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부산 본가에서의 기억은 온통 폭력적인 잔상들로 가득하다. 내 나이는 고작 5살 정도였지만 그 당시 몇몇의 기억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생생하다. 우리 세 모녀는 불가항력의 폭력을 피해 신장(지금의 하남시) 외조부모님 댁으로 피신을 갔고 4년 동안 함께 지냈다.
할아버지는 섬세하고 할머니는 투박한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늘 하얀 한복을 입으셨다. 겨울엔 비단처럼 윤기 나는 한복을, 여름엔 새하얀 모시 한복이었다. 할아버지는 엄하기는 하셨지만 큰 소리 내는 법이 없는 양반이셨다. 반면 할머니의 언투는 역정난 사람처럼 사나웠다.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너 이제 할아버지한테 혼난다!”를 외치며 나를 겁박하지만 정작 혼내는 분은 늘 할머니셨다. 할머니의 주 무기는 손바닥과 연탄집게 아니면 불쏘시개 용 긴 집게였다. 실제 무기 사용은 겁주기 용도로 그쳤고, 실질적인 매는 할머니의 거친 손바닥이었다. 내 등짝은 할머니의 손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할머니는 내 이름을 부르실 때 외국 사람 이름의 긴 풀 네임처럼 이름 뒤에 다른 애칭을 덧붙여 부르셨다. 이를테면 이렇게 말이다.
“ㅇㅇ야! 아이고, 이 육시랄 년"
"ㅇㅇ야! 아이고, 이 우라질 년"
혼이 날 상황이 아니어도 할머니는 외국식 풀 네임으로 나를 부르셨다. 할머니의 거칠고 찰 지게 건네는 욕이 싫지 않았다. 할머니의 언어였으니까.
언니와 나를 친정에 맡긴 부모님은 서울에서 돈벌이를 하셨고 일주일에 한 번, 어느 때는 더 한참 만에 우리를 보러 오셨다. 부모님의 부재를 못 느낄 만큼 행복했고 풍요로웠다. 마음이 그랬다.
얌전한 언니와 다르게 나는 동네에서 소문난 말썽장이었다. 시골 장꾸 같은 녀석들을 제치고 골목대장으로 등극했으니 두 분 께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동네 아주머니들이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 때문에 자신의 아이가 다쳤다느니, 나 따라서 위험한 행동을 했다느니, 나의 잘못을 고하러 온 것이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아주머니들을 다독이고는 조용히 돌려보내셨다. 내게는 이렇다 할 말씀이나 체벌을 가하지 않으셨다. 행동대장 할머니가 팔도의 욕과 함께 내 등짝을 사정없이 서 너 번 내리치면 사건은 종결되었다. 등짝에서 열이 솟구치고 저녁 먹는 내내 따끔거렸지만, 단 한번 도 할머니를 원망한 적이 없다. 할머니는 내가 잠들기 전 늘 팔베개를 해주셨고, 7살이나 먹은 다 큰 손녀에게 축 처진 가슴을 내어주셨다. 여름 한낮, 놀다가 그만 마룻바닥에 잠들기라도 하면 어느새 곁에 와서는 부채질을 해주셨다. 어렸지만 할머니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신뢰했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지식인이셨고 할머니는 억척스러운 살림꾼이셨다. 없는 살림에 밭에서 나는 몇 가지 안 되는 농작물로 최고의 밥상을 차려주셨고 철마다, 때마다 별미를 내오셨다. 호박범벅, 토란국, 시루떡과 식혜, 새우젓국과 애호박전등 수 십 년 전 할머니의 손맛이 여전히 혀끝에 남아 서럽다.
할머니는 내 머리만 유독 짧게 잘라주셨는데 엄마는 여자애 머리를 왜 그리 짧게 만들었냐며 할머니께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는 눈 뜨면 곧장 나가 저녁이 다 되어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어찌나 혼신의 힘으로 놀았는지 아침마다 눈곱 때문에 눈을 뜨지 못했다. 할머니께서 밥공기에 물을 담아와 물을 묻혀가며 눈곱을 떼 내야 겨우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늦은 저녁까지도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면 동네 이장님 댁 마을 방송으로 나를 찾는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ㅇㅇ야! 설탕물 타 놨다. 얼른 집으로 오면 준다! 빨리 와라, 응?”
똑같이 새 옷을 입혀도 언니는 이삼일 멀쩡하지만 나는 입자마자 찢어 오거나 어디다 벗어 놓고 오거나 더럽혀 오기 일쑤였다. 이런 개구쟁이에게 긴 머리는 당연히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모든 식구들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종종 할아버지 몰래 이웃들과 함께 동네 굿판을 벌이셨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 들킨 후, 마지못해 세례를 받고 나서야 샤머니즘의 세계와 연을 끊으셨다. 할머니 따라 이 동네 저 동네 굿판 구경 가는 날은 최고의 나들이였기에 아쉬움이 컸다. 교육에 공들이셨던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도 전에 이미 구구단과 한글을 모두 떼게 하셨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신동대우를 받기도 했다. 성적표에 양이 뜨기 전까지 말이다.
밤새 눈이 내려 공기가 시리던 어느 해 겨울, 마당에서 빨래를 하시던 할머니가 쓰러지셨다. 중풍이라고 했다. 우리 자매를 돌보시다 저리 된 것 같다며 엄마는 죄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1979년,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우리 자매는 서울 삼양동으로 이사를 갔다. 꼬릿꼬릿한 순댓국 냄새가 진동하는 은행나무 사거리를 지나, 비좁은 골목을 수없이 만나며 위로 위로 하늘을 향해 가다 보면 삼양 사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달동네에 우리의 서울 첫 집이 있었다. 창가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창밖을 관찰하는 일이 그 집에서의 낙이었다. 화창한 날에는 삼양동 사거리너머 성당과 아폴로극장이 보이기도 했다.
그 후 삼양동과 미아리에서 몇 번의 이사를 더 했고, 9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큰 이모네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강동구로 이사를 갔다. 얼마 후 할아버지 할머니 역시 강동구 길동의 삼촌댁으로 오셨다. 두 분은 방학이면 우리 집에 오셔서 며칠 지내다 가시기도 했다. 방 두 개의 13평 남짓한 작은집이지만 두 분이 오시면 예전 신장에서 함께 살 때처럼 푸근한 시골집 느낌이 나 좋았다. 언니와 나는 할머니를 앉히고 목욕도 시켜드리고 머리도 잘라드렸다. 배까지 축 처진 할머니의 가슴을 살짝 들어 몸을 닦이다 보면 어릴 적 할머니 젖을 만지며 잠들던 때가 떠올랐다. 그 사랑에 보답하듯 더 열심히 할머니를 씻겼다.
열 살이 되고 얼마 후, 눈이 오는 4월에 할머니는 천국으로 가셨다. 틀림없이 천국으로 가신 게 맞다. 어린 마음에 4월의 눈은 그런 의미였다고 믿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는 독거노인 신세가 되다시피 하셨다. 외삼촌과 할아버지의 불화는 할머니의 죽음 이후 더 거세졌고 다른 자식들 중 누구도 할아버지를 모실만한 형편이 안 되었다. 할아버지는 성내동의 작은 단칸방에서 홀로 지내셨고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를 자주 찾아뵀다. 방학 동안은 우리 집에 오셔서 머무르셨다. 일요일, 할아버지와 함께 성당에 가는 길이 좋았다. 그때까지도 할아버지는 하얀 모시 한복을 입으셨다. 버선을 신겨드리고 바지 밑단을 접어 끈으로 동여 메는 당번은 늘 나였다. 나만의 특권처럼 그 일이 맘에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후, 할아버지는 즐겨가시던 목욕탕에서 넘어지셨다. 죽음을 한번 경험해서였는지 할아버지와의 작별은 더 힘들었다.
11살 인생 중 가장 슬펐던 그날,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두 분이 내게 남겨 주신 유산은 내 삶, 내 영혼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가꾸어주셨다.
스스로 대충 살아간다 싶을 때면 두 분의 희생과 사랑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 죄스런 마음이 들곤 한다.
이모들이 속상한 마음에 우리 자매 때문에 할머니께서 풍을 맞았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이모들을 불러다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네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 같이 살았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있던 마음속 미안함이 따뜻한 할아버지 품으로 사라져 버렸다.
A Love so beautiful ...Roy Orbison
Somewhere out there … James Ingram
Run to you … Whitney Houston
Never my love … The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