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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소녀들의 베스트셀러를 아시나요?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 세 번째 이야기

by 레인송

1985년은 대한민국의 소녀들을 독서광으로 만들어 버린 희대의 베스트셀러가 등장한 해이다.

녀들은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분주히 공유했고 너나 할 거 없이 로맨스 열풍에 합류했다.

크기와 두께부터가 휘리릭 몰래 읽기에 제격이다. 거기다 화끈한 애정 행각과 급행열차 급 빠른 전개는 지루할 틈이 없다. 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책상에 대 여섯 권씩 쌓아놓고 읽었는데 은근히 호기심이 가기도 했지만 애써 외면해 버렸다. 하이틴 로맨스는 소녀들에게 제2의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인권은 개나 줘 버린 담임은 틈만 나면 소녀들의 가방 검사를 예고 없이 아침저녁으로 실시하곤 했다. 하이틴 로맨스에 푹 빠졌던 도진이는 열 권이나 소지하고 있다 발각되는 바람에 복도에서 참혹하게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소지품 검사 때 하이틴 로맨스뿐 아니라 거슬리는 물건이 발각되면 즉각 복도 행에 처해졌고 모욕적인 훈화 말씀을 곁들인 매질을 거쳐야 끝이 났다. 그때그때 매가 몽둥이냐 출석부냐 아니면 주먹 알밤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방뿐 아니라 책상서랍도 뒤지기 일쑤였다. 내 책상 서랍에서 매번 담임을 거슬리게 하는 물건이 튀어나왔기에 나 또한 복도 행 단골이었다. 주로 며칠 전에 신던 양말, 곰팡이 핀 먹다 남은 도시락과 잡다한 쓰레기들이었다. 다행히도 하이틴 로맨스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았기에 그 책 때문에 고초를 겪는 일은 없었다.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교실에서 틈나는 대로 읽기 위해 먼저 읽은 친구에게 주요 장면만 밑줄을 부탁해 빠르게 핵심만 읽었다. 몇 권 읽다 보면 디테일만 조금 다를 뿐 줄거리는 거의 비슷하다.


구릿빛 피부의 남자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집안 좋고 운동도 잘하고 사업 수완도 좋은 귀공자다. 성격은 까칠하지만 알고 보면 내면은 순수하고 순애보적인 면이 있다. 여자 주인공들은 결국 남자 주인공을 만나 현대판 신데렐라로 거듭난다. 그러자면 미모는 매력적이어야 하며 부유하지 않지만 지적이다. 대부분 도도하게 남자를 거절하지만 남자의 야성적인 매력 앞에 무릎 꿇고 만다는 뻔한 레퍼토리의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하이틴 로맨스는 대한민국 소녀들의 성적 호기심을 봉인해제 시킨 장본인이었다.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금요일 하굣길이었다.

도진이가 하소연을 한다.

“난 시중에 도는 거는 거의 다 읽은 것 같아. 신작은 또 언제 나올라나”

순간 재미있는 생각이 번득 튀어나왔다.

“우리가 직접 쓸까? 하이틴 로맨스”

말 꺼내기가 무섭게 친구들은 영감이 떠오른 듯 참신하고 귀여운 발상을 쏟아냈다. 주말 동안 집필하고 월요일 점심시간에 모여 돌아가며 낭독하기로 했다. 제안은 먼저 했지만 나는 정작 일요일 늦은 저녁 수현이의 전화를 받고서야 허겁지겁 대충 쓰고 말았다. 월요일은 특히나 가방검사 집중 요일이라 들킬 염려 없이 다른 곳이 아닌 교과 노트에 쓰기로 했다.


점심시간 운동장에 모여 앉아 낭독 순번을 정했다. 미완성인 경혜와 선주를 제외하고 시니컬한 친구현경이가 첫 낭독에 나섰다.

“제목! 너와 나의 교집합”

경혜가 끼어들어 물었다.

“교집합이 뭐야?”

우리는 공부 잘하고 똑똑한 현경이 다운 제목이라며 추켜세웠다. 그녀의 상상 속 로맨스가 펼쳐지는 내내

우리는 웃음을 참다못해 온몸을 들썩이고 쓰러져 나뒹굴다시피 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제목! 파라다이스 익스프레스”

영화 제목에서 훔쳐왔다.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는 나도, 듣고 있는 친구들도 옷 속에 벌레라도 들어간 듯 근질거려 온몸을 비틀어댔다. 5교시 시작종이 울리는 바람에 낭독회는 수업이 끝난 후 분식집 가는 길에 재개하기로 했다.


사달의 시간은 5교시 국어시간에 터지고 말았다. 경혜가 수업 시간 중에 미완의 로맨스를 완성하다 선생님께 들키고 말았다. 공책을 뺏어든 선생님은 빠르게 훑으시고는 피식 웃으셨다. 공책은 압수 됐고 쉬는 시간에 반성문 써서 찾으러 오라 하셨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추후에 벌어질 엄청난 피바람을.

평소 상냥하신 국어 선생님이기에 이 정도로 끝났다며 안심하던 터라 후폭풍의 충격은 더욱 컸다.

공책을 돌려받으러 간 경혜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이유는 담임이 공책을 인터셉트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앞날이 예상되니 마음이 무거웠다. 머리에 꿀밤 몇 대 맞으면 된다며 오히려 그녀가 우리를 안심시켰다.




종례시간, 예상대로 담임은 경혜를 부르더니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공책을 내밀며 읽으라 한다.

“제목, 사랑은 무지개”

눈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진이의 입 밖으로 폭죽처럼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교실을 한 바퀴 순회하고 아이들도 일제히 어깨를 들썩인다. 선천적으로 주목받기를 즐겨하는 경혜는 신이 난 듯 더 낭랑한 소리로 읽어 나갔다.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담임이 경혜의 공책을 낚아채듯 뺏더니 둘둘 말아 그녀의 머리를 정박자로 내리 치며 말한다.

“넌!” ‘탁’ “머리에!” ‘탁’ “똥만!” ‘탁’ “찼냐!” ‘탁’ “이러니!” ‘탁’ “맨날” ‘탁’ “꼴찌만” ‘탁’ “하지!” ‘탁’

“다들 가방에서 공책만 꺼내서 책상에 올려놓는다. 빠짐없이 전부 꺼내지 않으면 집에 못 갈 줄 알아라”

아뿔싸! 하이틴 로맨스만 미리 숨겨 놨는데 공책이 타깃이 되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담임에게 허를 찔린 것이다. 담임의 기나긴 수색 작업은 성공했고 우리는 집이 아닌 상담실로 자리를 옮겨 각종 처벌에 관한 담임의 설명을 보험 설계 상담하듯 들어야 했다.

담임이 내린 처벌은 이른바 정신 개조와 심신 미화가 목적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여름 방학 동안 서예반에서 갱생의 시간을 보내라는 지시였다.




상담실을 나와 신발을 갈아 신으며 경혜가 말했다.

“우리 명조 분식 갈까?”

“좋아!”

떠들고 깔깔 거리는 우리를 어디선가 담임이 본다면 더 큰 처벌을 줄 것 만 같아 앞만 보고 걷기로 했다.

가는 도중 놀이터에 앉아 미처 마치지 못 한 낭독회를 재개했다.

도진이 차례다. “제목! 사랑의 난파선”

현대판 타잔과 제인 같은 스토리였다. 배가 전복했는데 돈 많은 재벌 미남과 자신만이 살아남아 무인도에서 사랑을 꽃피운다는 고전 에로틱영화의 단골 소재였다. 공부도 잘했지만 누구보다 하이틴 로맨스 마니아인 도진이의 소설은 제법 완성도도 훌륭하고 그럴싸하게 에로틱하기까지 해서 나중에 다시 돌려 보기도 했다.

어린애처럼 순진한 선주가 낭독할 때는 다들 너무 웃어서 아랫배가 당기고 턱이 아플 정도였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그녀를 두고 하는 거였다.

배가 고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분식집을 향하는데 경혜가 묻는다.

“사랑은 무지개 괜찮지 않냐? 나 그거 내 첫 곡 제목으로 쓸까 봐”

우리는 모두 함께 서예실에서 여름 방학을 보냈다. 함께였기에 이 또한 행복했다.

서예반 선생님은 천사처럼 곱고 선하셨다. 우리의 장난도 그저 천진하고 예쁘다며 우리가 부럽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2학기가 시작되고 우리는 더 이상 갱생의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여름이 지나고 늦가을의 냉기가 아침저녁으로 느껴질 때쯤 로맨스 신드롬도 차차 식어갔다.

늘 그렇듯 잘생긴 배우와 가수가 등장하면 여전히 소란스럽고, 편이 나뉘었으며, 담임과의 팽팽한 신경전도

그대로인 채 15살의 나머지를 통과하고 있었다.


Paradise …Phoebe Cates

Sweet Dream … Eurythmics

This Time I Know It's For Real … Donna Summer

Forunate Son …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Wake up Little Susie ... Simon & Garfunkel

Vacation ... The Go-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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