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비 온 뒤, 맑음(完)

by 길거리 소설가

비 온 뒤, 맑음


물이 성내며 펄펄 끓자, 커피를 내렸다. 금세 향긋한 커피 향이 방안에 퍼지더니 바로 흩뿌려진 담배 연기 마냥 옅어졌다. 오후 4시, 한차례 소나기가 내린 창밖 풍경은 아침이슬을 머금은 새벽녘이라고 해도 될 만큼 촉촉이 젖었다. 미진은 커피잔을 한 손에 들고, 창가에 비스듬히 서서 창가를 내려봤다. 아무도 없는 거리가 주는 묘한 적막함이 외로움에 사무친 그녀의 가슴을 격하게 요동시켰다. ‘혼자’. 감정이 북받쳐 오른 그녀는 소파 위 아무렇게나 걸쳐있는 외투를 입고, 밖으로 향했다.


그녀는 오늘처럼 외로움이 사무칠 때마다 찾는 카페가 있다. 다섯 평 남짓의 그곳은 몇 명 들어갈 수도 없을 만큼 비좁고 답답했지만, 그녀에게만큼은 그곳의 북적임이 마음의 안식이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가 바라던 북적함은 없었다. 몇 차례 소나기 때문인지, 카페에는 주인 말고 아무도 없었다. 미진은 다소 시무룩했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 등을 돌리고 있는 카페 주인을 바라봤다. 카페 주인은 서른 살 정도 돼 보이는 앳된 청년이었는데 적당한 키에 호감형 외모와 말투로 근방 여고생들에게 꽤 인기 있었다. 미진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여고생들이 카페에 자주 가는 시간대에만 카페에 갔었다.


카페주인은 미진이 들어오는 줄 모르는 눈치인지 계속 등을 돌린채 있다가,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에 뒤쪽으로 던진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던 미진의 시선과 마주했다. 청년은 갑작스런 이방인에 들고 있던, 유리컵을 놓쳤다(카페주인은 아마도 설거지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유리잔은 다행히 깨지지 않았지만, 떨어지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작은 카페 구석구석 퍼졌다. 청년은 미진을 향해 바로 사과했다. 미진은 청년에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청년은 컵을 얼른 줍고선 손을 자신의 앞치마에 슥슥 문대고 카운터에 정식으로 섰다. 미진도 청년의 움직임에 맞춰 주문하기 위해 그의 앞에 섰다. 청년은 미진을 내려보며, 메뉴를 물었고, 그녀는 청년을 올려보며, ‘캐모마일티’ 라고 짧게 답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미진은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여전히 젖어있는 도시의 적막함이 무기력하게 그녀를 짓눌렀다. 미진은 오른뺨을 타고 흐르는 영문 모를 눈물 한 방울을 훔치며 창에서 시선을 거뒀다. 청년은 따듯한 캐모마일 차 담긴 쟁반을 능숙하게 들고, 그녀 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주문하신 캐모마일 차 나왔습니다”

미진은 청년을 한번 올려보더니 미소 짓고, 자연스레 컵을 들어 입을 댔다. 하지만 청년은 그녀 곁에서 쭈뼛거릴 뿐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듯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가 이상했던 미진이 청년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미진은 갑작스러운, 카페 주인의 돌발행동에 어리둥절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봤다. 청년은 몹시 부끄러운 듯, 쭈뼛거리다가 입을 뗐으나, 그때 마침 여고생 무리가 카페 안으로 들어와 저마다 카페 주인을 저마다 ‘오빠’,‘아저씨’,‘점장님’이라고 부르더니, 누구 하나 질세라 마시고 싶은 음료를 떠들어 댔다. 청년은 밀려들어오는 손님들의 주문을 받기 위해 부리나케 카운터로 이동했고, 덩그러니 남은 미진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지켜봤다.


카페 안의 소란은 끊이지 않았다. 활기찬 여고생들은 자리 하나를 차지하곤 깔깔거리며 떠들었고, 그 뒤로 더 들어온 커플도 이야기꽃을 피웠다. 미진은 다시 북적한 카페에 적잖은 위로를 느끼며, 캐모마일 차를 홀짝였다. 카페 주인은 분주히 음료를 만들거나 설거지하기 위해 등을 돌리는 일이 많았다. 미진은 차례대로 학생들, 연인들, 카페 주인을 번갈아 보며, 그들이 만들어가는 영화를 찬찬히 감상했다.


미진이 카페에 앉아 있는 지도 벌써 7시가 넘었다. 카페에는 아까처럼 주인과 미진밖에 없다. 이제 비는 완전히 그쳤는지 어둑해진 밤하늘 사이에 별들이 반씩이고 있었다. 7시 30분에 카페 문이 닫히는 것을 알고 있던 미진은 집에 가기 위해 일어났다. 그러자 카페를 나가려는 미진에게 카페 주인이 소리쳤다.

“저기 잠시만요”

미진이 반쯤 밀어둔 문 앞에 서서 고개만 뒤로 돌린 채 답했다.

“네, 왜 그러시죠?”

미진이 멈칫함을 본 카페 주인은 금세 뛰어와 미진 앞에 서서, 어쩐지 부끄럽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배 안 고프세요? 저녁 한 끼 하실래요?”

청년은 홍당무처럼 빨개진 볼을 애써 감추려 시선을 내렸지만, 오히려 미진에게 잘 보였다. 미진은 청년의 당돌함이 싫지는 않았는지 화답했다.

“저녁이요? 좋죠”

미진의 몇 마디에 청년은 고개를 번쩍 들고, 기쁨을 애써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외쳤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마무리하고 올게요.” 청년의 발길을 돌려, 카운터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까지 바라본 미진은 완전히 밖으로 나가 자신에게 곧 펼쳐질 로맨스 영화를 기대하며, 비 온 뒤 싱그러움에 잠시 취했다.


-끝-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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