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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서 영화와 사랑에 빠졌을까 2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 다섯 번째 연재

by 레인송

영화와 음악은 인생 대부분을 함께 지낸 동지다.

단 한 번도 빠트리거나 외면하거나 시시해 본 적이 없다. 영화 속 세계로 들어가면 평화로웠다.

언젠가부터 나는 영화가 가고자 하는 지향점에 발맞추지 못하고 영화의 지난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머물러있다.


영화도 패션이나 기호품처럼 유행을 탔다. 영화의 역사도 인류의 역사처럼 쉼 없이 생성하고 소멸하고 융합하며 존재한다. 언제부턴가 영화 속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고 로맨스도 변하고 영화적 언어도 변해갔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여전히 두세 시간이지만 이야기의 속도는 전보다 훨씬 빠르고 영화가 끝나고 난 후의 남겨진 이야기는 더욱 빠르게 소멸하고 만다. 자가 복제를 무한 반복하는 영화들도 많고, 관객은 그런 영화를 반복해서 소비한다. 기술은 지금보다 뒤지지만 명작이라 불릴만한 영화가 매해 수십 편 탄생했었다. 그리고 대중들은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열광했다. 영화가 끝났어도 이내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드는 매혹적인 여운의 영화들과 그 여운을 잊지 못해 두고두고 영화 읽기에 몇 날 며칠을 보내던 사람들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만 같아 유감스럽다.





1990년대는 한국에 예술영화 붐이 일어난 때다. ‘코아아트홀’ ‘동숭아트센터’ ‘이화예술극장’과 ‘뤼미에르극장’등 예술영화 전용관은 주말마다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올리브나무 사이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희생',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언더그라운드' 레오 까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이 지금 개봉한다면 그 시절처럼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수입하려는 배급사 자체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이 화려한 눈요기 거리가 없어도 예술성과 독창성만으로도 관객들이 극장을 찾고 환호하던 시대였다. 심지어 '퐁네프의 연인'은 유독 한국에서만 관객수가 20만을 넘었다. 90년대는 그야말로 시네필의 시대였다. 시대적인 변화야 어쩔 수가 없다지만 영화를 그저 소비와 유흥에 그치는 일이 아쉽다.


딸과 함께 영화관을 자주 찾는다.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영화들은 얼마 안 가 OTT를 통해 집에서 싸고 편하게 볼 수 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극장으로 간다. 언젠가 나의 딸도 '시네마 천국' 토토의 눈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 엄마처럼.

97회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아노라'의 션 베이커 감독의 수상 소감이 내 마음을 세게 내리쳤다.

"우리는 어디에서 영화와 사랑에 빠졌을까요? 바로 영화관에서 입니다"

어두컴컴한 극장, 스크린 앞에 앉아 고대하는 영화를 기다리는 순간의 환상적인 경험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어젯밤, 나처럼 영화광인 친구 주연이와 긴 통화 끝에 별거 아니지만 설레는 계획을 세웠다.

우리 집에서 밤새 영화를 보기로 말이다. 친구에게 물었다. 그날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냐고. 친구는 생각만 해도 설렌다고 했다.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것, 그것이 영화다. 20대 초반, 그녀와 함께 시네필이 되기 위한 여정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깝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때 쌓인 열정이 지금까지 남아 여전히 내 삶의 동력으로 남아있다.


그녀와 나는 심야 라디오프로였던 ‘정 은임의 FM영화음악’의 애청자인 동시에 영화 읽기의 선봉장이었던 아름다운 영화 잡지 ‘키노’의 열혈 구독자였다. 물론 영화 평론가이자 '키노' 편집장인 정 성일 님의 신도이기도 했다. 주연이와 나는 오래 나눈 우정, 그 안에서도 영화에 대한 추억이 많다. 영화 학도의 꿈을 갖고 크고 작은 시네마떼끄를 열심히도 찾아다녔었다.


호기롭게 찾아간 영화 학교 ‘문화학교서울’에서 영화 고수들을 만난 후 의기 소침해하며 우리만의 노선을 걷자고 다짐한 한겨울 사당동의 우리.

겨울밤의 거친 눈보라를 헤집고 약도 한 장 들고 찾아간 시네마테크'OFIA'에서 처음으로 접한 퀴어 영화를 보고 멋쩍은 웃음과 함께 다시 눈 폭풍 속으로 뛰어든 신촌 에서의 우리.

검열 문제로 국내 개봉이 미뤄진 영화 ‘춘광사설’을 무자막, 무삭제로 상영한다는 소식에 회사까지 조퇴하고 한걸음에 달려가 맨 앞줄에서 피아졸라의 탱고와 장국영, 양조위의 열연에 무아지경 빠졌던 여의도 어딘가 에서의 우리.

고대하던 영화 ‘천국보다 낯선’을 보고 헛웃음만 남긴 채 극장을 나서며 씨네필의 길이 아직 멀리 있음을 실감한 혜화동 밤거리의 우리.


우리는 그 시절을 함께 추억하며 지금의 고단함을 위로한다. 그녀가 어떤 영화를 선택할지 궁금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주연이와의 마지막 극장 데이트는 2002년 12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였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코아아트홀에서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못내 허전한 기분을 달래듯 한참 동안 가을밤을 밟았다. 어딘가 쓸쓸하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던 까닭은 여주인공의 처연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제 30대가 되었고,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미묘한 긴장감이 우리를 에워쌌다.


우리가 드나들던 예술영화 전용관은 하나 둘 사라졌다. ‘코아아트홀’은 우리가 방문했던 그날로부터 2년 후인 2004년 영업을 종료했다.

우리의 아지트였던 극장들이 사라지는 줄도 모른 채 우리는 진짜 어른의 삶을 맹렬히 쫒고 있었다.


모험과 환상의 나라에 너무 오래 머문 탓일까.

현실 안에서 우리는 늘 서툴렀다.

영화와 현실이 뒤바뀐 듯 말이다.


Never Ending Story ... Limahl

Ragazza Di Bube ... 영화 부베의 연인 OST

The Lady in Red … Chris De Burgh

Creep … Radio Head

A Lover's Concerto ... Sarah Bau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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