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 네 번째 연재
1985년 가을 이후, 우리는 도진이가 꼭꼭 숨겨놓은 로맨스 소설을 호시탐탐 노렸지만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시간과 함께 그녀의 소설에 대한 호기심은 점차 시들어갔다.
고3 여름방학, 도진이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부모님께서 여행을 가신다며 자신의 집에 모여 영화도 보고 밥도 해 먹으며 놀자는 제안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 우리들 머릿속에 똑같은 알람이 울렸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고 싶어 안달이 난 그녀의 로맨스 소설이 봉인해제 될 날이 온 것이다. 그것도 1박 2일의 긴 시간이라니 실패할 턱이 없는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전략은 이러했다. 친구 둘이 밥을 하는 동안 내가 그녀와 함께 비디오 대여점을 가고 그 사이 나머지 친구들이 노트의 행방을 찾는 계획이었다.
도진과 나는 집 근처 비디오 대여점으로 향했다. 그녀와 나의 임무는 19금 영화를 대여해 가는 것이다. 한국영화들은 어째 제목부터 야하다. 성인물의 냄새가 대놓고 나다 보니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우리는 영화 '소금장수'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여차하면 주인이 나이를 물을까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야해서 나이 물어보면 어쩌지?”
“그럼 좀 덜 야한 거 찾아보자”
이번엔 영화 ‘차탈레 부인의 사랑’ 앞에 멈췄다.
도진이가 굳이 큰 소리로 묻는다.
“야! 이거 책도 있는데 너 읽어봤냐?”
“책은 명작이잖아. 영화도 있네? 한번 볼까?”
궁색한 변명 덕에 한편 당첨이다. 다른 한편을 고르던 중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쥴리에트 비노쉬’가 출연한 영화가 눈에 띄었다. 영화‘프라하의 봄’이었다.
훗날 알게 됐지만 영화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이 원작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이 소설을 30대가 훌쩍 지나서야 읽게 됐는데, 어릴 때 영화에서 느꼈던 주인공의 불명료한 감정을 성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빈 공간이 채워지 듯 그동안 읽어 내지 못한 영화 읽기가 드디어 완결된 기분이 들었다.
까마득히 멀어진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10대 시절, 친구 집에서의 소란했던 하루가 떠오르고, 젊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매력적인 모습이 떠올라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일렁였다.
‘차탈레 부인의 사랑’부터 보기로 했다. 주연 배우인 ‘실비아 크리스털’이 나오는 장면에선 화면에 형광등을 갖다 댄 듯 빛이 났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작위적인 장면들이 많아 에로 장르가 아닌 코미디 장르처럼 우리는 쉴 새 없이 웃었다. 남자가 상의를 벗고 장작을 팰 때 그 모습을 몰래 숨어 지켜보던 여자의 눈에 힘이 풀리고 입술을 살짝 벌리는 장면에서 유난히 웃음소리가 컸다. 과장된 웃음은 사실 멋쩍어서였을 것이다. 오히려 영화‘프라하의 봄’이 예상 밖으로 더 에로틱했다. 그것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영화에 빠져 들었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씁쓸한 결말에 모두 숙연했다.
우리 모두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성신이 되었다. 그 후,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아카데미 3회 수상자가 되었다. 그의 이름이 후보에 오를 때마다 그의 수상을 기원했다. 그의 최근작 ‘펜텀 스레드’는 내가 뽑은 200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이다.
나는 일찌감치 영화광이 되었다.
6살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어두컴컴한 극장에 발을 들인 후부터 영화라는 세계는 무한정 드나들고 싶은 세상이 되었다. 어른들 머리 사이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 얼룩무늬 팬티만 입은 채 나무 위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흑백 영상이지만 한눈에 봐도 그는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서양인이었다. 생애 처음 극장에서 만난 스크린 속의 캐릭터는 ‘타잔’이었다.
9살 무렵, 등굣길의 벽면을 채웠던 영화 포스터에 미혹되어 영화라는 세상에 대한 동경은 더욱 커져갔다. 그때부터 나의 상상 속 무대는 더 이상 동화가 아닌 서양 영화 포스터 속 어딘가였다. 삼양동의 달동네에서 미아사거리에 위치한 학교까지의 긴 여정이 어린 나에게는 그저 신나는 모험길이었다. 각기 다른 냄새와 모양의 굽이치는 골목들을 걷다 보면 회색시멘트 벽면을 장식한 영화 포스터를 만나게 된다. 강렬한 색채를 뒤집어쓴 배우들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곤 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처음엔 예쁘다 못생겼다 로 시작하고 포스터 속의 글씨를 눈으로 천천히 훑는다.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대부분이다.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포스터의 주인공은 배우 ‘리처드 기어’였다. 오래전 기억이라 영화제목이 흐릿하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였던 것 같다. 매일아침 그의 회색 눈동자를 가득 품고 등교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시골 이모네 아랫목에 누워 그의 얼굴을 허공에 그려 놓았었다.
아마도 내 첫사랑은 리처드 기어가 아니었을까.
엄마도 그렇지만 함께 살던 이모들도 감성이 풍부한 탓에 집에는 늘 음악이 흘렀다. 주말의 영화프로 시간에는 모두 함께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영화 감상을 했다. 책장에는 책들 뿐 아니라 가요, 클래식, 팝, 그리고 해외 영화 OST LP 전집이 있었다. LP와 함께 영화를 소개하는 큰 책이 부록이었는데 영화에 대한 기본 소개와 줄거리, 스틸 컷 서너 장이 소개되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했다. 나에게 그 책은 최고의 놀이터이자 다른 세상으로의 통로였다.
흑백 사진 두세 컷 만으로도 사진 속 배우들의 표정은 어느새 아이의 마음을 영화의 세계로 빨아들였다.
지금 봐도 60,70년대 배우들은 매력적이다.
남자 배우 중에는 ‘알렝 들롱’ ‘스티브 맥퀸’ ‘폴 뉴먼’ ‘몽고메리 클리프트’ '율 브리너'를, 여자 배우는 ‘나탈리 우드’와 ‘엘리자벳 테일러’ ‘지나 롤로브리지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를 특히 좋아했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미남이 아닌 ‘길’의 앤서니 퀸과 ‘졸업’의 더스틴 호프만의 영화는 어쩐지 보고 싶지 않았다. 훗날 ‘길’을 보고는 눈물 콧물 흘리며 주인공 '잠파노'와 '젤소미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책으로만 접하던 영화를 훗날 운 좋게 텔레비전에서 보기라도 하면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오로지 나와 영화만이 세상에 존재하듯 빠져들었다.
‘제임스 딘’이 출연한 ‘에덴의 동쪽’과 ‘자이언트’는 TV에서 방영할 때마다 거르지 않고 본 영화다. 볼 때마다 콧마루가 시큰했다. 제임스 딘은 태어날 때부터 어둡고 고독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비극적 죽음은 유령처럼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젊은이의 양지’와 ‘애정이 꽃피는 나무’ ‘지난여름 갑자기’를 특히 좋아했는데, 두 영화 모두 ‘엘리자벳 테일러’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주연이다. 세기의 듀오인 두 배우가 실제 연인이길 바랐지만 실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배우 몽고메리의 전매특허인 불안하면서도 공허한 눈빛에 빠져 아주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었다. 어릴 때부터 남자 보는 눈이 확고했다.
몽고메리와 장국영, 두 배우는 나의 이상형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가장 실감하는 부분이 아마
배우자일 것이다. 결혼식 때 신랑이 트로트가수 닮았다는 이야기를 꽤 들었다. 그도 한때 의문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이상형은 전지현, 모니카 벨루치였는데..'
영화 ‘길’과 ‘부베의 연인’‘엘비라 마디간’그리고 '태양은 가득히'의 OST를 자주 듣곤 했다. 주인공의 처연한 사랑과 불행한 결말 때문에 가족들 몰래 눈물 훔치며 본 영화들이다. 아름다운 OST가 애처로운 마음을 더하는 바람에 LP를 무한 재생하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LP들은 얼마 못 가 튕김 현상이 나더니 하나, 둘 폐기물이 되어갔다.
La Strada ... Nino Rota (영화 '길' OST)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 ... Mozart(영화 엘비라 마디간 OST)
plein Soleil ... Nino Rota (영화 '태양은 가득히 OST)
Up where we belong ... Joe Cocker & Jennifer Warnes(영화 '사관과 신사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