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 일곱 번째 연재
‘듀란듀란’은 명실공히 나의 첫사랑이다.
남대문에서 옷가게를 운영하시는 엄마는 매달 ‘논노’ ‘캔캠’ ‘모어’ 같은 일본 패션 잡지들을 집에 들고 오셨다. 방바닥에서 뒹굴며 잡지를 보는 일이 우리 자매에게는 놀이나 마찬가지였다. 패션 화보가 주였지만 뒷부분에는 문화면도 제법 크게 다루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유럽은 신스팝이 대세였다. MTV의 영향으로 가수들은 뮤직비디오 제작이 필수였고 그 때문인지 가수들은 장르 구분 없이 화려한 외모를 내세우고 있었다. 유럽을 추종하는 일본 역시 영국과 독일의 신스팝 가수들에게 열광했고, 잡지에는 온통 짙은 화장에 긴 머리, 몸에 꼭 끼는 옷을 걸친 남자 가수들 일색이었다. ‘데이비드 보위’ ‘록시 뮤직’ '아담 앤트'등 글램록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마치 황미나 만화의 주인공 ‘쥬델’과 ‘레니비에’ 같았다. 여자보다 예쁜 가수들이 잡지 속에서 내 눈을 홀리고 있다. 아는 가수도 들어본 노래도 거의 없지만 외모만으로도 매료되기 충분했다.
단연코 눈에 띄는 그룹이 듀란듀란이었다. 그들은 영국의 5인조 밴드이며 이제 막 세상에 자신들을 뽐내기 시작한 신인이었다. 모두 외모가 출중했지만 특히 베이시스트 ‘존 테일러’는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을 현실에 구현한 듯 아름다웠다. 그들의 음악이 듣고 싶었지만 수중에는 카세트테이프 살 돈이 없었다. 초등학생 4학년에게 용돈이라는 호사가 없던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담대하게 엄마가 애지중지하며 기르는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가르는 일뿐이었다. 명일동 사거리의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앨범을 사고 나오니 거리는 이미 어둑했다. 카세트테이프를 품에 안고 집으로 가는 길이 어찌나 벅차던지, 발에 공기주머니를 매달아 놓은 듯 가볍고 흥이 나서 앞으로 닥칠 호된 엄벌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날 밤 골목을 가득 메운 라일락 향이 유난히 향기롭게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그날 이후 라일락 꽃향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순간 고등어구이 냄새가 났어도 아마 향기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드디어 동지들을 만나면서부터 외롭던 나 홀로 덕질을 마감하게 되었다. 중학교 생활 중 유일하게 잘한 일이 있다면 듀란듀란 전도 활동에 앞장서 교내 듀라니즈(듀란듀란팬)를 대거 양성하고 결집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우리는 모여 듀란듀란의 노래로 열창 대회를 열기도 했는데 우승자에게는 명일동 단골 분식집‘ 명조분식’의 라면 쿠폰을 주었다. 그냥 라면이 아닌 달걀이 들어간 떡라면으로. 한국 듀라니즈의 열화 같은 바람에 드디어 듀란듀란이 내한 공연을 온다는 뉴스가 1988년 여름에 들려왔다. 그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보여 줄 때가 온 것이다.
1988년 겨울, 우리는 ‘듀란듀란’의 첫 내한 소식과 동시에 그들을 맞기 위한 만반의 준비에 돌입했다.
우선 콘서트 티켓사수가 일대 거사였다. 티켓 오픈일은 1월 초순이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티켓창구는 화양리의 ‘아트박스’ 매장이었다. 집에서 버스로 40분 거리다. 티켓창구 오픈 시간은 오전 10시였지만 행여 티켓이 동이 날까 싶은 생각에 친구들과 꼭두새벽에 만나기로 했다. 첫 차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4시 30분이다. 4시에 눈을 떴다. 친구들을 만나 4시 50분쯤 화양리행 버스를 타니 25분 만에 화양리에 도착했다. 앞으로 대략 다섯 시간가량을 한겨울 대로변 한복판에 서있어야 한다.
처음 3-40 분견딜만 했다. 우리가 서있던 길은 4차선의 큰 대로변이었다. 만주 벌판의 시베리아 찬 공기가 따로 없었다.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얼음물 한 대접 들이킨 것처럼 머리가 띵하게 시렸다. 손발은 서서히 감각을 잃어갔다. 지금처럼 다운패딩도 없던 시절이다. 솜 패딩의 허약한 방어력으로는 한겨울 새벽, 대로변의 잔인한 칼바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따뜻한 코코아 한잔 뽑아 먹을 자판기조차 없었고, 잠시 바람을 피할 가림 막도 없는 그냥 길 한복판에서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고개를 숙인 채 죽은 듯 버티고 서있었다. 새벽의 시간은 유난히 더디게 흘렀다. 어둠이 짙은 새벽이었음에도 우리보다 먼저 와있는 사람도 십여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몇 시간째 버티고 서있는 걸까. 옷의 기능은 이미 상실한 지 오래다.
해가 떴지만 아침 또한 새벽 공기와 다름없이 잔인하게 살 갓을 물어뜯었다. 지나가는 버스 안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다. 이제 막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몰고 온 미온의 바람에 하마터면 그만 포기하고 주저앉을 뻔했다. 아트박스 직원은 30분 먼저 출근했음에도 야속하게 10시 정각이 되어서야 가게 문을 개방해 주었다. 그 순간 사람들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제 살았다’
티켓이 무사히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5분이었다. 제발 어서 내 침대에 들어가 얼어붙어 곧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육신을 녹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드디어 집에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미선이가 먼저 버스에 오르고 뒤이어 내 차례여서 버스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 도무지 내 다리가 접히지 않았다. 발을 떼야하는데 도무지 내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앞에서 미선이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기고, 뒤에 서있던 도진이가 내 허리를 감싸 안고는 번쩍 들어 올리다시피 해서 겨우 버스 계단에 올라섰다. 뒤이어 도진이와 경혜, 수현이도 나처럼 힘겹게 기어오르듯 버스에 탑승했다. 출근시간대가 지나서인지 다행히도 빈 좌석이 많아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 안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녹이자 얼굴 전체가 따끔거리더니 가려웠다. 감각도 없는 손을 엉덩이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실신하듯 잠이 들었다. 가장 먼저 버스에서 내리는 도진이가 우리를 차례대로 깨웠다.
“나, 간다.”
한마디 남기고 버스 계단을 절뚝이며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 전우애가 느껴졌다.
우리 집이 하필 4층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봐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저 없이 네발로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건만 모양새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랴.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발을 담갔다. 발 세포 하나하나에 가느다란 재봉용 실크 핀을 왕창 쑤셔 놓은 것처럼 짜릿한 전기가 흘렀다. 화양리의 난폭한 칼바람을 떠올리니 차라리 110 볼트 전기의 찌릿함이 좀 더 나았다. 곧바로 침대로 기어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자는 중에도 몸속 깊은 곳의 내장들은 여전히 냉동 상태인 것처럼 서늘해서 수시로 이불을 한 움큼 쥐어 끌어당겼다. 한숨 크게 자고 일어났지만 등짝 깊은 골에 사무친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들 또한 화양리 혹한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누가 감금이라도 한 것처럼 며칠간을 두문불출했다.
고관절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 2주가 걸렸다. 그야말로 목숨과 맞바꾼 티켓이나 다름없었다. 농구대잔치의 결승 티켓과는 차원이 다른 고행이었다. 농구는 굳이 앞줄 사수를 하지 않아도 경기를 보는데 지장이 없었지만 공연은 다르다. 오빠들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고 싶은 소녀들의 간절함이 아니었다면 결코 당해내지 못했을 고통이었다.
2000년대로 들어서며 하염없이 줄을 서 고달픈 시간과의 싸움에 이겨야만 티켓을 획득할 수 있던 시절은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끝이 났다.
학수고대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는 게 섭섭하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기다리는 행위 자체로도 좋은 때였다.
하늘이 열리는 1989년 2월 11일. 하필 학년말 고사가 끝나는 날이 공연일이다. 이미 시험은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는 공연일 몇 주 전부터 모여 시험공부 대신 플래카드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듀란듀란이 딸의 인생을 망쳐놓은 주범인양 미워하던 엄마는 공연 전날 쇼핑백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존 테일러 오빠 눈에 잘 띄라고 샀어.”
봉투 안에는 빨간 앙고라 니트가 들어 있었다.
당대 최고 스타답게 공연장 앞은 이미 긴 행렬이 굽이굽이 물결치고 있었고, 한껏 들뜬 소녀들이 온갖 치장을 하고 삼삼오오 모여 대열을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그날은 해가 훤히 드러난 오후였다. 지난번처럼 추위에 고생스럽지는 않았지만 장장 7시간 가까이 서있어야만 했다. 바닥에 앉아 조금이라도 다리를 쉬게 해 주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차가운 바닥에 앉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슬슬 배가 고프고 목에 닭살이 돋을 만큼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탠딩 좌석을 예매했기 때문에 들어가는 순서가 중요했다. 무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서서 오빠들을 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자리 이탈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화장실이 가장 문제였다.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트라우마에 직면하게 되었다. 타고난 방광의 용량을 이겨내야만 했다. 긴 행렬에 합류한 지 5시간이 넘은 시점부터 우리의 말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겹겹이 에워싼 인파를 뚫고 삼, 사백 미터 떨어진 화장실을 가는 일도, 되돌아오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공연예정시간이 30분 지연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과 함께 여기저기서 신음 섞인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승희는 벌써 최대 용량 치를 저장한 탓에 극한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승희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 나 또한 더 이상 못 버틸 만큼 괴로웠다. 공연은 결국 7시 30분에 시작했다. 늦은 공연 탓인지 관객입장과 거의 동시에 공연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착석도 하기 전에 조명이 꺼졌다. 입장하자마자 화장실부터 달려가리라는 소원은 무참히 거절당하고 고민할 겨를 없이 무작정 무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자리 잡기가 무섭게 오빠들의 신곡 ‘Big Thing'의 전주가 울려 퍼졌다. 듀란듀란 멤버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순간 내 방광은 눈치껏 잠잠해졌다. 오빠들을 드디어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역사적인 순간에 생리적인 본능은 큰 배려를 보여주었다. 공연 내내 다른 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오빠들을 내 눈 가득 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공연의 1부가 끝나고서야 조금 정신이 돌아와 그제야 친구들을 확인했다. 4명은 함께 모여 있었고 승희만 보이지 않았다. 앙코르까지 모두 끝난 후 오빠들이 무대를 떠나고 공연장에 불이 켜지고 나서야 승희를 찾기 시작했다. 흥분이 쉬 가라앉지 않았기에 사실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공연장을 일단 빠져나가기로 하고 입구에서 승희를 기다리기로 했다. 승희 역시 입구에서 우릴 찾고 있었다. 그녀는 공연장 입구가 열리고 모두 무대를 향해 뛰어갈 때 홀로 화장실로 뛰었고 그렇게 우리와 헤어진 것이다.
광란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공연이 끝나니 밤 10시가 넘었다. 친구들 모두 목이 쉬고 눈은 빨갛다. 나는 신발 한 짝을, 한 친구는 아빠의 카메라를, 다른 친구는 가방을, 또 한 친구는 겉옷을 잃어버렸다.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격한 감정의 우리는 잠실을 떠날 수가 없었다. 각자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 공연 끝났거든, 근데 집에 안 들어가면 안 돼?”
“야! 너 맞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 빨리 들어와!”
6명 모두 엄마들의 반응은 다를 바 없었다. 이판사판 될 데로 되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나는 신발이 있는 쪽 양말을 벗어 없는 쪽 양말 위에 겹쳐 신었고 친구들은 겉옷이 없는 친구를 위해 머플러나 카디건 등을 하나씩 벗어주었다. 처음 얼마동안 우리 머리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잠실 주공 5단지를 지날 즈음부터 다들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지만 우리의 들뜬 감정을 식히지는 못했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훌쩍 넘어갔다. 엄마는 식구들 깰까 봐 큰 소리 대신 벗어놓은 빨간 스웨터를 집어 들고 머리를 집중 공략하며 스윙을 반복하셨다. 어제의 엄마 눈빛은 참 좋았는데 말이다. 친구들의 사정도 마찬 가지였다. 팔뚝이 멍들거나, 귀에 피멍이 있거나, 일주일 외출 금지령을 당한 친구들에 비하니 내 사정은 그나마 나았다.
듀란듀란은 내 마음속 불변의 첫사랑이지만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면서 차츰 잊혀 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연애를 시작하며가 맞겠다. 덕질의 최후가 늘 그렇듯 말이다.
듀란듀란의 세 번째 내한 소식을 알게 된 때는 딸아이가 곧 5살이 되는 2011년 겨울이었다. 주연이에게 가자며 전화를 걸었다. 공연일을 기다리며 그동안 잊고 살았던 아드레날린이 서서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관객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 같은 중년들이 왔겠지 싶었는데 젊은 관객들이 대부분이라 놀랐다. 나보다 12살 많은 존 테일러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무거운 베이스를 어깨에 메고 무대를 뛰어다녔다. 그들 역시 나처럼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있음을 눈으로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듀란듀란은 외모 때문에 전성기 시절 내내 평가절하의 대상이 되었다. 2025년 지금, 그들은 여전히 월드 투어 중이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고 있다. 1978년 결성해서 1981년 첫 앨범을 내고 지금껏 해체 한번 없이 활동 중이다. 그들을 보면 생각나는 명언이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몇 해 전 배 철수 DJ님께서 듀란듀란을 소개하며 그들의 음악성과 팝계에 미친 영향이 외모 때문에 저평가되었다, 라며 현재 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듀란듀란이야말로 승자라는 멘트를 하셨다. 소녀시절의 10여 년 덕질에 큰 보상이라도 받은 듯 뿌듯하고 울컥했다.
1989년 공연 한 달 전, 시험공부를 빌미 삼아 이 집 저 집에 모여 공연에 들고 갈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그중 이런 문구가 있다.
‘6년을 기다렸다!’
듀란듀란이 내한하기를 기다리는 6년 동안 참 행복했다. 그사이 나는 혼자에서 다섯이 되어 외롭지 않은 덕질을 영위했고, 듀란듀란은 음악적으로 더욱 견고한 밴드가 되었다.
Rio … Duran Duran
Neutron Dance … Pointer Sisters
Eternal Flame … The Bang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