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가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데.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지."
영화 '아비정전'에서 아비의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어쩌면 죽음만이 발 없는 새에게는 표류하는 자신의 운명을 멈추고 비로소 자유와 존재의 이유를 찾게 되는 필수 불가결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1986년 이른 여름, 어젯밤 tv에 나온 홍콩 배우 겸 가수인 ‘레슬리 챙’ 때문에 아침부터 학교가 시끌시끌하다.
물론 일부 소녀들은 늘 그렇듯 무관심했지만, 나를 비롯한 뜨거운 심장을 지닌 소녀들은 하루 종일 그에 대한 찬양과 호기심으로 혀가 닳아 없어질 판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청년인지 아저씨인지 구분가지 않는 아시아 남자 가수들 사이에서 그는 군계일학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는 윤기가 흐르고, 머리는 단정하고 세련되게 뒤로 넘겨 안 보면 섭섭할 반듯한 이마가 훤하게 드러나있었다. 인간 자체가 고급스럽다. 군더더기 없는 피조물이다. 천상의 피조물이 이런 사람 이겠구나 싶었다.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 홍콩이나 대만의 영화와 스타들이 다수 소개는 되었지만 성룡과 원걸, 홍금보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미남 스타는 없었다. 장 국영은 이미 80년대 초부터 홍콩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과 대만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에서 개최한 뮤직 페스티벌을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장국영이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게 된 때는 80년대 중반, 영화 ‘천녀유혼’과 ‘영웅 본색’이 개봉하면 서다. 동네 극장 간판에 걸린 ‘천녀유혼’에 홀려 당장이라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였다
고2 여름, 짝 연수는 학교에서의 대부분을 책상에 엎드린 채 지내는 친구였다.
그녀의 볼에는 눌린 자국이 없는 날이 없었고, 짧은 머리 한쪽은 늘 납작한 붓처럼 눌려있었다. 그녀는 선생님의 호통 속에서도 아랑곳 않고 잠을 청하는 대범한 친구였다. 우리는 꽤 호흡이 좋았다. 그녀 역시 나처럼 말대꾸 하나는 뒤지지 않았는데, 나의 말대꾸는 늘 길어서 화를 불렀고 그녀의 말대답은 짧아서 화를 불렀다.
“야 저기 자는 애 누구야!” “깨워!” “너 뭔데 수업 중에 자고 있냐?”
“왜요?”
“왜요? 학생이 수업 중에 자는 게 말이 돼?”
“왜요? 어때서요”
선생님들은 연수만 보면 일본 가요 그만 부르라고 농을 던졌다. 그녀가 입시 미술을 하기 때문에 밤 새 그림을 그리느라 잠이 부족 하나보다 라고 생각 했지만 아니었다. 가수 ‘신해철’을 흠모하던 그녀는 그를 위해 매일 밤 가사를 쓴다고 했다. 어느 날, 그녀는 노트 한 권 분량의 가사를 돌돌 말아 화통에 넣고는 해철 님께 전하러 갈 터이니 동행해 달라고 했다. 기꺼이 승낙했다. 해철 님의 집인 잠실 장미 아파트로 가는 버스 안에서 연수는 어쩐 일인지 졸지 않고 비장했다. 신해철 님은 집에 안 계셨다. 그녀는 실망했지만 나는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대신 친절한 어머님께서 전달해 주겠노라 받아주셨다.
여름 장마가 며칠 째 그칠 기미가 없고 낮도 밤인 것처럼 하루 종일 어둑한 날, 연수는 자기네 집에 가서 영화를 보자고 했다. 무슨 영화냐 물어도 그저 끝내주는 영화라고만 하는 걸 보니 야한 영화일 거라 예상했다. 친구들 여럿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TV앞에 둘러앉아 비디오를 넣었다.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성인물 근절 공익광고가 끝나자 중국풍의 노래와 함께 낯익은 남자의 얼굴이 화면을 채운다. 허름한 복장을 하고 있지만 귀티는 감출 수 없는가 보다. 몇 년 전, TV에서 ‘무심 수면’을 부르던 가수 레슬리 쳉의 영화 ‘천녀 유혼’이었다.
영화 속 여주인공 엽소천이 남자들의 혼을 빼앗듯 영화는 소녀들의 혼을 앗아갔다. 왕 조현은 또 얼마나 예쁘던지. 아름다운 두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는데, 영화 또한 영화라는 장르가 대중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재미가 전부 들어있었다. 로맨스, 판타지, 스릴, 액션, 거기다 영화 중간중간 흐르는 아름다운 주제가까지, 나무랄 데 없는 영화 종합 선물세트와도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자기 전에도 영화 장면들이 허공에서 수없이 재생되었다. 다음 날 그의 LP를 샀다. 무심 수면이 수록된 그의 앨범이었다.
뒤이어 개봉한 영웅 본색의 흥행으로 학교 앞 문방구에는 '장국영'과 '주윤발'의 브로마이드가 문구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에 홍콩 스타 전성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광고 출현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배우 장국영과 사랑에 빠진 순간은 영화 ‘아비정전’과 ‘패왕별희‘를 보고 나서이다. 잘생긴 배우를 좋아하는 유통기한은 짧다. 또 다른 미남 배우가 출현하면 기한 종료인 셈이니까. 잘생긴 얼굴과 상관없이 배우 장국영은 영화 속 인물이 되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배우로서 그의 역량이 커질수록 내 눈에 비친 그는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다. 곱상한 외모 뒤에 가려진 알 수 없는 슬픔과 고독함이 영화 속 그의 눈에서 느껴졌다. 1990년대 출현한 그의 영화를 보면 늘 공허함이 몰려왔다. 아비정전이 그랬고 패왕별희, 동사서독, 야반가성, 백발마녀전이 그랬다. 그의 눈빛에서 어딘가 사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2003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주말 동네 산책을 하던 중 폐업하는 비디오 가게를 지나쳤다. DVD 시대로 가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비디오로 영화를 보던 터라 비디오테이프 몇 개 살 생각에 가게로 들어갔다. 영화 좀 아는 사장님이셨다. 오래전 고전 영화와 예술영화가 유독 많았다. 대부분 가격도 저렴해 실컷 골라 담았다. 미셀 파이퍼와 룻거 하우어 주연의 ‘레이디 호크’,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 주연의 ‘메디슨카운티의 다리’,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모든 영화를 집어 바구니에 담았다. 리버 피닉스가 출연한 영화도 모두 담았다. 그리고 최고의 디스토피아 영화인 리들리 스콧 감독의 ‘Blade Runner'를 보고는 점점 신이 나기 시작하면서 주머니 사정은 생각도 않고 바구니에 영화들이 쌓여만 갔다. 10여 년 전 대여점에서 무려 5번이나 대여했던 숀 코네리 주연의 '붉은 10월‘도 고민 없이 담았다. 홍콩영화는 비디오 가게의 베스트셀러였기에 장 국영의 영화는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활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40여 개는 산 것 같다. 집으로 와 먼지가 쌓인 비디오테이프 구석구석을 닦았다. 이 영화들을 처음 봤을 때 당시의 좋았던 마음을 다시 내 앞에 모아 놓은 것만 같아 행복했다.
먼 훗날, 내가 늙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사라질 때를 대비해 영화들을 모아두기로 했었다. 노후 연금인 셈이다. 모아둔 마음을 다시 열어 과거의 좋았던 때를 열어 볼 수만 있다면, 덜 앙상한 영혼인 채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2003년 4월 1일,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 오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갔다.
밥을 먹기에는 너무 늦었고 출출하기는 해서 집 앞 작은 가게에서 3분 함박스테이크와 막걸리를 사 왔다. 막 먹으려던 순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너 뉴스 봤니?”
“아니, 왜?”
“너네 장국영 오빠가 죽었어”
황급히 TV를 켰다. 기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자살이라니..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의 얘기처럼 들렸다. 화면 속 홍콩은 이미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로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고 오랜 시간 사랑 하던 스타의 비보로 더욱 처량 맞게 보였다.
‘천녀 유혼’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상위에 올려놓고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눈물, 콧물 그리고 시큼하고 텁텁한 막걸리가 뒤엉켜 목을 타고 흐른다. 오빠를 잃은 내 눈물샘은 여러 달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툭하면 울고 길을 걷다가도 신발 등에 빗물 같은 눈물이 얼룩을 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만우절 장난처럼 거짓말 같다고 했다. 애정하는 스타의 죽음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닌데 유난히 비틀거렸다. 그의 팬이자 영화 기자인 어떤 이가 말했다. 자신의 청춘도 함께 증발해 버린 것 같다고. 그분의 감정을 나 역시 느끼고 있었다. 한번 도 마주친 적 없는,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 같지만 10대와 20대를 지나고 30대를 보내는 동안 내 삶 속에 그가 없던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스타를 잃은 것 이상의 허탈감과 무력감은 유독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비보가 한동안 세상을 휩쓸고 지나간 후, 끈적이는 여름밤에 아비정전을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아비의 뒷모습이 어찌나 처연하던지 화면 위로 빗물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의 죽음에 관련된 루머들이 시골 장터 뒷이야기들처럼 사방팔방 떠돌아다녔다. 믿을만하고 납득이 되는 루머는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출장을 핑계 삼아 홍콩을 가기로 했다. 마지못해 보내 주신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
“회사에서 매일 우느라 일도 못하고 자꾸 장국영 노래 틀어서 직원들도 힘들다고 하니 다녀오고, 다녀와서는 잊는 거야. 알았지? “
영화 ‘중경삼림’에서 임 청하가 묵었던 ‘청킹 멘션’에 짐을 풀었다. 도착하자마자 장 국영이 마지막 식사를 했다는 레스토랑 ‘퓨전’으로 갔다. 식당 점원에게 그가 먹은 메뉴를 묻고는 같은 음식을 시켰다. 아비정전 포스터 촬영지인 카페 ‘퀸즈’를 들른 후 그가 자주 다녔다는 ‘alla bar'에서 노래도 불렀다. ‘유심인’을 부르며 대성통곡을 하니 다른 테이블의 홍콩 사람들도 함께 불러준다. 매일 아침 그의 집을 들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나중엔 눈감고도 그의 집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태자’ 역에서 내려 그의 집을 향해 걷다 보면 꽃시장을 지나야 했는데, 차마 빈손으로 갈 수 없어 매번 꽃을 사갔다. 상인들은 장 국영의 집을 가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늘 꽃 한 두 송이 더 넣어주었다. 그의 마지막 흔적은 호텔 만다린에 있다. 호텔 꽃집에 들러 그가 평소 좋아했던 꽃을 샀다. 호텔 정문에 꽃을 들고 가면 사람들이 장소를 알려준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장소, 그의 피가 붉은 낙화처럼 흩뿌려져 있던 곳, 그곳에 꽃을 올려 두었다. 이미 많은 이가 꽃을 두고 갔다. 매일 많은 팬들이 그곳에 꽃을 두고 간다고 했다.
호텔 2층, 그가 종종 애프터 눈 티를 즐겼다는 라운지‘클리퍼’에서 똑같은 메뉴를 시켰다.
라운지 중앙에서 연세가 지긋한 멤버들로 구성된 악단이 재즈연주를 하고 있었다. 노래를 신청하고 싶다고 하니 할 수 있는 곡이면 기꺼이 해주겠다고 하기에 ‘월량대표아적심’을 신청했다. 장 국영의 팬이냐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자신들도 마음이 매우 아프다고 했다. 만다린 호텔에서 그 곡을 듣자니 눈물이 장맛비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와중에 빵과 함께 나온 장미 잼이 너무 맛있어 리필이 가능한지 물으니 먼 나라에 와 울고 짜고 하는 내가 딱했는지 판매하는 작은 사이즈의 장미 잼을 주셨다. 장 국영은 홍콩의 자랑이라는 말도 건넨다. 2003년에만 홍콩을 두 번 갔다. 그의 흔적이 남아있을 때 더 보고 싶어서였다.
2000년대의 시작은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그의 죽음과 교묘히 맞물린 시대의 변화가 내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소멸과 생성의 경계선에서 나는 사라지고 있는 쪽에 대한 연민이 더 컸다.
홍콩 영화의 르네상스는 1990년대 말부터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대중은 더 이상 왕 가위감독에게 열광하지 않았고 성룡은 할리우드에서 영어로 연기를 했다. 많은 홍콩 감독들 역시 할리우드로 진출해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다. 예술 영화 전용 극장들도 하나둘 문을 닫았고 시네필을 위한 진짜 영화 잡지 ‘키노’ 또한 장 국영의 죽음 이후 얼마 안 가 폐간했다.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과정은 씁쓸하다.
늦가을 찬바람이 불 때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스산하다. 어딘지 쓸쓸한 기분이 드네”
2003년은 그런 기분이 만연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계속 밀고 들어와 옷깃을 파고드는 것처럼 말이다.
장국영의 생일은 1956년 9월 12일이다. 신혼집 현관의 비밀 번호가 12956이었다.
남편이 가끔 묻는다. 어디서 나온 숫자냐고, 첫사랑 생일이냐고.
장국영은 나의 삶, 어딘가에서 평생 유영 할 것만 같다.
我 … 장 국영
風繼續吹 … 장 국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