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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거리 소설가 Oct 24. 2024

(단편소설) 노래가 없는 곳(完)

 웨이트리스가 큼지막한 샤인머스킷이 들어있는 마티니 여러 잔을 은색 쟁반에 들고 분주히 움직였다. 그곳의 사람들은 웨이트리스가 자기 차례에 오기를 기다리며, 상대방과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태수도 그 무리 중 한 사람이었다. 태수는 오늘 모임에서 처음 만난 미진과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웨이트리스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끊임없이 곁눈질로 확인했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오자마자 자연스럽게 잔을 들고는 미진에게도 권했다.      


 “미진 씨도 한 잔 하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요즘 금주 중이거든요”     


 미진은 태수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는 웨이트리스에게 오렌지주스가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미진에게 곧 가져다 드린다고 답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머쓱해진 태수는 상대의 비어있는 손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잔에 담긴 마티니를 마시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그런 태수를 보고 미진은 미소를 머금고는 이야기했다.      


 “먼저 드세요”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태수가 마티니 잔을 입술에 갖다 대자 달큼한 냄새가 코를 타고 들어왔다.      


 “미진 씨, 어디까지 이야기하셨죠?”

 “제가 유학했을 때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태수 씨도 동경에 계셨다고 하셨죠?”


 다시 그들은 서로가 궁금하지도 않을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 웨이트리스가 미진에게 오렌지 주스가 담긴 잔을 건넸다. 그제야 태수는 그녀가 건네받은 잔을 자기 잔으로 터치할 수 있었다. 청명한 소리가 그들 사이에서 났다. 미진은 태수를 보며 다시 웃어 보였다.      


 “그런데, 오늘 주인공은 어디 있나요?‘

 “그러게요... 저도 계속 찾고 있는데 보이지 않네요. 그런데 미진 씨는 영수와 어떤 사이죠?”

 “아, 저는 작가님이 글을 쓸 때, 첨삭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번에 영수가 상을 받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신 거네요? 정말 영광입니다”     


 태수는 마티니의 취기에 힘입어 약간 오버스러운 말들을 그녀에게 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태수의 말을 받아쳤다.      


 “아니요. 작가님이 워낙 철저한 성격이라 문장이 깔끔하고, 오타도 거의 없었어요. 오히려 작가님 옆에서 일을 하면서, ‘내가 할 게 있나?’라고 늘 고민했는걸요”     


 미진은 자신의 말이 민망했는지 또 웃어 보였다. 하지만 태수는 영수가 그런 것처럼 보일 뿐 사실은 덜렁이라며 미진에게 농을 치고 있었다. 그때, 연회장 앞 쪽의 큰 문이 열렸다. 그 문은 너무 낡아서 열고 닫을 때마다 기분 나쁜 소음이 발생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그 소음에 일제히 반응이라도 한 것처럼 말을 멈추고 문을 바라봤다. 그러자 이미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영수가 비틀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늘은 주인공 영수의 등장에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태수도 잔을 들고는 어정쩡하게 박수를 쳤다. 그러나 이내 어색한 침묵이 그곳을 감돌았다. 연회장의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받은 영수가 무어라 한마디라도 해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영수는 이미 만취한 상태라 걸어 다니는 것조차 신기해 보일 정도였다. 영수가 말을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저마다 작은 소리로 상대방에게 지금 영수에 대해서 한 마디씩 했다. 그 말들은 큰 연회장 천장에 모아져 다시 소란스럽게 변했다. 미진도 영수를 보고는 한 마디 했다.      


 “작가님은 글을 쓸 때는 참 좋은 분이신데, 술을 드시기 시작하시면, 너무 다른 사람이 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누구한테 피해는 주지 않으시니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미진은 태수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이 물었다.      


 “저도 영수를 20년이나 봐왔지만, 안 고쳐집니다. 미진 씨 말 맞다나 영수가 취했을 때, 사람한테 해코지 안 하는 것이 다행입니다”     


 태수는 미진에게 말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때, 문 근처에서 ‘쿵’하는 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몇몇은 누가 문으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소리라고 생각하고는 눈길만 주고는 다시 상대방과 이야기한 반면, 누구는 ‘쿵’하는 소리가 문이 열릴 때와는 다른 다고 생각하고는 문 근처에 시선을 고정했다. 영수와 미진도 처음에는 누가 나갔거니 생각하다가, ‘쿵’이라는 것이 그 기분 나쁜 소리가 아니라는 것에 의아하여 다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문 옆에 있던  5살 난 아이의 키만 한 작은 사자상이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는 영수가 씩씩거리며 그 반대편에 있는 다른 사자상도 쓰러트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 놀란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는 일제히 자기가 들고 있는 마티니와 치즈를 들고 있는 쟁반을 근처에 내려놓고는 달려갔다. 영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을 막는 그들을 뿌리치며 울부짖었다.     


 “웃기고들 있군, 나는 이렇게 취했는데 나를 위한 파티라니? 누구를 위한 파티인 거야?”   

  

 영수는 욕을 섞어가며 허공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제야 연회장 모든 사람들이 영수를 바라봤다. 그들은 모두 영수의 지인이라 영수가 술에 취하면 주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중에는 미진도 포함이었다.      


 “어머, 작가님이 좋은 날이라 과음을 하셨나 봐요. 이제껏 저렇게 취해있는 작가님은 처음이네요”     

 태수는 미진의 이야기에 오랫동안 묵혀왔던 과거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미진에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결국 하기로 결정하고 잠시 뜸을 들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영수가 저렇게 취한 모습은 오늘까지 딱 두 번 보내요”


 미진이 놀라 물었다.      


 “작가님이 예전에도 저렇게 취하신 적이 있었나요?”

 “네, 10년 전이었어요. 그날은 영수의 생일이었죠. 저와 영수 그리고 몇몇 친구들이 그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작은 홀을 빌렸어요. 평소에 영수는 숫기가 없어서 대인관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잘 못했죠. 원래 그런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180도 변하잖아요? 그런데, 영수는 자기 내면의 울분을 토해내기도 전에 체력이 안 돼서 뻗어버리기 일쑤라 그러지도 못했죠. 영수가 술에 취하면 꼬장 없이 잠에 드는 이유가 그래서 인 거예요. 참 재밌는 친구죠. 아무튼 그날 영수의 축하를 위해 모였지만, 모두들 영수를 핑계로 술이나 진탕 마시자고 생각했었죠. 아무도 영수에게 관심이 없이 오롯이 자기들 이야기만 떠들어 댔어요. 그렇게 홀로 방치된 영수는 혼자서 소주며 맥주며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죠. 그렇기 시간은 흘러서 모인 지 두 시간이 될 때쯤, 이제 영수 같은 것은 까맣게 잇고 있었어요. 그때 사달이 났어요. 친구 중 누군가가, ‘오늘 우리 왜 술 마시는 거지?’라고 말을 해버린 거예요. 그때 우리는 모두 웃었어요. 그런데 더 나아가 한 친구는 그 말에 ‘나도 몰라 그냥 마셔’ 이렇게 대꾸를 했어요. 우리는 또 웃었어요. 자리에서 조용히 술을 홀짝거리던 영수는 친구의 질문과 대답에 갑작스레 분노했나 봐요. 갑자기 자리에 벌떡 일어나더니 테일블에 있는 모든 술과 안주들을 자신의 팔과 손을 이용해서 바닥으로 쓸어버렸어요. 모두들 놀랐어요. 그리고는 웃옷을 벗더니, 오늘처럼 소리를 질렀죠. ‘야, 이 세끼들아 위선자 새끼들 너희들이 뭐라도 되는 것 같아 더러운 놈들 니들 같은 놈들 다 필요 없어’라고 하면서요. 자기 자리에서 욕지거리를 하는 영수를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어요. 친구들은 영수를 ‘미친 세끼’라고 하더니 하나 둘 자리를 일어났죠. 그나마 저는 거기 남아서 영수를 끝까지 돌봤어요. 그렇게 그날 영수는 저를 제외한 모든 친구를 잃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잃었다기보다는 본인이 내친 것 같네요”     


 미진은 진지하게 태수의 말을 들었다. 이야기 중간에 잠시 졸음이 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팔짱을 끼는 식으로 잠을 쫓았다.   

   

 “어머, 작가님이 생각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시나 보네요”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영수도 마찬가지죠. 우리 같은 사람이야 쌓아두는 것 없이 다 내뱉는 성격이고, 외로우면 ‘외롭다’, 짜증 나면 ‘짜증 난다’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좀 덜 할 뿐이죠. 영수는 애초에 그런 것이 안 되는 사람이다 보니 더 괴로울 거예요”

 “그럼 오늘 작가님이 저렇게 주사를 부리시는 이유도 그때와 같은 이유라고 생각하세요?”

 “네, 그렇습니다. 제가 한 번 가봐야겠네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태수는 미진과 대화를 마치고는 사자상을 넘어트리려 하는 영수 곁으로 갔다. 이미 영수를 말리기 위해 기진맥진한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는 이미 반쯤 포기하고는 영수의 옷자락만 붙잡고 있는 실정이었다. 태수가 도착하자 그 사자상은 결국 넘어졌다. 또 한 번의 ‘쿵’하는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다시 조용한 소리로 상대방에게 영수에 대한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영수는 사자상이 넘어졌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번에는 웨이터가 내려놓은 쟁반을 들더니 힘껏 내리꽂았다. 이번에는 ‘쿵’이 아닌 ‘쨍그랑’ 거리며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퍼졌다. 태수는 영수를 뒤에서 잡았다.      


 “웨이터, 문을 좀 열어주세요”     


 웨이터는 다급히 문을 열었다. 문에서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나며 열렸다. 태수는 힘으로 영수를 뒤로 제압하고는 그대로 문으로 나갔다. 이제야 연회장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사람들에게는 작은 해프닝도 즐거운 만담거리였다. 삼삼오오 모여 다시 영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를 험담하는 사람부터, 작품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저럴까 하는 걱정까지 그 내용도 다양했다. 태수가 자리를 비운 미진은 홀로 남아 아까 웨이트리스가 놓고 간 치즈 몇 조각을 손으로 집어 먹고 있었다. 그녀는 지루했지만, 그녀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들으며 지루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태수는 영수를 진정시키고는 연회장 밖에 있는 잔디밭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오후에 내린 이슬비에 잔디밭의 풀내음이 평소보다 더 짙었다. 다행히 영수는 오랜 친구의 등장에 진정이 됐는지, 아무렇게나 풀밭에 앉았다. 태수도 그를 따라 옆에 앉았다. 영수는 흰색의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가 앉자마자 초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태수가 조심히 영수에게 물었다.      


 “야, 너 왜 그랬어?”


 영수는 답답하다는 듯이 와이샤스의 상의를 풀어헤쳤다.      


 “그냥, 답답해서,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잖아. 오늘은 내가 주인공 아니야?”


 영수는 술에 많이 취해 어눌하게 말했지만, 태수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고, 자신이 생각한 그 대답이라 영수가 보지 못하는 새에 자신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렇지 오늘 널 축하해 주러 온 건데.....”   

  

 태수는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뭐? 내가 혼자 술을 마시던 말 던 신경도 안 쓰는 사람들의 축하는 필요 없어”

 “그래, 네가 주인공인데 네가 뭘 하던 맞지”     


 이제 태수도 영수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영수는 혼자 흥얼거리며 태수를 향해 말을 걸었다.     


 “태수야, 노래 부르자”

 “갑자기 무슨 노래?”

 “그냥 아무 노래나 부르자, 속이 뻥 뚫릴 노래로 말이야”      


 영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코를 골며, 풀밭에 누워버렸다.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홀가분한 채로 잠을 자고 있는 영수를 보며, 태수는 그의 옆에서 참아왔던 웃음을 쏟아낼 수 있었다.  

   

 ‘불쌍하고 소심한 영수.. 언젠가는 너도 내 뜻을 맘 껏 말할 그날이 오기를...’      


 태수는 영수를 생각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풀밭에 누워버리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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