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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by 레인송

중학생 때 쓴 일기를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읽다 보면 등줄기가 오싹하리만큼 유치하지만 예쁨이 있다. 짝사랑하는 스타들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천진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나눈 순도 100%의 우정이 부러울 정도로 순수하다. 어렸기 때문에 아픈지도, 결핍인지도, 부당한지도 모르고 그저 행복했던 시절이다.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까닭은, 아픔조차 거두어 낼 만큼 천진난만했던 자신을 향한 향수 아닐까.



30여 년이 지나고서야 친구들 얼굴을 제대로 떠올려본다. 그렇게 예뻤던가 싶을 만큼 기억 속 소녀들은 사랑스럽다. 한 명, 두 명 이별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15살에 만난 친구들과 30대 후반까지 붙어 다녔다. 얄짤 없는 세상에 각자 설 자리를 찾느라 고군 분투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팝을 사랑하고 영화를 탐닉했으며 올림픽과 축구 월드컵 시즌마다 모여 응원하는 팀을 위해 술을 마셨다.


도진이는 내가 결혼한 이듬해 30대 중반의 나이에 홀로 이민을 떠났다. 그녀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민 준비를 해왔으며 떠나는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도진이는 늘 그래왔다. 자신 속에 감춰 둔 계획을 미리 발설하지 않는다. 우리가 호들갑 떠는 꼴을 싫어했다. 충격이 더 컸던 이유는 따로 있다.


갓 스무 살이 된 우리는 앞날을 점쳐 보겠노라며 용하다는 사주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지윤이의 언니가 먼저 방문했던 곳으로 병원에서는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했음에도 시어머님의 사망예정일을 정확히 맞췄다며 혀를 차던 곳이었다. 지윤과 도진, 수현이와 어색하게 나란히 앉아 우리 앞에 놓인 사주를 듣고 말았다. 수현이의 사주가 나오자 우리는 모두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작은 키의 수현이는 온몸이 차돌처럼 단단한 소녀 장수 체형이었다. 인상 또한 사납고 성질도 보통이 아닌 친구였다. 뭐, 연애와 외모는 별개지만 우리 눈에 그녀는 가장 늦게 결혼할 것 같은 친구 1순위였다. 그런 친구의 사주는 '도화살'이었다. 우리 모두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그게 뭐예요?"

내 친구 수현이가 두 남자 사이에 담금질하다, 한 놈 목숨 위태롭게 하고 다른 남자와 도망가는 팔자라고 했다. 우리는 또 동시에 외쳤다.

"네? 얘가요?"

믿기지 않는 예언이었다.


지윤이 차례다. 평생 고독살이 붙었다고 했다. 수긍이 갔다. 그때 우리 모두는 비혼주의자였고 연애는 배부른 자본주의자들의 한심한 놀음이라 치부하며 건방을 떨던 때였다. 평생이라는 조건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무난한 사주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혼을 한 번 하고 자식도 한 명 있다고 했다. 불쾌했다. 난 결혼 같은 거 안 할 사람인데 말이야 거기다 아이까지 있다니. 그런데 도사가 묘한 말을 던졌다. 남편 없이도 잘 사는 사주라나. 그건 또 무슨 의미 인지 몰라서 이혼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하나 있는 자식은 평생 걱정 안 해도 스스로 지 앞가림 잘하고 산다는 말과 부동산과 식당을 하면 하는 쪽쪽 성공한다고도 했다. 도진이는 부평초의 사주라고 했다.

"부평초가 뭐예요?"

평생 떠도는 풀이라서 바닥에 내려앉으면 곧 죽는다고 했다. 기자를 해서 해외를 떠 돌거나 하다 못해 미팔군 PX에서라도 일을 하라고 당부했다.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코미디 한 편 보고 나온 듯 서로의 사주를 안주삼아 웃어댔다.




그로부터 6년 후, 수현이는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는 비쩍 마른 남자와 가진 것 일절 없이 가난하고 나이 많은 남자 사이에서 구질구질한 삼각관계를 1년 지속하다 후자의 남자와 제주도로 야반도주를 했다. 그때 우리는 그 사주집을 떠올렸다.

'진짜 사주란 게 있는 건가?'

도진이의 이민 계획을 듣고 놀란 이유가 이거였다. 진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거스를 수 없는 사주라고 맹신하고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버렸는지 말이다. 평소에 외국인 특유의 체취가 싫어 이태원도 안 가던 녀석이었다. 도진이는 이민 가기 전 정을 끓고 가려는 사람처럼 술만 먹으면 사나운 들개가 되어 친구들을 물어뜯었다. 나의 결혼을 앞두고 미리 치른 집들이에서 도진과 정화는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 결국 결혼식에 도진이는 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오해와 다툼으로 우리는 혼란스러웠고 그런 분위기인체 도진이는 호주로 떠났다. 어쩌다 보니 그녀와는 이별의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헤어지게 되었다. 한참이 지나 연락을 나누었지만 멀리 떨어진 친구와의 소통은 곧 중단되고 말았다.


명리학에서 보는 사람의 사주팔자, 즉 사람마다 주어진 운명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 지윤이는 20대를 끝으로 연애와는 인연이 없었다. 여태껏 혼자 지낸다. 나 역시 33년 전 들었던 사주대로 살고 있다. 주말 부부이고 남편이 있는 날 보다 없는 날 더 알차게 신나는 인생을 영위한다. 딸은 사주처럼 혼자 알아서 기저귀 떼고, 한글 떼고 공부도 스스로 알아서 잘한다. 이쯤 되면 33년 전의 예언이 거의 맞아떨어진다. 천주교 신자이지만 어쩔 수 없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적중율이다.




경혜와는 20대 후반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그녀와는 일찌감치 평행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내가 평범한 또래의 삶을 살았다면 그녀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향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꿈을 향해 살아갔다. 그녀와의 이별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쳤다. 시간과 무관심. 이 두 가지만이 눈치챌 겨를도 없이 이별을 만든다. 훗날 다른 친구를 통해 그녀가 나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만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는 어차피 다시 헤어질 관계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만으로 다시 연이 이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내 마음이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수현이는 제주에서 산다. 우리 중 가장 이른 나이에 남자를 만나 제주로 야반도주한 용감했던 그녀.

제주의 거친 바람은 육지의 여자를 지상 최고의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만들어버렸다. 봄에는 고사리 뜯으러 산으로 갔고, 여름엔 펜션에서 청소를 하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려는 듯 그리고 옳았음을 증명하려는 듯 꾸역꾸역 강해져 만 갔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한 성미 하는 친구였다. 성이 한번 돋아 눈꼬리가 솟을 때면 아무도 말릴 자가 없었다. 억척스러운 삶이 그녀를 더욱 고집 센 쇠심줄로 만들었고, 결국 우리 중 어느 누구 하나 그녀가 편하지 않았다. 서운해도 서로 내색할 수 없는 관계가 되자 자연스레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일은 사라졌다.


공부 잘하던 친구 선주는 처음부터 우리와 결이 다른 친구였다. 단지 우리와 친구가 되고 싶다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듀란듀란과 팝을 좋아하게 되었다. 선주는 결코 잊지 못할 해프닝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1986년 겨울방학식이 있던 날의 사건이다.

나와 다섯 명의 친구들은 도진의 집으로 갔다. 선주는 사정이 있어 함께할 수 없었다.

그날, 우리는 거사를 앞두고 비장한 마음으로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KBS 라디오의 간판 팝 프로였던 김광한의 팝스다이얼에서 전화로 시청자들의 신청곡을 받는 코너가 있었다. 평일에 하루만 진행했기 때문에 마침 요일도 맞아떨어지고 방학식 때문에 일찍 하교도 하였으니 오늘이 벼르던 바로 그날인 것이다. 번갈아 가며 쉼 없이 전화 다이얼을 돌렸지만 연결이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때 라디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여보세요?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네, N여중에 다니는 양 선주입니다”

우리는 일제히 환호와 괴성을 지르며 라디오를 향해 코를 박고 모여들었다. 우리 친구 선주였다.

“아직 학생인데 낮에 어떻게 전화를 주셨네요?”

“네, 오늘 방학했어요”

“좋으시겠네요. 신청곡 말씀해 주시죠 “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누가 성공하든 듀란듀란의 노래를 신청하는 게 당연했다. 누구 하나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라이오넬 리치의 'Hello' 요“

우린 경악을 금치 못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해, 메가 히트곡이었던 라이오넬 리치의 ‘Hello'는 좋은 곡이었지만 우리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우리는 너도나도 모두 좋아하는 상업성에 반기를 드는 일을 멋이라고 자부하는, 언더그라운드를 지향하는 소녀들이었다. 그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변절행위나 다름없었다.

우린 당장 선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내가 진짜 듀란듀란의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를 신청할 계획이었거든. 진짜야! 근데 너무 떨려서 생각나는 제목이 그 노래밖에 없는 거 있지!”

메가 히트곡은 그렇게 지구 사람들을 ‘가스라이팅’ 하고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자신이 가스라이팅 당한 줄도 모른 채, 선주는 친구들 사이에서 영웅이 될 뻔했던 기회를 시원하게 날려 버렸다. 선주만 강 건너 고등학교에 배정되는 바람에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우리의 우정은 막을 내렸다. 그녀는 분명 좋은 대학을 가서 좋은 직업을 얻고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틀림없이 선주는 그녀만의 좋은 세상을 일구며 살았을 것이다.


그 시절을 꺼내보면 가장 보고 싶고, 찾고 싶은 친구 현경.

현경이는 2학년이 끝나자마자 전학을 갔다. 우리 중 공부를 가장 잘했고 나 못지않게 담임과 대립한 친구였다. 그녀는 유일하게 ‘듀란듀란’이 아닌 컬처 클럽의 ‘보이 조지’를 사랑했다. 누가 더 낫다 아니 다를 놓고 입씨름을 하긴 했지만 우린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신뢰했다.

그녀는 외모도 성격도 시크하고 나만큼 맷집도 좋았다. 담임의 모진 공격에도 끄떡 않고 맞붙는 바람에 나처럼 그녀 역시도 교무실 단골손님이었다. N여중 아이들의 집 대부분이 명일동 아니면 천호동, 길동인 반면, 현경이는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가는 잠실에서 통학을 했다. 딱 한번 그녀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일반적인 가정집이 아닌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 있는 우체국건물 2층이 그녀의 집이었다. 아버지께서 우체국장님이셨다.

평소 생각하던 그녀와 달리 가정에서의 그녀는 어른이었다. 부모님이 일찌감치 이혼을 하셨기에 엄마와 함께 살지 않는다고 했다. 더군다나 언니가 고3이라 지금은 자신이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는 것이다. 쌓인 설거지를 부리나케 하더니 볶음밥을 능숙하게 만들어 상차림을 한 그녀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봐왔던 친구들의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술을 핑계 삼아 서로의 속사정을 꺼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전에는 어리고 철이 없어 서로의 고민을 알았다고 한들 무심했을 것이다.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이기적일 만큼 아랑곳없이 원하는 세상만을 보고 있었다. 술기운으로나마 힘겨운 현실에 삿대질하는 친구를 반쯤 풀린 눈으로 보고 있자니, 어제 혹은 지난주 보았던 친구의 웃음이 떠올랐다.

‘내 친구는 강한 사람이었어…’

잘 살아가고 있기에 웃는 거였다.


오래전 함께였을 때처럼 친구들 얼굴을 맞대고 눈을 마주치고 싶다. 고달팠던 지난 세월, 잘 살아 보려 애썼던 시간을 무용담처럼 들려주고 싶다. 인생의 반을 넘긴 지금 밤새 막걸리 한잔과 함께 서로의 지난한 세월을 주거니 받거니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님의 사업이 부도가 나고 혼자 살기 시작 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들고 있던 삼십만 원이 드디어 동이 나 회사 면접 보러 갈 차비조차 없을 때였다. 약 올리듯 가을 더위가 굶주림을 부추기고 있을 때 마침 도진이가 같이 먹자며 천호동 리어카 햄버거를 사들고 왔다. 라면도 반으로 나누어 아껴 먹을 때라 천 원짜리 햄버거는 호사였다. 그녀도 형편이 그리 좋은 때가 아니었다. 우린 모두 IMF때 회사를 잃었고 취업난에 배를 굶주려야만 했다. 도진이는 허겁지겁 햄버거를 먹고, 담배 역시 쫒기 듯 피더니 아르바이트 간다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신발을 신고는 지갑에서 만원 지폐 한 장을 꺼내 방바닥에 무심히 툭 놓고 가버렸다.

꼭 필요할 때 쓰라는 그녀의 한마디가 공허한 자취방을 한참 동안 떠다녔다.

진작 했어야 했는데..

그녀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그때, 너 덕분에 내가 살았어.”




I've Been in Love Before … Cutting Crue

Try to Remember … 여명

If You Remember Me … Chris Thompson

Everybody Hurts … R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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