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 여섯 번째 연재
1984년 봄 소풍의 주인공은 단연코 마이클 잭슨이었다.
소풍지인 동구릉, 옛 선왕의 무덤 앞에서 중학교 1학년 소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마이클 잭슨의 춤을 연습하고 왔거나 그냥 왔거나. 나를 포함한 각반의 대표 춤꾼들이 조선 왕조의 창업 군주이신 태조 이성계의 무덤 앞에서 미국 가수의 노래에 맞춰 불순하게도 요란하게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안타깝게도 그날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까만 청바지에 하얀 셔츠, 검정 재킷과 하얀 장갑, 거기다 화룡점정인 까만 레이밴 썬글레스까지 장착한 서윤이가 그날의 주인공이었음을 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녀는 철저히 준비된 봄소풍의 스타였다.
그녀는 한 달 전에 전학을 왔다. 구부정한 상체에 건들거리며 뒤뚱이는 걸음걸이가 꼭 사내 녀석 같았다. 순식간에 나의 인기가 위협받고 말았으니 그 친구가 못 마땅한 게 당연했다. 더욱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그녀 또한 ‘DURAN DURAN’의 팬이라는 사실이다. 봄 소풍의 왕좌는 내주었지만 나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가을 체육 대회였다. 나는 체육 대회 전 종목에 출전할 정도로 운동을 잘했고 단체 아닌 개인 종목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정 반대였다. 달리기는 뒤뚱거리느라 꼴찌 하기 일쑤였고 체육 대회에는 단 한 종목도 참여하지 않았다. 체육시간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보건실을 드나들던 이유가 있었다.
봄 소풍과 체육대회의 여파도 차츰 식어갈 즈음, 어느 날 책상 서랍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서윤이가 두고 간 것이다. 방과 후 삼익아파트 상가 옥상으로 와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한 판 뜨자는 건가, 내심 긴장했지만 센 척은 해야겠어서 흔쾌히 OK라는 답장을 건넸다. 해가 뜨겁게 이글거리는 9월이었다. 초록색 옥상에 얼핏 보면 사내 녀석 같은 소녀 셋이 벽돌만 한 카세트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쪼그려 앉아 음악을 듣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F.R David의 ‘Words’였다. 그해 여름 내내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던 국민 팝송이었다.
‘음악 수준 하고는…’
그 시절, 나는 남들이 좋다고 하면 혼자 싫다 하고, 남들이 그렇다 할 때 나 혼자 아니라고 우기는 삐딱한 멋에 도취했었다. 겉멋이 잔뜩 든 터였다. 나를 보자고 했던 용무는 이러했다. 자신이 주최하는 일일 찻집에 와주길 바란다는 것. 평소에 유흥 장소는 기피했지만 이렇게 까지 청하는데 안 갈 수가 없었다. 다방을 빌려 일일 찻집을 운영하는 게 당시 좀 논다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
카페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의 다방은 대부분 지하에 있었고 나이 든 아줌마들이 주로 주인이었다. 의자는 모노톤의 꽃무늬 천 소파 거나 싸구려 레자가 덧씌운 원목 의자였다. 테이블에는 재떨이가 데코처럼 놓여있었다. 커피도 지금처럼 원두가 아닌 맥심과 맥스웰 같은 인스턴트커피였다. 다방에서 파는 고급 커피는 ‘뷔엔나 커피’와 ‘카푸치노’가 전부였다. 어쩌다 엄마나 이모를 따라 다방에 가는 일이라도 생기면 그날은 계 타는 날이었다. 달콤한 코코아를 마시는 일이 일 년에 고작 서너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다. 기억 속 코코아의 첫맛은 쌍쌍바 녹인 맛이었다. 80년대 말, 드디어 커피 전문점인 ‘Jardin’이 생기면서 비로소 진짜 코코아 맛을 알게 되었다. 인스턴트 핫초코와는 확연히 다른 맛이다. 다방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쌍쌍바를 비하하는 것도 아니다. 쌍쌍바는 지금도 즐겨 먹는 아이스바이다. 일타쌍피의 땡잡은 기분을 주는 유일한 아이스바 아니던가.
일일 찻집은 예상대로 허접했다. 명일동 인근에 중, 고등학교가 많다 보니 방문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차 한잔 손에 들고 삼삼오오 모여 서너 시간 노닥거리다 가거나, 남학생 한패와 여학생무리가 눈이 맞아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남는 장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윤이는 이렇게 인맥을 넓히는 거라며 흡족해했다. 그날 이후 우린 제법 친해졌고 서로의 친구들과도 종종 함께 어울렸다. 나 역시 짧은 머리와 여성스럽지 않은 행실 탓에 남학생 아니냐는 소리를 자주 듣곤 했지만 그녀 역시 커서 시집은 가려나 싶을 정도로 보이쉬한 친구였다.
어느 날, 서윤이가 결석을 했다. 누군가 집에 전화를 걸어 물으니 아프다며 병문안을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서 보니 병명은 생리통이었다. 사내 녀석의 허물을 해가지고선 생리통으로 결석 이라니. 서윤이는 예쁘지는 않지만 피부가 뽀얗고 단정한 얼굴이다. 아파서인지 그날따라 피부가 유난히 창백한 그녀가 다 죽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너 듀란듀란 노래 중 무슨 곡이 제일 좋아?”
“RIO!”
“어! 나도 그런데”
중학교 생활의 절반이 지날 무렵, 그녀는 머리에 예쁜 머리띠도 하고 가끔 치마도 입는 소녀가 되어있었다. 여전히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롤러장에 매일 출근하는 그녀를 보며 어쩐지 동지를 잃은 것처럼 서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머리를 기르거나 치마를 입지 않았다.
어릴 때처럼 선머슴인체로 성인이 되기로 결심했으니까.
1985년, 가을 소풍의 주인공은 단연코 우리 7명이었다. 각자 좋아하는 팝 가수의 스타일을 모방 한 채 소풍을 갔다. 나는 평소 존 테일러가 즐겨 입는 스타일로 쟈켓 소매를 걷고, 후들거리는 바지와 흰 앵클부츠를 신었다. 헤어스타일은 다르지만 사진 속 그처럼 머리카락 끝에 노란 물감을 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감이 부서지는 바람에 옷과 얼굴이 온통 노란 가루 투성이었다. 경혜는 마돈나처럼 찢어진 레깅스 위에 짧은 치마를 입고 과감하게 배꼽티를 입었다. ‘Like a Virgin'의 마돈나 헤어 스타일 따라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얹었다. 현란하기 짝이 없었다. 마돈나 못지않게 눈에 띄는 스타는 현경이었다. Culture Club의 보컬 ‘Boy George'의 팬인 그녀는 화장까지 똑같이 하고 오는 바람에 선생님들 눈을 피해 다니느라 소풍 내내 김밥 한 줄 맘 편히 먹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영화배우 분장을 한 친구는 단단한 체형의 수현이었다. 자신의 신체적 조건을 십분 살려 홍 금보가 되어 나타났다. 홍 금보처럼 바가지 머리는 아니었지만 딱 붙는 상하의 노란색 운동복이 그녀와 찰떡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서 보니 그녀는 영화 '킬빌'의 주인공 '블랙 맘바‘의 의상과 매우 유사했다. 노란 운동복을 입은 여자 무사의 효시는 내 친구 수현이었다. 우리는 다른 반에까지 불려 다니며 사진 요청을 받았다. 학생주임 투투는 마주칠 때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아래위를 훑으며 혀를 찰뿐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그 시절 소풍의 모습은 흥이 많은 민족답게 수건 돌리기로 시작해서 춤으로 끝이 났다. 80년대는 확실히 팝이 우위였다. 간간이 가요가 들리기는 했지만 대부분 팝송에 맞춰 춤을 췄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춤이 나올 수 없는 비트의 노래에도 용하게 춤을 만들어냈다. 요즘처럼 120~150 BPM의 빠른 곡에 익숙한 사람들은 80년대 노래에 맞춰 춤을 추라고 하면 매우 난감할 것이다. 1985년의 소풍을 주름잡은 댄스곡은 신디 로퍼 vs 마돈나의 대결 구도였다. 한쪽에서는 신디로퍼의 ’She Bop’이 또 한쪽에선 마돈나의 ‘Like a Virgin’이 창경궁에 울려 퍼졌다.
중학교 3학년 소풍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보니엠의 ‘Happy Song'이었다. 다른 노래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어린이 대공원에서 5시간 내리 ’Happy Song'을 돌림노래로 듣다시피 했다. 그 시절은 딱히 춤이랄 것도 없었다. 용감하게 앞으로 나와 열정적으로 음악에 온몸을 맡긴 채 흔들어 대면 그만이었고 그 모습을 보며 다른 친구들은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다. 정해진 안무 없이 그저 리듬을 타면 바로 춤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학교 안, 밖으로 민주적 인권과 도덕적 윤리는 볼품없는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어 열과 성의를 다해 애정을 퍼부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랑은 있었지만 1980년대를 지켜낸 어린 소녀들의 사랑은 특히 고귀하다. 추운 겨울 눈 속을 뚫고 꽃을 피운 에델바이스처럼 우리는 끝내 뜨겁고 순결한 행복을 찾아냈으니 말이다.
감히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 문화의 르네상스는 1980년대였다고.
All the love in the World … The Outfield
Beat It … Michael Jackson
It' Raining Again … Supertramp
I Want you Want me … Cheap Tr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