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강남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살인범 윤모씨의 신상을 금일 신상위원회가 드디어 공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올해 만 34살인 윤모씨는 대학까지 나와 변변찮은 직장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나는 TV를 유심히 봤다. 분명 아는 사람이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목구비가 낯이 익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살인범의 사진을 다시 한 번 검색했다.
‘확실히 낯은 익는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나네...’
그때, 친구 태수에게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어, 잘 지냈냐?
“어 태수야, 어쩐 일이야?”
-너 지금 TV보냐?
“응 방금까지 휴게실에서 TV좀 보다가 방금 일하러 자리에 앉았어. TV는 왜?”
-오늘 살인범 뉴스 나온 거 봤어?
“그렇지 않아도 얼굴이 되게 낯이 익더라,, 너도 그래서 전화했어?”
-너 누군지 몰라보겠어? 걔 우리 고등학교 동창이잖아. 심지어 너랑 짝도 했었는데? 기억 안나?
“뭐? 그게 정말이야? 나 정말 기억 안 났어 언제?”
-그게 아마 고1때? 나는 니 생각부터 나서 전화했구만, 충격 받았을 까봐, 힘 빠지네
“일단, 알겠다. 내가 퇴근하면서 전화할게”
-그래 그렇게 해
이제 기억이 났다. 윤창수.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볼 때 마다 싸움 좀 하는 애들한테 맞기만 한 친구, 화면 속 살인범 윤모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와는 별로 접점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랬을까? 아마 내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퇴근 후, 기억을 더듬으며 책상 앞에 앉아 고등학생 때의 추억을 하나씩 되짚기 위해 고1 때 일기와 졸업앨범을 펼쳐 창수의 흔적을 쫒았다.
「오늘은 체육대회 날이었다.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친구들과 맛있는 도시락도 먹고, 그런데 내 짝은 체육대회인 걸 몰랐을까?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학교를 왔다. 이 놈은 생각은 있는 걸까? 창수가 하도 딱 해보여, 옆이 찢어져서 버리려고 가져온 추리닝을 입으라고 주었다.」
「오늘 옆에 짝의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이 놈 어제 양수(반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는 애)랑 실수로 부딪친 후, 어디로 끌려가더니 아마 엄청나게 맞은 모양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가방에 있는 대일밴드랑 후시딘을 주었다」
「오늘 드디어 짝이 바뀌었다. 창수는 참 답답한 놈이었는데, 이제는 친한 태수랑 짝이 되었다. 너무 기쁘다」
나는 과거 일기에서 창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딱히, 특별할 것은 없는 내용이라 창수에 대한 순박하고 어리숙했던 이미지 만 더 확고히 하는 정도로 만족해야했다. 별 소득 없는 일기장을 뒤로한 채 이번에는 졸업앨범을 열었다. 졸업할 당시 창수는 5반 나는 2반이었나 보다. 졸업앨범 속 창수는 어두움 그 자체였다. 3년 동안 그가 당했을 학교폭력이 어땠을지 대충 예상되었다. 그런데, 졸업식 앨범 사이에 창수와 내가 둘이 찍은 사진이 있다. 아마, 1학년 때 인연으로 같이 찍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사진 속 창수는 밝게 웃고 있다.
창수 사진을 바라보며 안쓰러움과 놀라운 감정이 뒤섞일 쯤 다시 태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끝나고 전화한다며
“아, 미안 잠깐 볼일이 있어서 깜빡했다”
-야, 내일 우리 동창회 하기로 했어. 한 20명 나올 것 같다.
“갑자기 뭔 동창회?”
-오늘 뉴스 때문에 애들이 서로서로 연락한거야, 웃기지 않냐? 너도 와 오랜만에 너 보고싶다는 애들도 많아
“일단 알겠다. 장소랑 시간 문자로 좀 찍어줘”
-그래 쉬어라-
태수와 통화를 마치고, ‘친구의 불행이 우리의 새로운 만남이 될 수 있을까?‘ 에 대하여 잠시 생각했다. 창수는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 것일까?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봐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어떤 식으로든 살인범인 친구를 옹호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의 과거까지 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우리가 조금 더 그 친구에게 관심을 가지고 따듯하게 대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내일 동창회는 처음 몇 분을 제외하고는 창수를 잊어버린 채, 먹고 마시고 다들 취해서 똑같은 소리하고, 싸우고, 또 눈도 맞는 재밌는 동창회가 될 예정이다. 미리 내일을 예단하니 씁쓸하다. 하지만 나 역시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을 볼 생각에 설레기는 한다. 복잡한 머리를 쉬게 할 겸,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며, 잠이 든다.
꿈속에 창수가 나왔다. 어렴풋 고등학생 때의 조금 어리숙하지만 순수한 창수의 모습이다. 절대 살인 같은 것을 저지를 배짱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창수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그리고 내게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