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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은 Oct 31. 2024

덕산 아파트

(5)

종합병원은 다른 지역구인 K시에 있었다. 고가도로를 타고 이십분만 가면 되었다. 물론 버스를 타면 더 오래 걸렸지만 아주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의사는 일주일 치 약을 먹고 경과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 진행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젊은 축에 속하니까 호전될 가능성이 높지 않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단정 짓기 어렵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일층 로비로 향했다. 엄마가 일일 보조 바리스타가 되어 세 시간정도 일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갈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엄마는 약간 긴장한 듯했다. 보조 바리스타는 엄마를 포함해 네 명이나 되었다. 원래 일하는 직원들과 함께 하다 보니 손님보다 직원이 더 많았다. 카페 앞에는 ‘알츠하이머 및 우울증 환자와 함께 하는 따뜻한 동행’이라 적힌 표지판이 있었다. 나는 구석진 테이블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평일 오전이었지만 병원 로비에는 직원들과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엄마는 열심히 테이블을 정리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구웠다. 실수를 해도 괜찮았으며 휘핑 모양이 예쁘게 나오면 좋아했다. 스콘이나 베이글 같은 베이커리 종류는 모두 냉동이었고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되었다. 엄마는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에게 커피나 빵을 서빙했다. 주문하는 손님들에게는 커피 맛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물리치료사를 비롯한 온갖 서비스업 경력이 빛을 발했다. 반평생을 일만 해온 엄마였는데 정작 일하는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불현듯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랐다. 낡아빠진 덕산 아파트의 모든 것들에 대해 시시콜콜 말하고 험담 아닌 험담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남편은 특유의 묵묵함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언제까지나 내 감정을 앞세울 수만은 없었다. 

엄마가 따뜻한 초코우유를 한 잔 가져왔다. 

“이거 내가 만든 거다. 바리스타 선생님이 나 보고 소질 있대.”

 엄마가 자랑하듯 말했다. 초코 시럽이 뿌려진 휘핑크림을 한입 먹었다. 부드럽고 폭신하고 달콤했다. 맛있다는 내 말에 엄마가 조금만 먹어, 이 다 썩는다, 라고 덧붙였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깊이 잠들었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뒤척였다. 소리가 나지 않게 안방 문을 닫았다. 집 안에 있는 뾰족하거나 깨지기 쉬운 물건들, 칼이나 가위, 도자기 같은 것들을 숨기거나 옮겼다. 거울도 화장실을 제외한 곳은 가리거나 떼어냈다. 베란다 창도 꼭꼭 닫았다. 이 집 안에서 위험한 것들은 최대한 피했다. 한참을 버리고 쓸고 닦았다. 

오후 햇살이 거실 한 가운데를 가로질렀다. 갑작스런 허기가 느껴졌다. 햄과 두부와 콩나물을 넣고 라면을 끓였다. 만두를 굽고 밥도 한 공기 넘치게 담았다. 요리용으로 사둔 소주를 꺼냈다. 숨도 쉬지 않고 먹었다. 그리고 게워냈다. 소파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깨어나면 이 모든 일들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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