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이사를 참 많이 다녔다. 부산본가에서부터 외조부모님 댁인 신장(하남시), 삼양동과 미아리를 거처 강동구에 터전을 잡기까지 초등학생동안 5번의 전학을 했다.
자주 떠오르는 8살 때의 우리 집이 있다. 대문을 열면 기역자의 집 두 채가 있다. 한 채는 주인집이고, 다른 한 채는 여러 개의 문들이 건조하게 서 있고 그중 하나의 문이 우리 집이었다. 판자에 가까운 나무와 불투명한 유리로 만든 엉성한 미닫이문을 열면 작은 현관 겸 부엌이 나오고 신발을 벗고 한 계단 오르면 방이 있었다. 방에는 캐비닛 한 개와 내 눈높이 정도의 서랍장 한 개가 있었고, 천장에 주황색 빨랫줄이 대각선으로 방을 횡단하고 있었다.
이곳은 다세대 주택이고 여러 개의 문 안에는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살고 있었다. 단칸방에 우리 가족 외 넷째 이모도 함께 살았다. 어떤 집은 엄마, 아빠 그리고 두 소년과 할머니 할아버지도 함께 살았으니 우리 집 인구밀도는 준수한 편이었다. 마당에는 늘 아이들이 북적였다. 그 속에 나도 있고 언니도 있다. 화장실은 공용이었기에 아침저녁 화장실 대기 줄은 늘 만원이었다. 요강이 필수일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만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집 부부 싸움이 코 앞에서 하는 듯 생생했고 옆집 순이의 받아쓰기 점수를 모르는 이 없었었다. 집집마다의 비밀이란 게 눈치 없이 새 나가는 공간이었다.
40여 년 전, 누구나 못 살던 70년대 부모님들 또한 없는 형편임에도 자식교육에 게으름이 없었다. 배워야 잘 산다는 통념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우리네 부모들을 옭아매고 있는 셈이다. 집집마다 신문배달 오듯 누런색의 일일 시험지가 문 앞으로 배달되었다. 언니를 포함해 고학년 아이들은 주기적으로 매질을 당하고는 했는데 그게 다 그 시험지 때문이었다. 집집마다에서 나온 밀린 시험지가 화장실 문 앞에 수북이 쌓였다. 일일 시험지의 소임은 교육이 아닌 입주민의 뒤처리용으로 바뀌어 유용하게 쓰였다.
초등학생 2학년인 나는 식구 중 가장 먼저 귀가를 했다. 겨울이 되면 아랫목에 현란한 꽃무늬의 담요를 깔아 두었는데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 전에 이불속에 선물을 놓고 나가셨다. 보름달 빵과 초콜릿 우유였다. 내게는 점심이었고, 엄마에게는 어린 딸에게 점심밥을 챙겨 주지 못한 애달픈 마음이었다. 엄마의 시린 속과 관계없이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빵과 우유를 먹는 일이 하루 중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렇게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나면 바닥에 누워 빨랫줄을 하염없이 들여다 보고는 했다. 빨랫줄에 시선을 고정시킨 후 상상을 하면 몰입이 잘 되었다. 상상뿐 아니라 가끔은 노래를, 또 어떤 때는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9살에 휘파람을 마스터한 데에는 빨랫줄의 공이 크다.
함께 사는 20대 중반의 이모는 매우 쾌활했다. 이모가 퇴근하고 집에 오기만을 기다릴 정도로 우리는 합이 잘 맞는 사이였다. 그 시절엔 통금이 있었다. 밤 10시 이후엔 꼼짝없이 집에 갇혀 있어야 했다. 전 국민 취침 시간을 나라가 정해주었다. 고요한 밤, 골목 어딘가에서 들리는 ‘메밀묵~ 찹쌀떡~’ 아저씨의 맛깔난 목소리에 허기가 기승을 부려댔다. 이모는 가끔 잠을 청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목 놓아 아저씨를 불러 세웠다. 잠이 코끝까지 왔어도 이모의 “아저씨! 여기요, 여기!”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먹을 게 변변하지 않던 시절 달콤한 팥앙금 찹쌀떡이 어린아이의 행복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을지 누구나 상상 가능할 것이다.
짐작컨대 미아리 단칸방에서 엄마는 많은 고민과 좌절을 삼켜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 아랫목 이불속만큼 포근해진다.
삼양동에서의 두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다. 큰 이모네 계시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달동네이기는 했지만 마당이 있었고 꽤 넓은 마루도 있었다. 화장실은 여전히 마당 신세였지만 우리 식구만 사용하니 줄 설 일이 없었고 코를 틀어막을 만큼 악취가 심하지도 않았다. 이 집에서의 기억은 청각과 후각을 총동원한다. 어릴 때부터 빗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후다닥 이불 밖으로 뛰쳐나가 창밖을 내다보곤 했는데 이 집에서 열에 서너 번은 고등어 튀기는 소리였다. 실망도 잠시, 코를 후벼 파는 짜릿하고 비릿한 냄새에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왔다'였다. 형편이 나아졌는지 이 집으로 이사하고 난 후부터 고등어 튀기는 일이 빈번했다. 아침상에 고등어가 올라온다는 일이 어린 나에게는 부자가 된 기분을 선사했다.
마당에 핀 장미도 그런 기분을 북돋았다. 엄마는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오면 장미꽃 한 다발을 꺾어 거실 탁자 위에 보기 좋게 꽂아 두셨다. 장미 나무 사이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아무 근심 없어 보이는 엄마의 표정이 나에게는 평온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 시기에 독서의 재미도 알게 되었다. 거실장 한가득 동화 전집이 줄지어 서있다니 정말 부자가 된 줄 알았지만, 사촌들이 읽던 책들이 새 주인을 찾아온 것이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제 내 책이 되었으면 그만이지. 독서 취향도 선머슴 같아서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나 ‘보물섬’ ‘철가면’ ‘괴도 루팡’ 같은 모험 이야기에만 빠져들었다. 놀이도 다를 바 없어 구슬치기를 가장 좋아했다. 동네 아이들 구슬은 한 번쯤 내 주머니 속을 거쳐 갔을 정도의 출중한 실력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바지와 상의의 주머니 곳곳에 구슬이 가득했다. 엄마는 발견하는 족족 대문 밖에 내다 버렸고 나는 아이들이 주워간 구슬을 되찾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물고 엄지 손가락에 물집이 생길 때까지 하루 종일 구슬치기를 하곤 했다.
이 집에서 각인된 또 하나의 기억 중 하나는 처음 바나나를 먹었던 순간이다. 귀한 음식이었다. 다 먹고도 껍데기가 아까워 껍데기에 붙은 살을 앞니로 긁어먹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껍데기를 들고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도봉구 달동네의 좋은 추억은 여기까지가 마지막 기억이다. 5살에 헤어진 친아빠와 잠시 살림을 합쳤지만 몇 달 가지 못했다.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시 우리 세 모녀를 지옥에 몰아넣었다. 마당의 잡풀 위로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늦가을, 학교에서 돌아오니 마루에서 어른들이 서류를 주고받는다. 그는 어린 딸에게 인사도 없이 대문을 나섰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사를 갔고 할머니, 할아버지와는 다시 이별했다.
Home Sweet Home ... Motley Crue
Last Night On Earth … Green Day
Let It Grow … Eric Clapton
Time After Time … Cyndi Lauper
Dream On ... Aerosm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