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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by 강아지똥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삶의 허무를 키웠다



너와 내가 내기하듯 외우던 시. 그 하얗고 커다란 목련이 피는 계절에 나는 너를 만났다.

“야, 이거 같이 들을래?” 뒷자리에 앉은 너는 나에게 이어폰 한쪽을 내민다. 그리고 주춤거리는 내 귀에 이어폰을 꽂고선 음악을 켠다. 나는 몸을 반만 돌린 채 어떤 말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한다. 너는 기어코 나의 눈을 맞추고 말한다. “어때? 좋지? 듀스야.” 너는 테이프에서 종이를 빼 나에게 가사를 보여준다. 한쪽 귀에는 음악 소리가 둥둥 울렸고, 한쪽엔 흥분한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

반짝이던 너의 눈, 그 하얗고 커다란 눈.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 너의 집에 간다. 너는 나에게 고봉밥을 주고선 내가 먹지 못하면 은근 까탈스럽다고 말한다. 고기가 있는 날엔 상추에 밥과 고기를 잔뜩 넣어 연신 내 입에 넣는다. 너는 내게 마이클 잭슨을 들려주었고. 건즈앤로지스와 에어로 스미스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비버리힐즈의 아이들을 보기 위해 독서실에서 나오기도 했다.


지상에서 일곱 계단 아래에 있던 너의 집은 나에게 이상한 나라였고, 미지의 세계였다. 난 너의 영어 필기체가 부러웠고, 너의 큰 눈과 시원한 웃음이 부러웠다. 너는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고, 나에게 질문하고 나에게 너의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달빛이 환한 늦은 밤 너에게 말했다. “사실 나 아홉 살 때 자살하고 싶었어.” 그러자 너는 술 취한 아빠가 무서울 때 칼을 보며 참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나의 비밀을 말해버려서 부끄러웠고 시원했고 두려웠다.


사실 네가 나에게 이어폰은 꽂기 전, 나는 너를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아이들과 슬램덩크를 읽으며 방에서 키득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방마다 돌아다니며 너의 이야기를 했다. “7반에 **이가 쓰러졌는데, 영어가 업고 갔대.”

너와 다니는 동안 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몇몇 친구들은 울었다. 너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던 건 나의 의지였을까? 아니면 너의 의지였을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의 열여덟 살을 돌이켜보면 온통 너밖에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험을 보면 너는 내 가방에서 내 시험지를 꺼내 채점을 했다. 나는 불편했지만, 점점 익숙해져 갔다. 너는 대학에 간 우리를 이야기했다. 허공에 미래를 그리며 짧게 행복해했다.


그랬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만 대학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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