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책을 읽는다. 아이 뒤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밥 먹으라는 소리 안 들리니? 여자아이가 돼서 말이야. 밥상 차리면 와서 수저도 놓고 해야지. 빨리 안 와? 하여튼 누굴 닮아서 저래. 맨날 말만 잘하지. 책 그만 보라고! 너 엄마가 벼르고 있어. 알지?”
밥을 먹고 돌아오자마자 아이는 책을 다시 집는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었다.
‘나 밥 진짜 빨리 먹었다. 엄마가 이번에도 검정콩을 엄청나게 넣은 거야. 정말 싫어. 완두콩은 그래도 먹을 만한데, 검정콩은 정말 토 나오는 맛이야. 너에게 검정콩을 먹는 나만의 비법을 알려줄게. 우선 검정콩만 한쪽으로 골라내. 그다음에 숟가락으로 크게 한 숟가락을 뜬 다음 눈을 감고 한 번에 먹어 치우는 거야. 그리고 물을 꿀꺽 마시면 되거든. 보통은 한 숟가락이면 끝나는데, 오늘은 도저히 한 숟가락으로 안되겠더라고. 그래도 네가 나를 기다릴 것 같아서 용기를 냈어. 후다닥 두 숟가락에 해치웠지. 그런 다음, 남은 밥을 물에 말아 후르륵 했지. 나 잘했지. 나 진짜 빨리 왔지. 헤헤’
그 뒤로 아이는 내게 자꾸 말을 걸었다. 대부분 혼자 있을 때였다. 보통은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지만, 가끔은 소리를 내어 말을 걸기도 했다. 아이는 골목을 걷다가 두리번거린 후 아무도 없으면, 마치 내가 옆에 있는 것처럼 대해 주었다. 그러다 주변에 사람이 지나가면 얼른 고개를 숙이거나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지나갔다.
그날 아이는 또 엄마에게 혼이 나고 있었다. 보통 엄마가 소리를 치고 매를 찾기 시작하면, 아이는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손을 빌며 연신 ‘잘못했어요’를 말한다. 아이의 귀는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반응했다. 엄마의 작은 움직임에도 몸을 움츠리고 눈을 감았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고, 몸은 마치 불 위에 앉은 것처럼 움직였다.
그랬던 아이가 오늘은 울지 않는다. 한참을 바닥만 바라보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노려보았다. 평소와 다른 아이의 모습에 엄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도저히 너 같은 애는 못 키우겠다. 못 키워. 엄마는 너 못 키우겠으니까 나가서 다른 엄마 찾아봐.”
아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렇게 고집부리면서 앉아 있을 거야? 얼른 나가! 얼른!”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방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나 나갈 거야. 저 사람은 진짜 내 엄마가 아닐 거야. 분명해. 일단 저 문밖으로 나가야 해. 어딘가에서 나를 찾고 있을 진짜 엄마에게 가야 해.’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이,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갈 거면 입고 있는 옷 다 벗고 나가! 너한테는 옷도 아까우니까.”
방문 앞에서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그대로 멈췄다.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뒤이어 또 한 방울, 한 방울.
‘가자. 나가기로 했잖아. 어서 옷을 벗어. 벗어버리면 끝이야.’
내 말을 들었을까?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서 있던 아이가 천천히 티를 벗는다. 벗은 티를 옆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바지를 내렸다. 한 발, 한 발 바지에서 발을 빼는 아이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팬티만 걸친 아이가 미닫이 방문을 열려고 할 때, 뾰족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팬티는 왜 안 벗니? 팬티도 아까워. 하나도 남김없이 벗고 나가!”
홀딱 벗은 아이가 대문 앞에 서서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다. 대문을 열고 얼굴만 내밀어 본다. 아이는 놀라 다시 대문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이번엔 나갈 거야. 정말 나갈 거야.’
다시 차가운 대문을 손으로 밀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아이가 대문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골목으로 나머지 발을 내놓으려는 사이 멀리서 사람들이 보였다. 화들짝 놀란 아이가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온다.
‘나……, 나 무서워. 대문 안도 대문 밖도 모두. 내말 듣고 있지? 네가 나에게 대답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듣고 있어. 나 여기 있어. 네가 하는 말 모두, 모두 다 듣고 있었어. 계속 말해도 괜찮아.’
나에게 말을 걸던 그 아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나에게 말을 건다. 말을 걸면 신기하게 대답이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