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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마음 Oct 30. 2022

22년 10월, 할머니는 우주로 돌아갔다.

[ 할머니의 죽음, 손녀의 삶 ]

할머니는 혼돈의 시대를 당당하게 지나온 분이다. 한 몸도 건사하기도 힘들었던 전쟁 시기에 부산으로 피난 오셔서, 건설 현장에서 막일까지 뛰며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뒷바라지하고 집까지 장만하셨다. 노쇠해지는 와중에도 자식 걱정을 살뜰히 하신 강인한 분이시다. 그리고 어젯밤 늦게 친척 카톡방에 할머니의 부고 소식이 올라왔다. 호흡조차 곤란했던 할머니의 고통이 끝났다는 생각에 솔직히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신 걸 잘 알아 슬프지만은 않았다. 다만, 억척스러웠지만 사랑이 충만했던 할머니라는 사람을 이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이상하고 서운한 기분이다. '죽음이란 뭘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산다는 건 뭘까.’하는 허무한 생각이 따라온다. 그리고 50년이든 50일이든, 남은 생은 후회 없게 잘 살아야겠다는 작심도 함께 온다. 밤새 쉴 틈 없이 이어진 난잡한 꿈이 새벽 알람에 끊기자, 나는 단정하게 검은 옷을 차려 입고 집을 나섰다.


[ 다른 세상에 살았던 우리 ]

어릴 때는 할머니가 갑자기 욱하며 소리를 지르고,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고,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만지고, 상한 음식을 못 버리게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를 전쟁을 겪은 기억, 그 트라우마가 할머니의 검소하고 단단한 성품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아마 할머니도 내가 이해되지 않았을 거다. 사지 멀쩡하게 태어나 배 부르고 등 따뜻한 방에 편하게 키웠더니, 우울증이다 조울증이다 하면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던 손녀. 나는 실제로 전쟁을 겪은 할머니와 마음이 전쟁이었던 나를 비교하면서, 누가 더 불행할까 엉뚱한 비교를 해보곤 했다. 어쨌든 32년을 알고 지냈고, 26년 동안 한 집을 공유했던 우리는, 사실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마지막 몇 년 동안 할머니가 치매가 심해져 실체가 없는 분노와 우울 속에 갇혀 있을 동안에도, 나는 그 세계에서 할머니를 꺼내 주지 못하고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할머니가 다음 세상으로 가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영화 [ 코코 ] ‘유쾌한 사후 세계’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10월 30일 아침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할머니가 삼일 정도 망자의 다리를 건너는 상상을 했다. 멕시코에서는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망자의 날’이라는 국가 대명절을 치르기 때문이다. 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코코’는 가수를 꿈꾸는 소년 ‘미겔’이 우연히 ‘사후 세계’로 가서, 죽은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과정을 경쾌하게 그렸다. 고조할아버지가 음악을 하느라 집안을 등졌다고 생각한 가족들은 미겔의 꿈을 반대했지만, 가족들에게 돌아오는 길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고조할아버지의 사연이 뒤늦게 밝혀져, 다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세계관처럼, 나는 우리 육체가 뼛가루가 되어도, 우주의 흙먼지가 되어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헤치는 데 온 힘을 다한 사람의 영혼과, 누군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데 온 정성을 쏟은 사람의 영혼은 빛깔이 다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빛깔과 에너지가 다음 생에 영향을 끼칠 거라고 확신한다. 할머니는 그저 이번 세상과의 인연을 마감하고, 다음 세상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거다. 이번 생에는 너무 고생이 많았기에, 다음 생은 좀 편한 곳에서 태어나라는 조문객들의 기도가 어느 정도 통할 것이다. 할머니의 영혼은 현생에서 이룬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사랑했던 능력만을 가지고 멀리 떠났다. 그거면 나는 충분하다.


[ 장례식장의 불협화음 ]

17년 전 할아버지의 장례 때와 달리, 할머니 장례식에서는 친척들의 갈등을 가까이서 자주 목격했다. 아빠는 행동이 느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허둥댔다. 둘째 삼촌은 합리적인 편이었지만 종종 욱하는 모습을 보였다. 셋째 사업하는 삼촌은 거래처 손님들을 챙기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고모는 친지들이 올 때마다 울컥했고 잠을 못 잔 탓에 예민했다. 완장을 오른쪽에 찰지, 운구를 누가 들지, 육개장을 더 시킬지, 남는 일회용품을 누가 가져갈지. 결정할 사항은 많았고 의견이 너무 달라서 종종 큰 소리가 났다. 사실 할머니는 완장을 어디 차도, 운구를 누가 들어도, 육개장이 모자라도, 일회용품을 안 챙겨도, 노하시지는 않을 텐데. 가족들이 이렇게 화내고 찡그리고 투덜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워하실 것 같다. 다르게 낳은 4남매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힘을 합쳐 살아가는 게 할머니의 유일한 소원이셨을 텐데. “어머니, 사랑합니다.”를 외치며 오열하는 와중에도 화합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가족을 ‘숙제’라고 생각해왔다. 사람이 죽을 때, 생전에 사랑을 자주 표현하지 못한 걸 가장 후회한다는데, 미움을 자주 표현하는 것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일까. 나란히 올려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골함을 보면서, 두 분이 모든 걸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그저 침묵했다.



[ 다시 일상으로, 다시 집안으로 ]

철없던 중학생 때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으로 친척들이 5일 동안 모여 있는 게 꼭 명절 같았다. 사촌 동생들과 놀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즐거워서, 해산하지 말고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를 비롯한 며느리들이 엄청 힘들어했던 기억은 난다. 할머니의 장례식 역시, 애도하는 마음은 컸지만 친척들과 먹고 노는 시간이 즐겁기도 했다. 어른이 된 사촌동생의 커리어 고민, 숙모의 은퇴 계획, 아빠의 림프암 관리, 나의 근황과 취미.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했다. 홀로 사람과 이야기가 소멸된 일상을 보내던 내게는 단비 같은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3일장이 끝나고 우리는, 모두 흩어져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자마자 소화제를 두 개나 먹고 바늘로 손발을 다 딸 정도로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소화가 더딘 배에 핫팩을 붙이고 어깨를 주무르며,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됐다. 아, 뚜비가 간절하게 쳐다보지만 산책 가기에는 몸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한참을 누워있다가 늦저녁이 돼서야, 겨우 일어나 엉망진창인 집안을 둘러봤다. 바쁘다고 미루고 힘들다고 쌓아놓은 ‘집안일’. 그렇다, 1인 가구는 1인이 돌보지 않으면 돌볼 사람이 없다. 인덕션 전용세제를 뿌리고 눌어붙은 오븐장갑을 긁어내고, 건조기에서 제때 꺼내지 못해 망한 빨래를 다시 살균 세탁했다. 뚜비 배변판을 세척하고, 쓰레기를 분리수거했다. '할머니 몫까지 내가 더 잘 살게.' 그 다짐처럼, 먼저 삶의 뿌리인 '집안'부터 다시 살피기 시작한다.


[ 가사노동과 마음공부의 공통점 ]

예전에는 명상원을 찾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방에 혼자 앉아서 벽을 앞에 두고 눈을 감고, 명상을 했었다. 25년 동안 엉킨 마음을 단 며칠 안에 풀어보겠다고, 수능 공부할 때처럼 엉덩이 힘으로 버티며 고생을 했다. 그 과정에서 더 예민해지기도 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마음에 목메기도 했건 것 같다. '빨리 편해지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이 수련을 방해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나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반드시 그런 형태의 수련만이 마음공부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방법으로 형태로 머리가 얼얼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지인의 죽음, 홀로 떠난 여행, 난치병의 회복, 실연이나 실직, 글쓰기와 기도, 산책 중 자신과의 대화, 귀인과 원수, 사랑과 갈등, 종교적인 성찰, 용서와 화해, 정신과 치료, 잊을 수 없는 영화. 정말 힘들게 나를 괴롭히던 마음이 뿌리째 뽑히는 순간에는, 그 못난 마음을 알아채게 해 준 원수에게 감사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나는 삶의 순간과 사람이 주는 마음의 울림, 그 불편함을 꾸준히 힌트로 활용할 것이다. 알아채야 바라보고, 바라봐야 인정하고, 인정해야 내려놓을 테니까. 마음공부와 가사노동의 공통점은 쌓고 미룰수록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 뒷면에는 반대 마음이 있다 ]

삶에 대한 욕망 ‘에로스’와 죽음에 대한 욕망 ‘타나토스’, 두 가지 상반된 본능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인다.

-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 -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3일 동안 나는 속으로, 할머니의 고통 없는 다음 생을 축하했다. 그리고 나의 여생에 대해서는 후회 없이 살아야 후회 없이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 외에도 모순적인 마음은 끝이 없다. 마음공부를 하는 중에도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많다. 다들 그 사람과 편하게 지내는데, 왜 나만 혼자 불편한 마음을 겪어야 하는지 억울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당장 기억 상실증에 걸리고,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된다면?' 처음 본 사람처럼 마음 없이 대할 텐데, 어쩌면 잘 지낼지도 모르는데.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해 품은 내 마음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서둘러야겠구나.’ 엉뚱한 마음이 모든 걸 망쳐놓기 전에 얼른 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은 애증 하는 마음이었다. 가령 내가 부모님을 존경했던 만큼 실망감도 클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대로 안고 살기에는 너무 무거운 마음이었기에, 나는 울며 악을 쓰며 마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종말 신기하게도 마음이 옅어질수록 나도 부모님을, 부모님도 나를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 믿는 것이 곧 종교가 아닐까 ]

장례식 때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천국에 즐겁게 계시다는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 장례식 이후에도 고모는 교회 사람들을 살뜰히 챙겼다.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고모도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 같다.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누구든 신을 찾게 된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성경을 읊고, 어떤 이는 부처님을 찾으며 108배를 한다. 누가 정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떤 계기든 깨달음이든, 어떤 신과 교리에 정착하게 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 때, 종교를 가져보려고 여러 곳을 다녔지만, 어떤 거부감 때문인지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었다. 최근에는 무신론자가 전 세계의 40개가 넘는 종교를 체험하는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어떤 대상을 향한 ‘강력한 믿음’ 그 자체가 절망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끈기가 부족해서인지 싫증을 잘 내서인지, 나는 한 가지 대상이나 행위에 열중하지도 못한다. 방황과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명상 수련도, 종교 이론 공부도, 심리학 공부도, 산책도, 글쓰기도, 음악 감상도, 기차여행도, 힐링푸드도, 매일 지속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갖은 시도를 불규칙적으로 해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다양성이 나의 정신 수양에 편중되지 않은 에너지와 영감이 된 것 같다. 누군가 내게 ‘어떻게 내면의 치유가 가능했어?’라고 묻는다면 적어도 ‘부처만 믿으면 모두 해결돼.’라고 단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고통이니만큼, 다양한 솔루션이 공존할 거라는 확신은 든다.


[ 할머니는 사랑만 가지고 떠났다 ]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 법정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말씀 -


무소유는 모든 걸 버린다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으며, 가진 것에 얽매이지 않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떠올려보자. 사람, 인연, 시간, 공간, 물건, 명예, 재산, 권력, 소속, 외모, 건강, 능력, 성공. 우리는 살면서 빌려쓰는 것들을 애착한 나머지 소유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내려놓는 날에는 허망함을 견디다 못해 미치기도 한다. 그렇다고 어떤 목표도 노력도 없이 살 수는 없다. 사는 동안에는 건전한 방법으로 각자의 결핍과 욕구에 귀기울이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에 우리는 어떤 지푸라기를 잡을 수 있을까. 나는 단언컨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했던 기억은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했던 마음은 가져가는 것이다. 사랑이 많았던, 사랑을 줬던, 사랑을 받았던, 사랑을 나눴던, 그 에너지가 나의 ‘믿음’이다. 나는 사랑하기 위해 성장하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고, 사랑을 확장하기 위해 고민한다. 사랑이 많으셨던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사랑을 빼면, 지구에 뭐가 남지.”

- 인스타그램 @limjuhye_0610 -


[ 악마의 속삭임, 잭슨의 비극 ]

영화 [스타 이즈 본 ]에서 잭슨은 자신감이 부족한 앨리의 사랑하며 그녀의 열정을 이끌어내고 스타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지만, 정작 본인은 결핍과 중독에 시달리며 가수 생활의 위기를 맞는다. 그는 사랑하는 이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재활치료를 견디지만, "당신 뒤치다꺼리하느라 모든 게 망할 뻔했다. 앨리 인생을 망치지 말고 사라져라."는 매니저의 모욕에 충격을 받아 죄책감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하고 만다. 처음에는 그저 잭슨의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에 깊게 이입이 됐다. 그런데 다시 보니, 잭슨의 내면이 아직 치유되지 못한 상태에서, 가스 라이팅을 당한 것 같아 많이 안타까웠다. 잭슨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고, 앨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줬다. 그리고 일시적인 병증에 시달리며 심신이 약해진 것뿐이다. 이런 잭슨을 구제불능의 쓸모없는 사람으로만 몰아간 건 너무 폭력적이다. 잭슨이 그런 인신공격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자신의 등대로 앨리를 믿고 더 솔직하게 의지했다면. 다시 그가 정상 궤도로 돌아왔을 텐데. 나 또한 조증, 울증을 반복하며 극한으로 치닿는 감정 기복과 자기혐오를 겪어봤기에, 잭슨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내게는 "악마의 속삭임에 속지 마세요."라고 자주 일깨워주시는 주치의 선생님이 있어서 다행이다. "혹시 평소답지 않은 언행을 했다면, 그건 주혜 씨가 아닙니다. 그 마음에 속지 마세요. 주혜 씨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 말을 매일 여러 번 반복하며 ‘나다운 나’를 믿어왔다.


[ 꿈에서 만난 망자와의 대화 ]

"네가 항상 네 곁에 있어줬지. 나를 아는 사람이 있고, 나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 나를 아는 사람 중에는 네가 있었고, 너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어. 나는 너 외의 사람들한테 외로움을 느꼈어. 나를 아는 수많은 너를 제외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들에 외로움을 느꼈어. 네가 항상 옆에 있어줬는데, 부질없이 괴로워했네, 죽을 때까지."

- 넷플릭스 [ 페르소나 "밤을 걷다" ] 중에서 -


허망하게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소식이 자주 매스컴으로 전해진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내가 돕지 못했다는 사실에 사실에 무기력하다.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는 사랑했던 사람과 행복했던 기억, 즐거웠던 일상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역시 조증, 울증 에피소드에 빠져 모든 걸 잃게 된 날에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위험한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며칠 동안 가만히 있을 때도 있다. 지겹도록 음지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란 생각이 확실해진다. 이내 '살려주세요!'라는 외침과 함께 발버둥을 친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어도, 어떤 시도라도 했다. 신선한 공기, 아이들이 떠드는 공원, 엄마가 사주는 밥, 심리 상담 영상, 유튜브 긍정 확언, 소울 풀한 음악, 익명의 상담, 산책 중 자신과의 대화, 나와 비슷한 고민과 증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메마른 감정을 살리기 위해 갖은 시도를 했다. 생각의 감옥에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추락하는 순간,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도와줘!’였고, 가장 참았던 말도 ‘도와줘!’였다. 거절당할 거란 두려움과 자존심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고립감은 커졌다. 결국은 사람이 사람을 돕고자 하는 본능을, 생각보다 따뜻한 세상을, 속는 셈 치고 억지로 믿고 또 믿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도움을 받겠다고 태도를 바꾸자, 세상은 나를 돕기 시작했고,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내면의 치유 과정을 견딜 수 있었다.


[ 익명의 시대, 느슨한 연대의 활용 ]

텔레비전 소리만 가득한 거실, SNS로 알게 되는 친구의 경조사, 이어폰을 끼고 각자의 폰에 몰두한 사람들, 손 편지를 대체하는 빠른 카톡, 줄어드는 대면 업무. 디지털 세상이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고립감에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하지만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앞에서 꺼내놓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나 정신과적 질환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더 많은 교류가 가능해졌다. 우리는 익명으로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상담 치료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졌거나 극복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멀리서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익명의 시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혜택은 그런 연결과 연대가 아닐까.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지 내 글을 찾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익명이든 실명이든 세상에 꼭 도움을 청해 보길 바란다.


[ 내 이야기를 먼저 쏟아내는 편 ]

“자신의 공간을 침묵이 삼키게 내버려 두지 마세요.”

- 영화 [ 내 아내의 모든 것 ] 중에서 -


정말 속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쓰는 방법이 있다. 내 얘기를 먼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이다. 조금은 횡설수설, 푼수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냥 손익 계산 없이 해보는 거다. 어제 먹은 만둣국 이야기, 동생이랑 싸우고 독립한 이야기, 조울증 진단서를 발급하는 과정, 친구한테 손절당한 얘기...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도 조금씩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 얼마 안가 눈만 마주치면 이야기 꽃이 피게 된다. 비슷한 원리인지 모르겠으나, 내 SNS에 친구들과도 대화거리가 끊이지 않는 편이다. 내 가치관과 감정을 여과 없이 플랫폼에 쏟아내기 때문이다. 다만 피로감이 느껴지는 공격적인 말투는 쓰지 않으려고 글을 여러 번 다듬기는 한다. 혹시 여러분도 혼자 들고 있기 무거운 마음이 있다면 한 번 공유해보자. 부끄럽다면 '작가의 서랍'에라도 몰래 꺼내놓자. 마음에 맴도는 소리를 말로, 글로 꺼내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정리가 된다. 그리고 그런 진심과 경험이 모이면, 언젠가는 예쁜 포장지에 싸서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 분명히 그 이야기는 나와 비슷한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 메타버스 세상에 소수자는 없다 ]

우리는 무의식 중에 과시하고 싶은 부분을 강조하고 약점을 숨긴다. 몸매가 좋은 사람은 딱 붙는 옷을 입고, 자식이 똑똑한 사람은 은연중에 표현을 한다. SNS에서도 마찬가지, 언뜻 보기에 나 외의 모든 사람들은 전부 잘나고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익명의 게시판에는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질병이든 취향이든 소수자들의 비밀 커뮤니티도 많다. 나는 조울증을 주변에 알렸지만, 아직은 내 주변에서 동지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속으로 ‘야, 나도.’를 외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추측은 한다. 전 세계 인구의 1%가 평생 한 번은 조울증을 경험하며, 우리나라는 그 발병률이 꽤 높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7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증상을 앓지만, 드러내거나 교류를 하지 않을 뿐이다. 이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밀도 있게 모이면, 오히려 조울증이 없는 사람이 소수자가 된다. 아마 이들에게 건전한 오프라인 커뮤니티가 있다면 좀 더 쉽게 마음이 연결되고 고립된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메타버스는 로봇이 사는 가짜 세상이 아니라, 진짜 인간의 마음을 연결하는 새 시대의 연대다. 지금 당장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이 두렵다면, 메타버스에서 얼굴을 가리고 치유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다.


[ 통신비 14만 원이 아깝지 않다 ]

“생일날 스케줄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너무 이른 거야, 시간이. 생일이 진짜 이렇게 끝나나. 조금 외로운 거야. 그리고 동물의 숲을 켰어. 근데 주민들이 축하한다고 파티를 해주러 온 거야. 잭슨이 갑자기 할 말 있다고 집으로 데리고 가. 그리고 케이크랑 가랜드랑 해놓은 거야.(울먹이며)”

- 유튜브 [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 ] 선미 인터뷰 중에서 -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는 지금 가난하고 혼자인 상태다. 아마 빈곤과 고독은 인류 대다수의 고민일 것이다. 취미 활동이나 정신 수양을 자주 하고 싶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에너지나 자금은 필요하다. 습관적으로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그곳에는 진입장벽이 낮은 콘텐츠가 많고, 운이 좋으면 양질의 콘텐츠에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종일 미디어 통신의 영향 속에 살고 있다. 아침에는 멜론 음악을 들으며 잠을 깨고, 지하철에서는 뉴스와 숏폼 영상을 보고, 길을 걸으며 SNS로 지인의 근황을 확인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기를 브런치에 쓰며, 넷플릭스 영화를 보며 잠이 든다. 구독자가 되어 댓글을 달기도 하고, 창작자가 되어 간단한 게시물을 올리기도 한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만 해도 콘텐츠를 돈 주고 사는 게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판데믹을 계기로 고립된 개인은 미디어를 통해서 세상을 만나게 됐다. 나아가 이제는 서로의 세상을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미디어 이용료를 감당한다. 나를 둘러싼 침묵을 깨고 고립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생태계에, 나는 14만 원이 크게 아깝지 않다. 나는 메타버스가 허구나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을 연결하는 지금 실존하는 플랫폼이라고 생각한다.


[ 콘텐츠와의 운명적인 만남 ]

많은 매체에서 다양한 세계관을 접해도, 생각에 환기가 일어나지 않는 최근이었다. 나는 새로운 영감과 신선한 공감대를 찾고 있었다. 자기 전에 누워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들락거렸지만 지루했고, 이상하게 속이 안 좋아서 거실에 나와 TV를 켰다. 그리고 EBS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뤼트허르 브레흐만 강연을 운명적으로 듣게 됐다. “사람들은 마녀사냥이나 노예제도가 쉽게 없어졌다고 알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인식을 넘어선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동물보호나 남녀평등도 한때는 불가능한 유토피아였어요. 그것을 처음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보나 테러리스트 취급을 당했죠. 하지만 지금은 당연해졌죠. 역사학은 우리 사회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학문이에요. 당연하거나 영원한 건 없죠. 물론 쉬운 방법이 있다는 건 아니에요, 점진적으로 변하겠죠. 분명한 건 우리 다음 세대가 현세대의 어떤 점을 역겨워할 거란 겁니다. 하지만 불편하더라도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하죠. 우리의 다음 유토피아는 어디일까요?” 그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마음을 쿵쿵 울렸다. 문제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사상의 왜곡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공감했다. 인류에 대한 희망을 나는 잠시 잊고 살았는데. ‘옳은 일’에 유달리 집착해온 내게 사람들은 “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져?” 같은 반응을 보였는데. 완전히 헛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 정답이 아닌 화두를 던지는 사람들 ]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 John Lennon 이 부른 [ Imagine ] 중에서 -


마이클 샌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 사회의 맹점을 얘기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성장 환경이나 기초 지식, 유전자와 체력, 기억력과 집중력이 전부 다른 학생들인데, 수능 성적만으로 하위 집단을 무능하다고 단정해도 되는가. 그들의 출발선이 같았는지, 불공정한 개입은 없었는지, 수능이란 제도로 낙오자가 생겨나는 게 합리적인지, 승자와 패자를 반드시 나눠야만 했는지, 그로 인한 도덕적 해이나 소외와 갈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빈익빈 부익부 형태의 세습이 당연한지. 여러 가지 물음표가 생겨나는 책이다. 일부 댓글에는 “그럼 뭐 공산주의가 낫다는 거냐?”는 날이 선 반론도 보인다. 나는 그런 이분법적인 태도가 조금은 아쉬웠다. 인류는 아직 정답을 알지 못한다. ‘공정’에는 상대적인 딜레마가 많기에, 오지선다형처럼 간단하게 말할 수가 없다. 다만, “같이 고민해보자.”는 형식의 화두에 얼떨떨한 희망을 느낄 뿐이다. 어떤 유토피아로 가든, 고민의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 표절자와 왜곡자와 전달자 ]

존경스러운 지식인의 논리를 내 글에 인용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내가 엉터리로 그들의 논리를 공부하고 내 생각인양, 내 글에 어설프게 녹여낼까 봐, 또는 왜곡해서 전달할까 봐. 나는 차라리 전체 문장을 고스란히 옮겨 쓴 뒤 출처를 밝힌다.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싶데도 훌륭한 마인드를 표절하거나 왜곡할 수는 없다. 정말 소중한 생각은 시대와 종교를 초월해서 반복되며, 시대에 맞게 세련되고 아름답게 다듬어진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화두를 접하고 같이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내 경우에는 이지영 강사의 유튜브에서 마이클 샌델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고 그의 책들을 사게 됐다. 한편 내 글을 읽고 마이클 샌델에 대해 알게 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내가 대단한 지식인이나 작가는 아닌, 그저 수많은 전달자 중에 한 명이 될지라도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 건강한 미디어의 힘을 기대하며 ]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

- 일본의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 -


유튜브만 들어가면 잘생긴 아이돌이 멋진 무대를 하고 재밌는 농담을 하고 소탈한 일상을 보여주니, 내적인 친밀감이 생긴다. 실제로 초등학생의 장래희망 1위가 연예인일 정도로,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규모가 크다. 연예인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뉴스는 본다. 나라에 큰 사건, 사고가 터지면 언론은 특정 집단과 정치인들을 매질하느라 정신이 없다. 안타깝게도 근래에 정치적인 중립과 보도 원칙을 제대로 지키는 뉴스를 본 적이 드문 것 같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몰아세워 책임을 물으면 사건이 해결됐다는 접근법이 아쉬울 뿐이다. 언제부턴가는 화가 나서 뉴스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들린다. 몸매가 좋은, 인맥이 넓은, 명품이 많은, 옷을 잘 입는, 집이 화려한, 돈을 잘 굴리는, 돈을 잘 쓰는, 춤을 잘 추는, 랩을 잘하는, 애를 유복하게 키우는... 여러 인플루언서들이 넘쳐난다. 그들의 화려한 단면에 몰입해, 이면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이런 편향된 미디어 콘텐츠가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한다. 마치 주목받는 그들을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강박마저 심어준다.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세상에 꼭 필요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데, 우리에게 아직 닿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중독적인 유행이 지긋지긋해, 중립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을 해보려고, 강연과 다큐를 시청하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 것이다. 건강한 콘텐츠는 대체로 오감이 즐겁거나 쉽게 빠져들 수 있는 형식은 아니다. 몸에 좋은 것이 입에는 쓰지만, 그런 진입장벽의 불편은 감수해 볼 가치가 있다.


[ 콘텐츠 생태계의 다양성과 접근성 ]

“(수익은) 거의... 마이너스죠. 그리고 들어오는 수익은 바로 다시 나가는... 좋은 영화들이 많아서 소개해드리려고.”

- 유퀴즈, 소지섭의 콘텐츠 투자 관련 인터뷰 중에서 -


‘인플로언서’, ‘셀럽’, ‘핫템’, ‘베스트셀러’의 공통점은 유명해서 유명한 것이다. 할리우드의 셀럽 ‘패리스 힐튼’은 호텔 상속녀, 사치를 즐기는 파티광, 금발의 섹시 백치미 이미지와 각종 사건 사고로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지만, 그 인지도로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켰다. 인기가 명예이자, 직업이자, 돈이자, 영향력이 되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빨리 유명해지고 싶어 한다. 고유의 세계관을 구축할 시간은 없고 필요성은 무뎌졌다. 아마 가장 빠른 방법은 독특한 캐릭터로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일지 모른다. 하루에도 여러 명의 숏폼 스타가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군중의 파도를 타고 이를 접한다. 그럴수록 파도를 역행하고 싶은 오기가 생긴다. 무명작가의 오래된 소설이 낡은 중고서점에서 반짝거리며 애타게 주인을 찾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타인의 검증을 받지 않은 낯선 창작물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에는 위험 부담과 한계가 있다. 나는 독립영화라도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따지는 편이며, 평점이 7은 넘어야 보는 편이다. 좋은 책을 빨리 접하고 싶은 욕심에 평소 좋아하는 지식인들의 추천도서를 읽는 경향도 크다. 무명 아티스트의 발굴로 인한 콘텐츠 역주행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세계관이 없는 얕은 파도와 알고리즘을 맹신하지는 않는다. 항상 유익한 양질의 콘텐츠와 마주치기 위해, 주파수를 섬세하게 조정한다.


[ 내가 EBS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회의 선동은 열심히 살지 않으면 도태될 거란 내 심연의 열등감과 교묘하게 결합을 했다. 나는 옆을 보지 않고 달리는 경주마였다. 학업과 업무에 대한 성취와 인정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기 때문에, 나는 문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책을 싫어했다. 평소에 의무적으로 공부하거나 처리해야 했던 활자가 많았던 만큼, 거부감도 컸다. 쉴 때는 거의 난독증에 가까울 정도로 몸이 읽기를 거부했다. 31살이 되도록 내 돈 주고 읽고 싶은 책을 사본 기억이 없다. 뭔가를 학문적으로 탐구하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은 항상 의무감으로 했다. 그런 내가 책 읽기의 즐거움에 빠진 계기는 부동산 공부였다. 집을 사고 싶었던 것은 순수한 내 욕구였으니까. 괴소문이나 일시적 현상에 휘둘리기보다는,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고 싶었다. 고수들이 평생을 쌓은 노하우를 단 돈 2만 원에 사 온다고 생각하니, 책은 돈이 아까운 게 아니었다. 편중되지 않은 안목을 갖기 위해 다양한 관점을 쉬지 않고 읽었다. 그러자 어느 정도 정보의 우위에 서게 됐고, 과감하지만 후회 없는 대출과 아파트 매수를 확신에 차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시 하락이나 금리 하락에도 크게 후회는 없었다. 마치 하나의 세계가 확장된 기분이 들었다.


“공부란 머릿속에 지식을 쑤셔 넣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의 해상도를 올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 트위터 @toyomane -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은 위험하다.”

- 중세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


편협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생각에, 좁은 세계를 벗어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에게 닿지 않은 이야기는 아직 너무도 많은데 말이다. 진정으로 유익한 콘텐츠를 만나봤다면, 다 안다는 게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알고리즘을 따라 정처 없이 표류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바깥세상에 대한 주체적인 궁금증을 가지고 움직여보는 것은 어떨까.


[ 나를 살리는 메시지를 찾아서 ]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유령 같은 존재가 되는 거지.”

- 인터스텔라 중에서 -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쿠퍼는 지구의 멸망을 앞두고 새로 정착할 시공간을 탐험하다 5차원의 영역을 방황하고, 과거 시점 딸 소피의 방에 도달한다. 그는 절박하게 소피의 시계 초침을 움직여, 모스 부호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성인이 된 소피는 그 신호가 아빠가 보내는 힌트라는 걸 깨닫고, 시공간의 미스테리를 해결한다. 영화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연결돼있다면, 사람과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면, 나는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낼까. 또 보내왔을까. 나는 그런 메시지의 전달이 '콘텐츠' 통해 이뤄져왔다고 생각한다. 광활한 공간, 끝없는 시간 속에 이미 수많은 뮤즈와 영감이 있었다. '콘텐츠'라는 단어가 있기 전에도 '콘텐츠'는 존재했고 그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는 완전한 무에서 새로운 유를 창조하고 있는 게 아니다. 각자 고유의 주파수로 끌어당긴 콘텐츠를 보고 듣고 읽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사유하고, 콜라쥬처럼 재구성하고 각색한다. 나를 살릴 메시지를 찾아 안테나를 세워보자. 그렇게 마음 먹는 순간, 모든 시공간으로부터 수많은 힌트가 날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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