다음 다시금 눈은 녹아 실체를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또 다른 아픔을 다시 잊지 말고 다시 시작하자는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44p)

이상하지, 눈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인선이 말했다.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55p)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87p)     


그러나 이들은 모두 포기하지 않는다.  경하는 인선의 부탁으로 앵무새를 살리기 위해 제주를 향한다.  왜 앵무새일까? 강아지도 고양이도 다른 무엇이 아닌 앵무새.   인선이 혼자 있을 때 소통하고 교감했던 새 여서일까.  아니면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새이기도 하고 인선의 목소리를 흉내 냈을 새이기도 해서일까.  


공간적으로 제주에서 경산에 이르고, 시간적으로 반세기를 넘긴다.  폭력에 훼손되고 공포에 짓눌려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작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딸의 눈과 입을 통해 전해진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들 곁의 소설가 ‘나’는 생사의 경계 혹은 그 너머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는 듯이,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가장 결연한 답변이 여기에 있다. (신형철)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조건은 무엇일까? 어쩌면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작가의 궁극적 물음일지도 모른다.  한강 작가는 말한다. 이것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길 바란다고... 이 말에 이 소설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오늘 눈이 내렸다.  나는 눈이 내린 길을 걸으며 지극한 사랑을 생각하며 눈을 밟았다.   경하와 인선의 통증이 그리고 정심의 눈물이 눈에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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