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고2 때 살던 아파트 상가 1층 모퉁이에 조그만 레코드가게가 있었다. 협소한 공간이지만 LP와 카세트테이프들이 빼곡하게 사방의 벽을 메우고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엄마의 심부름에 입 내밀고 투덜거리며 겨우 갔을 테지만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엄마의 찬거리 심부름을 호시탐탐 노리게 되었다. 레코드 가게는 필수코스였다. 두리번거리다 보면 일, 이십 분은 훌쩍 지나버렸다. 저녁거리 사러 가서 오지 않는 딸 때문에 엄마의 인내심은 늘 바닥나곤 하셨다. 등판 한 대 세게 맞으면 그만이다 보니 그다지 조급하지 않게 구경을 하곤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레코드 가게에 드나들기 시작한 때는 점원이 바뀌면서부터이다. 아저씨대신 젊은 점원이 빛 한점 들어오지 않던 생기 없는 가게를 환하게 빛내고 있었다. 말수가 적은 점원은 한눈에 봐도 롹 마니아였다. 항상 헤비메탈 밴드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백옥 같은 피부였다. 하얗기만 한 게 아니라 모공하나 없고 점 하나 없을뿐더러 거기다 광채가 엄청난 피부미남이었다. 수줍음이 많은지 좀처럼 눈을 마주치는 일이 잘 없었다. 목소리도 작아 그와 대화를 할 때는 모든 오감의 에너지를 귀로 집중시켜야 했다. 입도 크게 안 벌리는 화법이라 입모양으로 유추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래도 상관없이 나는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날은 오지 오스본의 기타리스트 '랜디'로즈'의 기일이었다. 몇 해 전 DJ황 인용의 팝프로에서 오지 오스본의 'Goodbye to Romance'를 듣고 홀딱 반한 후 기타리스트인 랜디 로즈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랜디 로즈’는 특별한 존재였다. 1982년 비행기 사고로 안타깝게 요절한 천재 기타리스트라는 이슈를 차치하더라도 그의 곡과 기타 플레이는 위대하다.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그의 기타 연주는 단순히 현란한 테크닉만 내세우지 않고 감성이 있었다. 말 그대로 심금을 울리는 연주였다. 단 3년간의 활동만으로도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반열에 올랐으니 그의 천재성은 독보적이다. 고3 내내, 그와 오지 오스본이 함께 만든 앨범‘Blizzard of Ozz'를 귀에 달고 살았었다.
그날도 라디오 곳곳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멘트와 노래들이 들려왔다. 헛헛한 마음에 오지 오스본의 라이브 앨범이나 살까 싶어 레코드 가게로 갔다. 오! 다른 때와 달리 비좁고 어두웠던 가게가 광채를 뿜고 있다. 벌렁 데는 심장을 다독이고 빼곡한 앨범들 사이사이를 뒤적였다.
"학생, 뭐 찾는 거 있어요?"
" 오지 오스본 라이브 앨범 있어요?"
"여학생이 취향이 근사하네?"
"혹시 랜디 로즈 단독 앨범은 없어요?"
"랜디 로즈 좋아해요? 랜디 로즈, 나한테는 신이야"
우리는 그 순간 동지가 되었다. 그는 록 마니아뿐 아니라 기타리스트였고 밴드활동도 하고 있었다. 모르는 밴드와 곡이 없었다. 그와 음악 얘기 하는 시간이 더없이 좋았다. 나는 스승처럼 그를 따랐고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는 록 스피릿 소녀를 그도 무척이나 아꼈다. 그는 내게 들려주고 싶은 곡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주기도 했는데, 덕분에 나의 음악적 소양은 다양해지고 깊어졌다. 그는 이따금 곡에 얽힌 서사도 함께 들려주었다. 스토리가 있는 곡이나 가수는 어딘가 모르게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왔다. 그가 좋아하는 밴드나 연주자들을 나 역시도 좋아하기 시작했다. 짧은 4개월 동안 헤비메탈뿐 아니라 프로그레시브 록과 LA메탈등 여러 장르를 접할 수 있었다. 상가에 갈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 나를 보며 엄마는 누가 널 본다고 멋을 내고 가냐며 유별나다 타박하셨다. 그곳에 영적인 애인을 숨겨 놓은 줄도 모르고 말이다.
어느 날,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가게에 서있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낯선 사람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행방을 물었다.
“혹시 네가 S니?”
“네”
“그 친구는 내 부탁으로 잠시 도와주러 왔던 거야. 다시 자기 하던 일 하러 갔어. 너 오면 주라고 뭐 맡기고 갔어. 잠깐만”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은 두 장의 앨범이었다. ‘Camel'과 ’Lynyrd Skynyrd'‘의 앨범이었다.
두 앨범 모두 탐내던 앨범이었다. Camel의 앨범’Stationary Traveller'의 수록곡 ‘Long Goodbye'는 나에게 전하는 그의 작별 인사처럼 느껴져 듣다가 울어버렸다. Lynyrd Skynyrd의 ’Free Bird'는 1973년 발표한 그들의 1집 수록 곡 중 단연 최고의 명곡이다. 노래뿐 아니라 밴드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아 30년 가까이를 나만의 비밀스러운 보석처럼 여기고 있었다. 2015년 극장에서 매튜 본 감독의 ‘킹스 맨’을 보던 중 유명한 교회 살육 신에 이 곡이 배경음악으로 등장하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비로소 나의 보석을 만천하에 소개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그는 명반 두장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났다. 그 후,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고3 여름방학, 남들 하는 만큼은 못해도 흉내는 내야 했다. 천호동 사거리의 대형 단과학원에 등록을 했다. 방학 특강이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반에 뒤늦게 합류한 녀석이 옆자리에 앉았다. 여자보다 더 곱상한 미모를 지닌 그 친구의 이름은 지호였다. 그는 사정이 있어 고등학교를 1년 늦게 진학했고 나는 7살에 입학을 했으니 나보다 두 살 더 어른이다. 그는 성격도 외모만큼 여리고 순했다. 100명이 넘는 교실에서 가장 피부가 하얗고 입술이 붉은 아이였을 것이다. 친구 없이 혼자 학원에 다녀서인지 친해지고 난 후부터 줄곧 내 옆자리를 지키는 단짝이 되었다. 웃음이 소녀보다 많아서 내가 입만 열면 자동으로 웃는 웃음자판기 같은 친구였다. 우리는 수다 코드가 잘 맞아 학원뿐 아니라 집에 와서도 밤새 통화를 하기도 했다. 지호도 나처럼 걷는 것을 좋아했다. 학원을 마치면 이미 늦은 시간임에도 두세 시간 올림픽공원 둘레 길을 산책했다. 우리의 대화는 끓기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그에게 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형도 나처럼 헤비메탈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기타리스트로서 활동 중이라고 했다. 어쩐지 생김새와 다르게 록 스피릿 티셔츠를 많이 입는다 싶었다. 그리고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중학생 때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소리에 자못 달리 보이기도 했다. 형도 너처럼 예쁘게 생겼냐고 물었다.
“음, 형은 나보다 키가 작고 눈에 쌍꺼풀이 없어. 우리 형제가 엄마 닮아서 피부는 다 좋아. “
“형은 그럼 지금 밴드 활동해? “
“응, 앨범도 냈고 콘서트도 여러 차례 했어”
“형 이름이 뭐야?”
“이 ㅇㅇ"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리운 나의 스승이다. 그러고 보니 백옥 같은 피부가 쏙 빼닮았다. 많이 보던 티셔츠들이라 생각했다. 이목구비와 키가 너무 달라 형제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너의 형,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어쩐지 그에게 동생을 통해 내 이야기가 전달되는 일이 마땅치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그때는 그랬다. 그날부터 저녁마다 괜히 지호의 집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결국 몇 주가 지나서야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스승의 목소리다.
“네, 안녕하세요, 지호 있나요?”
“응 잠시만, 그런데 지호 친구니?
“네”
'오! 주여'
심장이 말라비틀어져 바닥으로 풀썩 내려앉았다. 지호와 통화하는 내내 머릿속이 하얗게 멈춰 버렸다. 처음부터 지호에게 사실대로 고했다면 한 번 더 그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내 행동이 못마땅해 잠도 설치며 가슴을 내리쳤다. 이때부터 지호는 편치 않은 친구가 되었다. 내 인생에 있어 특별한 두 사람을 동시에 잃은 기분이었다.
형제라니…
이런 운명의 장난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지호와는 졸업하고 수개월이 지난 9월, 그의 군입대를 앞두고 위로의 술파티를 끝으로 다시 볼 수 없었다. 당시는 서로 이사를 가거나 전화번호가 바뀌기라도 하면 서로 연락할 길이 끓기던 시절이었다.
사모곡을 읊조리듯 구슬펐던 마음은 그로부터 수년 후 다시 나를 애끓게 만들었다.
록 밴드를 결성하고 첫 앨범을 준비하던 경혜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앨범 준비에 관한 질문을 하던 중 경혜에게 우리 동네에도 실력있는 기타리스트가 있더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혹시나 싶어 그의 이름을 꺼내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지금 그 사람과 작업 중이라는 것이다. 기타리스트로서 제법 이름이 있어 세션으로 활동 중이라는 것이다. 경혜에게 앞뒤 사정을 설명하고 절대 아는 체하지 말아 달라며 신신당부했다. 그날 이후 또다시 스승을 그리워하며 한동안 사모곡을 써 내려갔다.
20대 중반 시작한 떠돌이 생활은 소중한 물건조차 허용하지 않는 형벌을 주었다.
창간호부터 모아둔 영화잡지 ‘KINO', 중, 고등 시절 세운 상가를 누비며 수집한 LP판들, 왕 가위 감독이 직접 사인한 영화 ’춘광사설‘의 포스터, 코아 아트홀 회장님이 선물해 주신 샤갈의 포스터 ’브테브스크위의 누드‘ 그리고 스승의 작별 선물인 앨범 두 장도 함께 눈물의 이별을 고했다.
요즘 다시 LP판을 모으고 있다.
그가 특별히 아끼던 밴드, Wish bone Ash의 LP는 아직 구하지 못했지만 그의 작별 선물인 앨범 두 장 모두 구할 수 있었다. 지나간 시간과 사람을 추억하는 일은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아련하고 아쉽다.
되돌릴 수 없기에 안타깝고, 그리운 사람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에 아프다.
그와 작별한 지 37년이 지난 2025년 2월, 혹시 앨범을 내고 가수 활동을 계속했다면 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이름을 검색 창에 띄웠다. 없었다. 이번엔 이름 앞에 기타리스트를 추가했다. 누군가의 블로그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작은 뉴스라던가 음악 잡지 기사에도 그의 이름이 있다. 그는 유명 헤비메탈 밴드의 창단 멤버였고 그 후 여러 밴드를 만들며 여전히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이었다.
앨범 쟈켓과 공연 사진은 메탈 밴드 특유의 짙은 화장 때문에 얼굴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아주 오래전 잡지 기사에 난 화장기 없는 사진 속에서 단번에 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사진도 볼 수 있었다. 불과 3년 전, 어느 팬이 함께 찍은 사진을 블로그에 실은 것이다. 그의 긴 머리가 노년이 된 롹커의 자존심을 말해 주었다. 얼굴에 주름은 많지만 피부는 여전히 곱다. 음악 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순수한 표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내 얼굴의 주름보다 그의 얼굴에 난 주름에 더 가슴이 미어졌다.
그의 사진을 보자마자 질문을 해버렸다.
‘행복하게 살았나요?’
I'm not in Love … 10cc
I Love Rock 'N' Roll … Joan Jett & The Blackhearts
Free Bird … Lynyrd Skynyrd
You can do Magic … America
Love Hurts … Nazareth
Everybody Needs a Friend … Wishbone 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