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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마음 Oct 26. 2022

부록1) 15년 2월, 건축학과 졸업 후의 비극

[ 세 아기의 치열한 사랑 쟁탈전 ]

90년 3월생 언니와 91년 6월생 딸 쌍둥이, 딸 부잣집은 사실 경쟁과 질투가 가득했다. 애교쟁이 언니가 할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했던 기억이 난다. 언니는 택시 운전사 할아버지의 조수석에 자주 탔고, 항상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있었다. 나는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셋 중에 누가 제일 좋아?"라고 물어보면, 할아버지는 항상 내 앞에서는 내 이름을 얘기했지만, 속으로 '거짓말, 할아버지는 언니를 제일 좋아해.' 하며 절망감을 느꼈다. 한 집에 살던 가족들의 노력에도, 우리 셋의 경쟁과 다툼은 꾸준했다. 나는 자주 장난감이나 음식을 양보하곤 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온 배려라기 보다는 착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우리 셋의 육아 난이도가 높아, 번갈아가면서 몇 달간 친척집에 보내졌던 기억도 난다. 돌이켜보면 언니를 시작으로 우리가 일찍이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게, 그런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언니, 그 뒤에는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내가 있었고. 그 밑에는 쉼 없이 발버둥 치는 열등감이 있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해." 아주 나중에야 옆집 아줌마가, 자기 눈에는 셋 중에 내가 제일 예뻤다고 말해줬을 때는 정말 의외였다. 어른들은 공평하게 사랑을 나눠주려고 최선을 다하셨는데, 나는 내가 예쁘다거나 사랑받는다고 잘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 "공부하느라 친구를 안사겼어요." ]

"저 맨날 종이랑 밤새고 그리고 해뜨면 영어학원 갔다가, 낮에 애들 가르치고 그리고 퇴근하면 바로 밸리 가고, 그리고 밤엔 또 종이 만나느라고... 전 사실 따로 씻을 시간이 없어서 이 머리도 학교에서 감았단 말이에요... 네, 잠은 그냥 점심시간에 양호실에서 잠깐 자구요, 어차피 아침밥은 영어학원 때문에 먹을 시간이 없어서 못먹고 밤에는 잘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눈을 좀 붙여야되는데, 그럼 점심먹을 시간이 없으니까 쉬는 시간에 매점에서 미리 먹었구요. 또 밸리 시간 맞추려면 퇴근하자 마자 뛰어가야 되기 때문에 따로 저녁 먹을 시간 없습니다. 근데 밸리 끝나면 바로 또 종이 만나야 되니까 저녁 먹을 시간이 진짜로 절대 없거든요. 게다가 저는 이유리 때문에 밤새 채팅까지 해주며 고도를 기다리며 연습도 해야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밤에 종이가 이것저것 싸오는 거 그거 얻어먹으면서 그렇게 버텨냈어요."

- 영화 [ 미쓰 홍당무 ] 중에서 -

- 이유를 모르고 열심히 사는 양미숙의 대사 -


열등감이라는 결핍을 맹목적인 성취로 채우는 공부 벌레였던 나는, 친구를 못사귀는 게 아니라 안사귀는 거라고, 원하면 언제든지 사귈 수 있다고 속으로 합리화를 했다. 쉬는 시간에는 책을 보는 척했지만, 사생대회나 수학여행이라도 가면 혼자 다니는 게 꽤나 뻘쭘했다. 새학기 새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은 지옥 같았다.


[ 워크홀릭, 일벌레, 너드, 1등 ]

초등학교 때까지는 반에서 1등이 당연했다. 중학교에 가서 반에서 2, 3등을 하니 기분이 안 좋았다. 고등학교 때도 최선을 다해 전교에서 놀았다. 긴장감에 수능을 망쳤지만, 내신 성적이 워낙 좋아서 부산대 건축학과에 합격했다. 그렇다, 나는 25살까지 지독한 공부 벌레, 일 벌레였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난독증이 있어 언어보다는 수리를 공략했고, 이론 공부보다는 디자인에 전념했지만, 어쨌든 대학교에서도 1등 장학금을 꾸준히 탔다. 건축 설계를 하는 순간은 진심으로 행복했고 매사에 열정적으로 상상하고 그리고 만들었다. 밤을 새워서 창작물을 만들고 내 아이디어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뿌듯했다. 좋은 디자인이 떠오를까 봐 잘 때도 머리맡에 필기구와 노트를 두고 잤다. "친구는 나중에도 사귈 수 있어, 돈 벌면 더 좋은데 여행 갈 수 있어." 스스로를 달래며 매일 행복을 유보했고, 열심히 산 것에 대한 보상은 기말고사가 끝난 뒤 하루 종일 TV 시청 정도가 다였다. 그래서 일부러 하늘에서 내게 조울증을 주신 것 같았다. ‘제발 좀 멈추라고, 그러다가 죽는다고.’


[ 졸업, 그리고 내 인생도 끝인가 ]

건축학과를 수석 졸업했지만 앞만 보고 달리던 경주마였던 나는, 지독한 번아웃 증후군에 걸려 취업 준비를 해야 할 시기에 난생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우울증으로 ‘죽음’을 검색하고 있었다. 잘못 살았다는 후회, 내게 상처받았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쓸모없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 왜 살아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무기력, 다시는 사랑하지도 사랑할 수도 없을 것 같은 공포, 사람에 대한 불신,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공허함, 이미 내 삶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다는 기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는 착각마저 들렀다. 나는 180도 다른 사람이 돼있었다. 여러 가지 마음들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잠을 자는 게 불가능해졌고, 실제로 2주 정도 잠을 아예 못 잤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가도 위기감에 심장이 벌렁거리며 소스라치게 놀라며 깼다. 미칠 노릇이었다.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것에 대한 결과가 우울증이라니. 마치 영화에 흠뻑 빠져 메서드 연기를 한 배우가 작품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캐릭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듯이, 나는 여전히 과제나 시험을 다달이 치러야 하는 학생이고 싶었다.


[ 무한 경쟁 사회에서의 출생 ]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넌 쓸모가 없어, 기말고사 성적으로 보니 너는 70점짜리 인간이구나, 실패한 불쌍한 인생, 사랑받을 자격도 없어.' 치열했던 입시제도는 뭐든 열심히 해보려던 학생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불을 지핀다. 학과와 직업을 찾는 과정에서도, 정작 내가 우리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겠다는 마음이나 가치를 실현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골몰했던 것 같다. 그러니 서둘러도 쫓기는 기분이 들었고,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았고, 발버둥 칠수록 위태롭기만 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잘하는지, 할 수 있는지,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을 생략하고 정신없이 몸과 마음이 병들 때까지 달려왔다.


[ 병원에 대한 거부감, 명상의 시작 ]

정신과에서 내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데, 눈물만 터질 뿐 나도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치부라고 숨기는 것도 없는데, 계속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나를 괴롭히는 마음이 눈에 보인다면 난도질을 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처음 본 상담사는 너무 젊었고 의대는 졸업한 건지 의심조차 들었다. 실력이 의심되고 짹각 짹각 시계 분침 소리에 15만 원이 아까워 집중도 되지 않았다. 상담을 마치고 나왔는데, 엄마가 어땠냐고 전화로 물었다. 그냥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살려줘, 누구든, 제발.’ 상담 치료에 대한 불신, 약물 치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병원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 정신병자가 되기 싫다는 생각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우울증’이라는 키워드로 인터넷을 몇 달째 뒤지다 ‘마음공부’라는 걸 발견했고, 명상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육체의 생이 다해 우주의 먼지로 돌아갔다는 사고 훈련, 그리고 멀리서 내 지난 삶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다. 첫 달은 거의 오열을 하고 악을 썼던 것 같다. 더러운 세상, 못 믿을 인간들, 이용당한 기억, 상처받은 말들. 썩은 음식을 토해 내듯이 상한 마음을 게워냈다. 더 이상은 도망치지 않고, 그저 바라봤고, 알아챘고, 인정했다. 놓아버리기 위해서. 감정 기복이 요동을 치는 부작용도 견뎠다. 옳고 그름이란 없고, 마음은 마음일 뿐이다. 실체를 모르게 복잡하게 뒤엉켜 있을 때나 이것들이 나를 죽이는 거지, 하나하나 낱장으로 떼 놓고 보니 그냥 어린애 울부짖음이다. 그렇게 평생을 미뤄왔던 나와의 대화를, 화해를 시도했다.


[ 나를 전부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 ]

나는 겉으로는 겸손한 척했지만, 속으로 꽤 오만했다. 내가 헝거게임처럼 치열한 삶을 살며 성취한 정량적 지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등, 100점, 수석, 짜릿하고 달콤한 중독이었다.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일구는 게 멋있는 일인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게 인생의 전부였다는 게 문제다. 목표지향적인 인간, 친구들에게 쏟는 시간이나 감정이 아까울 때도 많았고, 그걸 눈치챈 친구들은 결국은 떠났다. 그래도 나는 도리와 역할을 찾아 헤맸다. 아버지처럼 비난받기보다는, 엄마처럼 비난하는 역할이 편했고, 그러려면 내 성취나 힘, 존재감이 필요했다. 그 존재감이라는 게 결국은 열등감의 뒷면이란 것은, 명상을 한참이나 하고 깨닫게 됐다. “왜 그것밖에 못 해, 고작 이거밖에 안돼? 죽어야 돼, 진짜.” 오직 출세를 위해 스스로에게 퍼부은 폭언은 도가 지나쳤다. 그 정도 살해 협박을 하는 타인이 있다면, 이미 옛날에 손절을 했을 것이다. 그런 딱딱한 세계 속에 나는 나를 가두고 죽여가고 있었다. 그렇게 내 세상은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다.


[ 잘못된 사회생활의 첫걸음 ]

우울증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나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바쁘게 살며 외면하려 했다. 학생 때도 늘 성취감으로 살아왔으니, 회사에 취직을 하면 그런 힘든 마음을 느낄 틈이 없어질 줄 알았다. 그렇게 교수님께 부탁드려서 가게 된 작은 설계사무소에서, 출근 첫날 나는 원인 모를 공포에 휩싸여 아무것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다음 날 나는 잠수 타듯이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명예를 중시했던 나는 모든 대학교 인맥을 차단하게 됐다. 예전에 나를 알던 사람들이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더 깊숙이 숨었다. 공포심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알바 자리만 가끔 알아보며 부모님 속을 썩였다. 차라리 내가 마음이 아니라 몸이 아픈 거였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충동적으로 건축 설계와는 전혀 다른 건설 감리 회사에 지원했고 바로 합격했다. 그러나 겨우 몇 달을 다니다가, 어이없는 성추행 사건을 겪고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못하고 난리를 친 뒤 퇴사를 하게 된다. 자취방을 떠나 모두와 연락을 끊고 신용카드가 한도 초과가 될 때까지 사치를 즐기며 떠돌이 생활을 하며 사람들과 싸웠다. 그리고 스트레스로 장천공이 생겨 쓰러지자, 연락을 받은 가족들이 찾아왔고 정신과에 강제입원을 했다. 알고 보니 그런 과한 행동들은, 길었던 울증이 끝나고 시작된 첫 조증 에피소드였다.


[ "그 말씀은 제게 폭력적입니다." ]

성추행 사건 이후로 사람들이 내게 하는 언행이 폭력적인지 판단하는 데에 예민해졌다. 원래는 누가 좀 실례되는 발언을 해도 최대한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가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게 됐다. 현 직장의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술김에 내게 다소 불쾌한 발언을 쏟아냈고, 나는 다음날 인사팀으로 달려가 이를 고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피해자, 가해자 프레임이 나뉘었다. 실제로 그 선배가 말을 심하게 한 것도 있었지만, 내가 엄격한 잣대를 바짝 들이대고 있기도 했다. 소문은 무성해지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하며 한쪽 편을 들었다. 내 트라우마를 건드려 시작된 싸움, 반드시 이기고 싶었지만 왜 해야 하나 괴롭기도 했다. 나중에는 마지막에 인사팀에 선처를 부탁했지만, 처리결과는 선배에게 불리하고 작용했다. 당사자들만 아는 진실에 침묵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치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말을 옮기고, 잘잘못을 따지고 한쪽을 편들고, 반대 쪽을 매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제3자가 떠들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속 시끄러웠는데 말이다. 정작 그 선배와 화해를 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냐. 예민한 너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와 같은 보복성 2차 가해를 종종 겪었다. 그 사건은 심심할 때면 가십거리가 됐고, 다른 갑질 사건이 생겨나면 비교 기준이 됐다. 그렇게 한마디씩 던진 말들이 쌓여서 오랜 트라우마를 자꾸 건드렸다. 이후로 나는 지인이나 유명인의 괴담을 들어도, 그대로 믿고 떠들기보다는 입을 다물게 됐다.


[ 폭력이 옅은 세상으로 가는 속도 ]

식인 사냥과 고문이 만연했던 시대, 국익을 위한 전쟁이 정당했던 시대, 집단 학살의 명분을 찾던 시대, 애국을 위한 테러가 이용됐던 시대, 독재자 아래 살인을 눈감던 시대, 가정폭력이 용인된 시대, 학교 체벌이 인정되던 시대, 왕따 문제가 방치되던 시대, 갑질이 당연했던 시대, 산업재해를 눈감던 시대, 언어폭력을 문제 삼지 않던 시대. 그런 시간을 차례로 지나며, 세상은 꾸준히 폭력이 옅어지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 가끔 시대를 역행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 그 기준이나 정도, 방식과 속도에는 개인차가 있을테고 내 인권 감수성은 다소 엄격한 편이었다. 기성세대는 나를 '모났다', '예민하다'라고 생각했고, 또래 세대들은 '사이다'라며 '대리만족'했다. 갑질을 오랫동안 참아온 사람들은 내 '당돌함'을 질투하면서도 은근히 따라했다. 그들 모두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 나 역시 피해자, 가해자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에 갇히고 싶지 않다. 더 조용히, 더 정중하게, 더 천천히, 내 불쾌함을 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사실은 나도 웃으며 알려주고 싶었다. "그 말씀은 조금 폭력적이게 들려요." 하지만 그때는 그런 매너와 제스처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마음의 평정이 무너지면서 다소 과격한 표현을 동반했던 것 같다.


[ 마음이 주는 힌트에 귀 기울이다 ]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꾸준히 무너지고 일어났다. 조울증 치료와 공기업 입사, 내 집 마련이나 휴직과 같은 외부적인 변곡점도 있었다. 별개로 명상, 글쓰기, 독서, 그림, 여행, 대화, 긍정 확언, 기도, 약물치료, 상담치료, 종교 이론 공부 등 다양한 정신 수양을 해왔다. 아직 기질적인 예민함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마음을 직면하고 인정하고 내려놓기까지의 과정을 참을성 있게 기다릴 정도는 됐다. 적어도 이제는 마음을 덮어두고 엉뚱한 곳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외부 상황이나 사건, 사람을 탓하거나 기대를 걸 때, 그리고 정작 나는 가만히 앉아 주도권을 뺏길 때, 내 인생은 더 바닥을 쳤기 때문이다. 결핍과 욕구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지만, 그것은 정해진 슬픈 운명이 아니다. 나는 매일 내가 무엇을 부족하다고 느끼고 어떤 것을 원하는지, 마음이 주는 힌트에 귀 기울이고 있다. 마음으로 나누는 자신과의 대화로, 있는 그대로의 나와 아직 알아가는 중이다. 조울증을 치료하고, 공기업에 입사하고, 내 집을 갖고, 슬럼프에 쉬어가는 것, 모두 내 목소리에 집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속에 솟구친 불안감과 외로움, 그것은 나를 구하기 위한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 아래는 제가 건축학과를 다닐 때 만든 작품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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