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구의 밤
고깃집 간판 속 돼지가 두 발로 선 채로 해맑게 웃고 있다. 간판 속 돼지와 눈을 마주친 태수는 씁쓸히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붉은 바탕에 녹물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낡은 간판은 네온사인마저 온전치 못한 듯 이따금 불꽃을 튀기며, 켜고 꺼지기를 반복했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안개가 깔린 늦여름의 저녁은 평소보다 일찍 다가왔다. 안개 사이로 번지는 간판 속 빨간 네온사인이 경고등처럼 태수를 짓누르자, 그는 손가락으로 담배를 튕기며, 침을 딱 하고 뱉었다. 노랗고 걸쭉한 가래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아직 입가에 남은 분비물을 방금까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으로 훔치고,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그때였다. 태수가 서 있는 건물 앞, 지하 1층 노래방에서 사람이 올라왔다. 한 명은 전신에 문신한 건장한 남자였는데, 생김새가 꼭 조폭 영화에서 부하로 나올법하게 덩치가 좋고, 얼굴이 우락부락했다. 그는 눈을 부라리고, 사냥감을 노리는 곰 마냥,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태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어, 그의 머리 끄트머리만큼만 보일 때, 전봇대 뒤로 몸을 숨겼다. 노래방에서 올라온 덩치는 주변에 태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기지개를 켜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그가 올라왔던 그 계단으로 같은 또래로 보이는 남녀가 섞여 올라왔다. 그들은 주변이 모두 떠나가랄 듯이 떠들며, 욕을 섞어가서 상대를 조롱하고, 놀리고 또 웃었다. 그 덩치도 몸을 돌려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제 태수는 고목처럼 거대하고 우람한 그의 등을 봤다.
태수가 일을 해치운 건 순식간이었다. ‘이 얏’ 이라는 기합과 함께 품에서 20cm의 단도를 꺼내 그의 등허리에 제대로 꽂았다. 상대는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자리에 쓰러졌다. 방금까지 덩치와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무리도 칼에 맞은 자기 동료를 보더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사색이 되어 그곳을 벗어나기에 바빴다. 때마침 거센 비가 내렸다. 태수는 머리를 타고, 얼굴로 쏟아지듯 흐르는 빗물을 손으로 훔치며, 덩치 등에 덜렁 솟아 있는 칼을 망설임 없이 뽑았다. 등에서 칼이 빠지자, 피가 솟구쳤다. 그 피들은 비와 함께, 태수가 가래를 뱉은 하수구로 흘러 들어갔다. 태수도 이제 어디로든 도망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다음이 없었다. 그놈을 찌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건만, 또 다른 헛헛함만이 가슴 속에서 메아리쳤다. 고삐는 풀렸지만, 목적지가 딱히 없는 들소처럼 우두커니 서서 자신이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부터 차근차근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 따위를 줄 리 만무했다. 덩치의 무리 중 누군가가 재빠르게 경찰에 신고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 몇 대가 장대처럼 굵은 빗줄기를 뚫고 그를 포위했다. 딱히, 도망칠 생각이 없었던 태수는 여전히 한 손에 칼을 든 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차에서는 거센 비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경찰 한 명이 답답한 마음에 내려서 태수 쪽으로 소리쳤다. “칼 버리고, 무릎 꿇고, 손들어” 경찰의 지시는 완벽했지만, 빗소리에 묻혀버렸다. 경찰의 말을 듣지 못한 태수는 여전히 그 채로 서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경찰이 차에서 내려 태수 곁에 다가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칼 내리십쇼.” 태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경찰을 슬쩍 바라보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칼을 거리로 던졌다. 경찰들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리고 다들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할 때, 막내가 외쳤다. “태수, 선배님”
어둑한 조사실은 희미한 갓등으로 겨우 사람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는 태수와 달리 앞에 두 형사는 시선을 떨궜다. 그리고 그들 입에서 이따금 나오는 탄식과 한숨 소리가 조용한 조사실을 메웠다. 오른쪽에 있던 형사가 그 옆의 형사 옆구리를 푹 하고 찔렀다. 왼쪽에 앉아 있던 형사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고 태수와 마주했다. 형사가 바라본 태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해 보였다. 형사는 결심이라도 한 듯, 태수에게 물었다. “선배님 어쩌다가….” 그는 호기롭게 말을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그 끝은 옅어 없어졌다. 태수는 눈을 감더니 천천히 말했다. “정의” 두 형사는 다시 탄식했다. 형사가 말했다. “선배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로변에서 형사가 사람을 찌르면 어떡합니까?” 이번에는 다른 형사도 거들었다. “태수야. 정말 왜 그랬니? 그놈을 찌른 이유가 정말 ‘정의’ 때문인 거야?” 격양된 그의 톤에도 태수는 놀라지 않았다. “네, 선배님. 세상에는 없어져야 할 벌레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그저 쓰레기를 치웠을 뿐입니다.” 그 후에도 태수는 자동응답기의 녹음된 목소리처럼 ‘정의’만 외쳤다. 조사실 모두가 지쳤지만, 태수만은 예외였다.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조사실의 시계는 어느덧 새벽 한 시를 가르치고 있었다. 눈덩이가 무거워진 형사들은 태수를 구치소에 넣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밖으로 향했다. 비가 그친 새벽이라 공기는 더없이 맑았다. 올해, 근속 10년 차를 맞이한 진수가 담배를 물고, 후배 형사 민우의 담배에 담뱃불을 붙여주며 말했다. “너, 태수가 그 돼지 놈을 왜 찌른 것 같냐?” “그거야. 그 사건 때문이지 않을까요?” “네가 봐도 그렇지? 그 사건 때문인 거 같지?” “네. 그때도 그놈들이 연루되었었으니까요” 민우가 말한 그 사건이란, 2년 전 있었던 폭력 사건을 말한다. 소위 일진이라 자청하는 고등학생 몇 놈이 동급생 두 명을 무자비하게 폭행해서 종국에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뇌사상태로 아직도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피해자 중, 병상에 누워있는 쪽이 태수가 아끼던 막냇동생이었다. 당시 태수는 누구보다 냉정했다.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하며, ‘아직 어리니 그랬을 수도 있다’라고 나서서 변호까지 해줄 정도였다. 특히, 태수가 열심히 변호하는 아이 중에는 오늘 죽은 그 돼지 놈도 포함이었다. 대한민국의 법은 참 우스웠다. 반성문 몇 장과 악어의 눈물이면 모두가 용서됐다. 그들 중 누구도 제대로 된 처벌 받은 아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태수는 초연했다. 누가 보면, 가장 가까운 가족이 그런 변고를 당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불과 며칠까지만 해도 곧 가족들이 여행을 갈 것 같다며 좋아할 정도였다. 그러니 오늘 동료 형사들이 마주한 칼을 든 태수는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진수가 다 타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자, 민우도 따라 담배를 끄고, 발을 돌려 경찰서로 향했다. 이제 시계는 새벽 1시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진수는 손가락으로 눈구덩이를 푹하고 누르곤, 당직실 기다란 벤치에 벌렁 눕더니 이내 코 고는 소리와 함께 잠에 빠졌다. 민우는 겉옷만 겨우 벗을 채, 진수 옆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돌연 결심이라도 한 듯, 구치소로 향했다. 태수는 구치소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민우가 진수를 내려보며 물었다. “선배님, 혹시 그 일 때문입니까?” 태수는 침착하게 눈을 치켜뜨고 민우를 바라볼 뿐 바로 답하지 않았다. “선배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저희가 조금이라도 선배님을 도울 수 있습니다. 선배님도 경찰이시니까 아시잖아요. 그 일에 대한 복수라면 정상참작이 되고도 남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제대로 얘기해주세요” 민우의 다그침에 드디어 태수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정의를 바로 잡기 위해서 저질렀을 뿐이야.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어.” 민우는 거의 울부짖을 듯한 얼굴을 하고, 태수에게 소리쳤다. “그게 말이 됩니까? 선배님? 제발 진실을 말하고, 살길을 찾자고요, 제발 좀요.” 쇠창살까지 잡아 흔들며 절규하는 민우는 결국 근처에서 졸며 경계를 서던 부하 직원에게 제지당했다. 민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후배 형사에게 놓으라 으름장을 놓고, 다시 태수에게 시선을 던졌다. 태수는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것인지 등을 돌린 채 몸을 구부리고 누웠다. 결국 민우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태수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자신이 존경하던 태수가 머리가 어떻게 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의 진짜 이유를 찾기 위해 그의 자리로 향했다. 이런 일을 미리 준비라도 한 양, 태수의 책상은 서류철 몇 개뿐, 거의 정리되어 있었다. 그 누구보다 바빴기에 늘 지저분하던 그의 책상이 꼭 지금 그의 심경이 마냥 차분히 정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자, 그의 이런 심경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책망했다. 이리저리 책상을 뒤지던 민우는 별 소득이 없었다. 서류철에도 그 당시 사건이 아닌, 며칠 전 배당 받은 사건이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봐도 볼펜 몇 자루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형사의 촉이랄까? 민우는 엉뚱한 곳에서 뜻밖의 수확 올렸다. 태수의 책상 아래 작은 쓰레기통에 큼지막하게 잘린 종이들 사이에서 사망진단서를 찾은 것이다. 민우는 그의 심경 변화가 결국 죽어버린 동생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잘린 종이를 포갠 채 비닐 주머니에 밀봉했다.
다음날, 진수가 민우를 툭툭 쳤다. 그만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그가 겨우 바라본 시곗바늘은 8시 정각에 놓여있었다. 민우는 기지개를 켜고, 자기 전 호주머니에 넣어둔 비닐 주머니를 꺼내 잘린 종이를 보며, 태수의 동기를 다시 한번 확신했다. 9시가 되자 조사실 앞 의자에는 대기 중인 피의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태수도 있었다. 진수가 조용히 태수 옆에 서서 그의 팔을 가볍게 끌었다. 태수는 진수가 이끄는 데로 움직였다. 어제의 상황이 다시 재생되었다. 진수가 사건을 나열하고, 동기를 캐물었다. 다른 사건이었으면, 벌써 끝났을 조사였지만 그들 모두가 태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형량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태수도 이를 알았지만 애써 모른 척 외면했다. 몇 번의 실랑이에도 태수는 고집을 꺾지 않자, 참다못한 진우가 호주머니에서 어제 찾은 사망진단서 조각을 꺼내 태수 앞에 툭 하고 두며 말했다. “선배, 이거 알죠?” 처음으로 태수의 눈빛이 예전의 그로 잠시 돌아왔다. 민우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비닐 주머니를 아예 손으로 들어 태수 눈앞까지 보여줬다. 그 광경에 놀란 진수는 민우를 나무랐지만, 민우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선배, 내가 어제 선배 휴지통에서 찾은 ‘사망진단서’에요. 여기에 보니까 선배의 막냇동생 영훈이라고 적혀있더라고요. 맞죠?” 태수는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흡사 동생의 죽음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한 채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두 팔만 파르르 떨었다. 민우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그를 더 다그쳤다. “선배, 말해보세요. 이게 동기죠? 왜 말을 못 해요? 그까지는 놈 때문에 선배 인생 종 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진수는 곧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는 듯이 민우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히고, 간밤에 부하직원이 찾은 단서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진수의 행동에 잠시 움찔한 민우는 앉은 채로 말을 이었다. “선배, 죽은 동생에 대한 복수였다고 한마디만 해요. 잘하면 5년 이내에 나올 수 있어요. 지금 선배가 진술한 내용은 묻지 마! 살인이랑 다를 게 없어요. 게다가 선배는 형사잖아요. 아니, 형사가 사람을 죽였다는데 어떤 판사가 좋게 보겠어요? 우리 더 이상 힘 빼지 맙시다” 민우가 말을 마치자,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진수도 거들었다. “그래, 태수야 복수였다고 말해라. 오늘 아침에 너 담당할 검사랑 잠시 통화했는데, 안타까워하더라. 이미진 검사 알지? 너도 몇 번 봤잖아. 그 검사가 나한테 신신당부했어. 정황상 복수 같으니까 꼭, 진술 받아오라고 말이야. 야! 막말로 그 독한 검사까지 이렇게 나오는데, 이제 너도 진실을 말할 때가 되지 않았니?” 모두의 말이 끝났음에도 태수의 시선은 멍한 표정으로 사망진단서 조각이 들어있는 비닐 주머니에 고정되어 있었다. 민우는 더 이상 짜증을 숨기지 않고, 맹수가 작은 동물에 그러듯 퍼부을 요량으로 입술을 씰룩거리자, 동시에 태수도 입을 뗐다. “그래, 복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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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 누워 겨우 숨만 붙어있던 동생을 마주한 태수는 그날 세상이 무너졌다. 스스로가 사회 정의를 구현한다며 자부했던 지난날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자기 가족도 지키지 못하는 허울뿐인 오만에 대해 벌을 받고 있노라 생각했다. 태수는 가만히 미동조차 없는 동생에게 약속했다. ‘혹시라도 네가 죽거든, 너를 그렇게 만든 놈들을 절대 용서치 않겠다.’라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가정을 세우고,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첫 번째로 영훈의 상태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태수는 담당 의사에게 찾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제 동생은 어떻게 될까요?” 물론, 태수가 마음을 독하게 먹었을 지라도, 동생의 생환을 누구보다 바랬기에 실낱같은 희망이 있음을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하지만 의사가 전하는 말은 태수의 마지막 희망까지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다. “길어야, 6개월입니다.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태수는 의사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발걸음을 돌리며, 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마음을 벌겋게 태웠다. 그가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태수가 물었다. “그들은 형량을 얼마나 받게 될까요?” 사건을 처음부터 듣던 변호사는 한 명이 죽고, 한 명은 거의 죽어간다는 얘기에 아무리 소년범이라도 5년 이상은 받게 될 거라 말했다. 태수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제가 선처를 해주면 어떻게 될까요?” 이번에 변호사는 태수를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며 답했다. “그러면, 형량이 확 줄 겁니다. 아무래도 피해자 한 명이라도 합의가 된다면 말이죠. 하지만 형량이 얼마나 나올지는 가늠하기 힘드네요.” 태수는 최대 5년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변호사 사무실을 나왔다. 자기 동생은 길면 6개월인데, 그놈들이 5년 동안 감옥에 있다면, 적기에 복수를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신이 나서서 그들을 선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꼭 동생이 고통 속에서 구겨져 맞는 최후를 그놈들도 느끼게 해야만 했다. 태수는 바로 세 번째 행동에 돌입했다. 이미 죽어버린 아이의 유가족을 만나 그놈들에게 선처하자고 설득하는 일이었다. 물론, 태수는 자신의 목적과 의도는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태수가 긴장된 채 죽은 유가족과 대면했는데, 태수가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자신들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며, 하느님의 말씀대로 이미 피해자를 용서했으며, 그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기도하고, 축복하겠다고 말했다. 한술 더 떠 태수에게도 그들을 용서하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다. 태수로서는 일이 수월하게 풀려갔다. 태수는 즉시, 담당 검사와 변호사를 만나 본인은 ‘용서했으며,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싶다.’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리고 그의 전략은 먹혀들어 갔다. 그들은 어리다는 이유와 피해자 가족 모두와 합의가 됐다는 점 그리고 몇 장 반성문이 재판부에 받아들여져, 보호관찰이라는 솜방망이 처분을 받았다. 태수는 이제 동생의 생이 다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철저히 그들을 감시하고 또 감시했다.
벌써 2년 가까이 영훈이 병상에 누워있자, 태수는 다시 그 실낱같은 희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꼭, 영훈이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놈들에게 복수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기 동생만 다시 돌아온다면, 복수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며칠이 더 지나자, 담당 의사가 영훈이 생체신호가 호전되고 있음을 알리며, 기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태수는 영훈이 살아날 것을 확신했다. 동료 형사들에게 ‘곧 가족여행을 갈 것 같다’라는 희망 사항도 떠들어 대고 다녔다. 하지만 그의 기대가 무색하게 영훈은 죽어버렸다. 태수는 기대가 컸던 만큼 그 실망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에 반해 그놈들에 대한 복수심은 그 어떤 날보다 더 타올랐다. 이제 그는 앞뒤를 가릴 필요가 없었다. 바로 실행했다. 우선, 곧 자신은 없어질 테니 자신의 책상을 정리하고, 동생의 죽음을 확정한 사망진단서를 신경질적으로 찢어 버렸다. 그리고 온전히 그의 분노가 향해있는 그놈들 중, 대장인 ‘덩치’를 죽이기 위한 칼을 품고, 며칠간 수색한 끝에 드디어 노래방에 들어가는 그를 발견했다. 태수는 결전의 의지를 다지며, 노래방 앞에서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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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의 죄수복이 퍽 어울리지 않는 태수는 부쩍 수척해진 몰골로 면회실에서 민우와 마주했다. 태수가 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지도 1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선배, 요즘 어때요? 거기서 괴롭히는 애들은 없어요?” 민우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꽤 잘 살고 있어. 매번 이렇게 안 찾아와도 돼.” 민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오늘 영훈이 기일이잖아요? 그래서 찾아왔어요. 그리고 새로운 소식도 있어요” 태수는 자신을 위해 마음 쓰는 민우가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무슨 소식인데?” “그때, 그 사건이 선배님 때문에 다시 조명된 건 아시죠?. 제가 그놈들 어떻게 사는지 추적 관찰했는데, 그중 몇 놈은 사회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고, 나머지 놈들은 거의 폐인처럼 지내더라고요. 인생이 끝난 거죠. 어때요? 속이 좀 시원하세요?” 민우는 밝게 웃는 태수를 상상하며, 자신이 확인한 일들을 신나게 말했지만, 그는 어떠한 감정 표현 없이 우중충한 면회실 천장만 바라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