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들은 때때로 엄청난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태수는 밥을 먹다 말고,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교수 같은 사람이 나오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왼쪽 상단에는 조그맣게 ‘세상을 변화시킨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주제가 적혀있다. 그는 그 문구를 흘깃 보고는 다시 숟가락을 입속에 넣었다. 딱히 배가 고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알기에 맛도 모른 채 음식들을 입 속에 욱여넣었다. 교수의 장황한 설명이 끝나자, 사회자는 맺음말을 하며, 프로그램을 끝냈다. 그의 식사도 끝났다. 아침 햇살이 은은하게 비췄다. 그는 나른한 느낌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가 소설책을 꺼낸 뒤,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장의 책을 넘길 때, TV프로그램에서 교수가 지껄였던 말이 떠올라 불쾌했다.
‘쳇, 똑똑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그럼 나는 왜 이 모양으로 살고 있는데?’
그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 다시 책 읽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핸드폰 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상대방이 태수의 이름을 불렀다.
-네, 이태수 씨죠?
“그런데요”
-여기, 좋은 상품이....
태수는 끊어 버렸다. 책 읽기에 집중하던 참이었는데, 알지도 못하는 영업사원한테 귀중한 시간을 침범당했다는 것에 크게 분노했다. 짜증이 솟구치자, 그놈한테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끊었다는 사실에 다시 전화기를 들고, 그놈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착신이 금지된....
여자목소리의 기계음만 들렸다. ‘착신이 금지된 번호라고?’ 그는 자신을 방해한 영업사원과 두 번 다시 통화할 일이 없을 것을 알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물을 두 잔이나 마시고 나서야 화를 조금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다시 소파에 앉아 책을 폈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책을 뒤로한 채, 바깥바람이나 쐬며 정신을 환기할 요량으로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10월의 끝자락에 닿았지만, 날은 제법 더웠다. 그는 겉옷을 챙긴 사실에 후회하며, 다시 벗어 왼쪽 팔에 감았다. 반팔차림이 조금 선 뜻 하기는 했으나, 몸이 바들거릴 정도로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심지어 햇살이 있는 곳에 서면, 태양빛에 땀도 났다.
그는 적당히 시원하고, 더운 지금의 날씨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낙엽이 막 떨어지기 시작한 은행나무길을 무작정 걸었다. 은행열매의 시큼한 냄새들 사이로, 가을이 옴을 알리는 스산한 향기가 느껴지자 오전에 겪었던 분노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그는 '나온 김에 책방에 들러 책이나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는 미적거리던 걸음을 재촉했다.
10평 남짓 작은 동네 책방에는 책방주인이 데스크에 앉아 꾸벅거리며 졸고 있고, 청년 한 명이 두꺼운 서적을 들고 연신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조용한 책방에는 청년이 책장 넘기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태수가 자신의 허리 정도까지 오는 매대에 놓여있는 책들의 표지를 하나씩 훑었지만, 이목을 집중시키는 책은 없었다. 자연스레 다음 매대로 걸음을 옮길 때, 두꺼운 책을 읽으며 걷고 있던 청년과 부딪혔다. 청년이 책을 보며 걷는 통에 태수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앗"
청년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책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에 놀란 주인도 잠에서 깨어 허름한 책방의 구조물이라도 떨어져 손님이 다친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뭐 떨어졌어요? 안 다쳤어요?"
청년은 민망한지, 떨어진 책을 다시 집어들고는 책방 주인에게 말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책을 떨어 드렸습니다"
그제야 안도한 책방주인은 툴툴거리며 ‘거 젊은 사람이 조심 좀 하세요!’라고 꾸짖듯이 말하고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잠을 청했다. 청년은 태수에게 연신 죄송하다고 말했고, 태수는 손으로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청년은 태수가 괜찮다고 이야기를 해도,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청년도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마지막 사과를 하고는 ‘훽’ 하고 태수를 지나쳤다. 자신을 지나치는 청년을 바라보던 태수는 ‘진짜 미안한 것이 맞기는 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에게서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수가 애써 청년을 무시하고 다음 매대로 움직이려는 찰나 발에 종이가 체였다. 그가 종이를 주워 확인하자, 수기로 어떤 글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태수는 나중에 볼 요량으로 핸드폰을 꺼내 그 종이를 찍고선, 계산을 마치고 나서는 청년을 큰 소리로 불러 세웠다. 청년은 당황하며, 뒤를 돌아 자신과 부딪친 사람이 뭐라도 요구할까,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멈춰있었다. 태수는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진 종이를 청년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종이 그쪽 것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