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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를 확인해보니 남편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지난 밤, 퇴근길에 전화한 것 같았다.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뒤늦게 보내는 안부 인사였다. 밥 잘 챙겨먹어.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한때 남편과 나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에 대해 갈등을 겪었다. 아마도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된 계기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싶다. 결혼하기 전부터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누누이 말했는데, 신혼 생활 일 년 차에 접어들자 남편은 은근한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 명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남편은 지인의 돌잔치에 다녀오거나 친구들의 메신저에 아이 사진들이 올라올 때마다 중얼거렸다. 그럴 때면 나는 왜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다. 자신이 없어. 부모님의 이혼과 혼자 남게 된 엄마의 히스테리를 감내했던 시절을 거쳐 결국 이런 말로 끝을 맺었을 때 남편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약간의 침묵이 이어지다 끝내 이해한다고 했다. 그럼 나는 무엇을 얼마나 이해하냐고, 나에게 아이 낳자는 것이 얼마나 폭력인지를 아느냐고 따져 물었다. 내 말은 점점 날카워져서 이내 당신처럼 행복한 가정에서 산 사람들은 모른다는 식으로 나아갔다. 남편은 연애 시절,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추궁 당하거나 그 흔한 부부 싸움조차 목격한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했다. 무던함과 여유로운 성격이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면 나는 불행한가? 스스로에게 되물었을 때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아빠의 빈자리라던가 이혼 가정이라던가 하는 낙인은 예전에 지나가버리고 없었다. 중고등학교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만나 가정환경으로 인한 차별을 당하지 않았다.
다만 덕산 아파트. 엄마를 그토록 슬프게 만든 덕산 아파트에 대한 갑갑증이 있었다. 이혼하고 이사 온 곳이라 그랬을 지도, 혹은 평수가 반으로 줄어 네 개였던 방이 두 개로 줄어 단출해진 살림 때문일지도 몰랐다. 엄마는 용케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따서 근처 정형외과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가끔 이곳을 찾아왔다. 엄마 몰래 햄버거나 피자, 돈가스를 파는 식당에 나를 데려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아예 오지 않았는데 그맘때쯤 아빠에 대한 험담에는 여자란 말이 추가되었다. 엄마는 여자라는 단어를 때론 냉소적으로, 때론 욕설과 함께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나는 밤마다 변기에 앉아 여자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여자의 얼굴, 몸매, 성격, 목소리 따위를 상상하다가 여자라는 단어 자체가 나를 괴롭게 했다.
아빠의 재혼 소식을 들은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있었을 때였다. 공용 부엌에서 카레를 전자레인지에 데우려던 참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아빠 결혼한다. 응, 축하해. 계좌번호 남겨놔, 용돈 줄게. 그래, 고마워. 또 연락하마. 이런 대화들이 오가는 데에는 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카레도 삼 분은 걸리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아빠가 송금한 용돈을 그대로 엄마에게 주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이라고 둘러댔지만 엄마 또한 눈치 챘을 것이었다. 그날은 카레를 반 이상 남기고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남자애를 불러내 밤새 술을 마셨다. 엄마가 불쌍했고 아빠가 재수 없었고 그 여자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두가 불행하길 바라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내가 엄마의 목소리와 말투, 때론 어느 문장까지도 똑같이 따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몸 안에서 엄마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