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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by 레인송

20대 중반 무렵, 남자와 야반도주하려는 계획이 발각되어 방에 감금된 수현이의 방으로 면회를 갔다. 수현은 새우깡을 쉴 새 없이 씹으며 사랑의 도피에 대한 생생한 전말을 들려주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애가 타서 입술이 다 부르트셨던데 반해, 수현이는 무용담을 늘어놓듯 떠들어댔다. 마침 그녀의 오빠가 빌려 놓은 비디오가 있어 우리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잡담과 함께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영화는 한국에서 사랑받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Love Letter'였다. 감금당한 주제에 넉살 좋게 “오 갱끼 데스까”를 연발하는 친구 때문에 감흥 없이 본 게 두고두고 아쉬웠다.


개봉 30주년 기념으로 ’Love Letteer’를 극장에서 재개봉한다는 소식에 딸과 함께 극장으로 갔다. 며칠 전 주인공 ‘나카시마 미호’의 부고 소식에 안 그래도 생각나던 차였다. 다시 보니 이 영화가 왜 그토록 오랜 시간 추앙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느 지점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감정이 북받쳐왔다.

사랑을 잃고 그리워하는 여자 때문인지, 첫사랑을 오래도록 못 잊다 닮은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 때문인지, 아니면 미처 몰랐지만 뒤늦게 풋사랑임을 깨달은 여자 때문인지.




나의 10대 시절 속에 갓 피어난 개나리처럼 영원히 봄으로 남아있는 세 명의 소년이 있다.


한 명은 11살 소녀의 풋사랑 성훈이다. 봄에 옆 반으로 전학 온 아이였다. 유난히 하얀 피부와 갈색 머리, 그리고 갈색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었다. 그 아이의 표정은 늘 생글거리는 느낌이었는데 얼핏 보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지만 내 눈에는 천사의 미소였다. 오며 가며 티 안 나게 그 아이의 얼굴을 찾느라 눈동자 꽤나 굴리고 다녔다. 여름방학이 되자 그 녀석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텅 빈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를 타며 그 아이의 이름을 반복해 속삭였었다. 얼마 안 가 어린 소녀의 짝사랑은 반짝 터지다 마는 싸구려 폭죽처럼 자연스럽게 식어버렸다.


중학생이 되고 5월 어느 날, 명일동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그 아이를 보게 되었다. 여전히 뽀얀 피부에 생글거리는 얼굴이 그대로였다. 키가 자라고 젓 살이 빠진 소년은 더 예뻤다. 잘 생겼다는 표현보다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릴 만큼 곱상한 얼굴이었다. 우린 눈이 마주쳤다. 나는 죄라도 지은 사람 마냥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우리가 다시 마주친 곳은 몇 달 후 구립 도서관에서였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야만 했다. 집에 있으나 도서관에 가나 공부 안 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효도한다 생각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어제 엄마가 사주신 하늘색 후드티와 치마를 입었다. 짧은 머리에 까치집까지 짓는 바람에 예쁜 옷이 딱하리만큼 안 어울렸다.


구립 도서관은 남녀가 다른 층을 사용했지만 매점은 공용이었다. 혈기왕성한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연애 성지가 바로 도서관 매점이었다. 나는 듀란듀란의 열혈 팬이었기 때문에 이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터였다.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없는 척했다. 듀란듀란과의 의리를 위해서였다. 도서관 매점과 입구에서 그 아이를 종종 마주쳤지만 일부러 시선을 무관심하게 비껴 보냈다. 남몰래 품었던 풋사랑이 머쓱해 더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 폐관 시간인 저녁 6시가 되어 집에 가려는데 한 무리의 소년들이 도서관 입구에 서성이고 있었다. 그 속에 성훈이도 있었다. 친구와 고덕동에서 명일동으로 이어진 대로변을 걸었다. 뒤따라오는 소년들이 신경 쓰였지만 모른 채 걸음을 옮겼다. 소년들은 뒤에서 번갈아 가며 우리를 향해 수줍은 고함을 질러댔다.

“시간 있음 얘기 좀 하자”

“성훈이가 너랑 만나고 싶데!”

“성훈이가 너 좋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3년 전 여름 방학이 생각이 났다. 텅 빈 놀이터에서 옹알이하듯 소년의 이름을 수십 번 읊조렸었다. 보고 싶어서. 지금 그 소년이 나를 향해 고백을 하고 있다.

‘머리 길고 뽀얀 피부의 예쁜 소녀들도 많은데 왜 나일까? 내가 노는 애로 보이나?’

진심이 어떻든 간에 그 상황에서 나는 무조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옆에 친구만 없었어도 당당히 물었을 텐데.

‘만나서 뭐 할 건데?’

‘내가 왜 좋은데?‘


배재 학당을 지나 직업훈련원을 지날 때쯤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더니 누구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내 볼에 뽀뽀를 하고는 바람처럼 다시 뒤돌아 뛰어갔다. 그 아이였다. 10월 가을바람에 냉랭하던 볼이 소년의 입맞춤으로 다시 봄기운이 돌았다. 열기였을 지도.

그 순간, 소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내 시선은 뛰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쫒았다. 소년과 친구들은 괴성을 지르며 질주하더니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바보들.

친구는 집에 가는 내내 소년들을 향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 신경은 온통 소년의 입술이 닿았던 볼에 가있었다. 마치 내 볼이 소년의 입술에 입맞춤하기라도 한 듯 그 아이의 마음이 신경 쓰였다. 그 사건 이후 우리는 도서관에서 몇 번 더 마주쳤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시선을 피했다.


영화 ‘Love letter'에는 두 명의 여주인공이 있다. 한 명은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과거를 쫒는다. 다른 한 명은 전자의 여주인공을 위해 남자의 과거를 상기하고 그녀에게 들려준다. 그 과정에서 남자의 첫사랑이 후자의 여자주인공임이 밝혀지고 그녀 또한 남자를 향한 어린 시절 자신의 감정이 풋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남자가 소년이고 자신이 소녀였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소년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여자는 울음을 터뜨린다.


소년이 몰고 온 10월의 바람이 내 볼에 닿았을 때, 소년의 예쁜 얼굴을 원 없이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숨겨야 했던 그때가 어느새 40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여전히 생글거리는 미소를 간직하고 있을까? 뽀얀 피부 위에 나처럼 주름이 있을까? 그때 나는 왜 진심을 꺼내지 못하고 쓸데없는 곳에 용기를 낭비했을까. 친구라도 됐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먼저 너를 많이 좋아했어.’라고 말해줄걸 그랬다.




또 한 명의 소년이 있다. 달콤한 도넛 향처럼 잊히지 않는 얼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 친구들과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종로를 갔고 뮤직 비디오를 보기 위해 도넛 가게 윈첼에 자주 드나들었다. 갈 때마다 마주치는 녀석들이 있었다. 대다수가 약속 장소, 혹은 도넛을 포장해 가거나 먹기 위해 오가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와 그 녀석들은 달랐다. 매주 오다시피 하고 오래 머물다 가는 걸 보니 같은 팝 마니아임에 틀림없었다. 특히 자주 눈이 마주치는 아이가 있었다. 잘생기고 점잖은 소년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 친구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몰래 훔쳐보려 애썼지만 분명 그 친구도 나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친구 때문에 윈첼에 더 자주 갔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윈첼의 2층으로 가는 좁은 계단에서 그 아이와 정면으로 부딪힐뻔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본 그 아이의 친구들이 일제히 소리를 냈다.

"올~"

사춘기 녀석들의 장난기 정도로 여기던 차에 그중 한 녀석이 나에게 쪽지를 건넸다. 옆모습이 예쁘시네요, 어쩌고 저쩌고, 한번 만나자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쪽지의 주인공이 그 친구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평소 나와 자주 눈이 마주치던 아이는 그 순간 무리 중 혼자만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흔쾌히 그러자고 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듀라니즈고 동지들이 옆에 있었다. 아무 반응 없는 나의 태도가 무시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까 괴로웠다.

'나는 왜 혼자 다니지를 못하고 늘 친구와 함께 일까'

잠시 한탄을 했지만 스스로 남자 친구 사귈 깜냥은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꼴통이긴 했지만 은근히 보수적이었다. 이후 그 아이를 여러 번 마주쳤지만 짧은 눈 마주침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뻘쭘한 표정의 그 녀석을 볼 때마다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설익은 풋 복숭아처럼 이도저도 아닌 썸과 함께 그렇게 중학 시절의 마지막 겨울 방학이 끝 나가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난 후부터 윈첼에 가는 일이 점점 뜸해지고, SM이나 혜화동의 맥스웰을 더 자주 드나들었다.

어쩌다 윈첼을 가더라도 그 아이를 마주치지는 못했다.


2년 후, 안국동 한적한 길을 걷고 있을 때 저 앞에서 걸어오는 그 아이를 보았다.

키가 훌쩍 커 나보다 머리 하나 더 보탰을 만큼 키가 컸고 이목구비는 똑같지만 전보다 얼굴이 더 갸름하니 수척해 보였다. 아름다운 청년이 되어있었다. 여전히 눈이 깊고 어른스러운 인상이다. 멀리서도 그 아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지나쳐 멈추지 않고 걸었다. 들키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그 아이도 나를 알아봤을 것이다.

용기 내서 말을 걸어 볼걸 그랬다.

잘 지냈냐고, 나 기억하냐고.


이십여 년 만에 친구와 종로 3가 일대를 음미하듯 걸었다. 윈첼의 그 소년을 떠올렸다.

입안에서 살살 녹아 없어진 달콤한 나의 10대 속에 그 소년이 있어 좋다.

가끔 그 아이의 중년을 상상해 본다.





나의 마지막 소녀시절, 마지막 소년 준서가 있다.

고3 이랍시고 비싼 사설 도서관을 다니던 때였다. 학교 친구들 말고도 어릴 때 한 동네 살던 언니 두 명도 재수생활을 그곳에서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화장을 곱게 하고 독서실로 출근을 했다. 하루는 대단한 사건이라도 벌어진 냥 수선스럽게 떠들더니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맘에 드는 남자애들을 독서실에서 발견했다면서 다리 좀 놓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자신들은 재수생 신분이라 학생에게 추근거리다 들키면 퇴소라고 했다. 위층 남학생 층에 올라가 HY고에 다니는 성도와 준서를 불러 달라 한 후 녀석들에게 쪽지를 건넸다. 재수생들은 녀석들 얼굴을 본 내 소감이 궁금했던지 연신 질문을 퍼부었다. 한 녀석은 가무잡잡하고 나머지 한 녀석은 허여멀겋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인상에 남는 외모는 아니었다. 며칠 후 녀석들과 만난 재수생들은 더 들떠 있었고 공부는 더 뒷전이었다. 잘 만나는가 싶던 어느 날, 두 재수생들이 다투기 시작했다. 둘 다 한 녀석을 좋아하는 게 화근이었다. 성도를 사이에 두고 쟁탈전이 하루 이틀 길어지더니 급기야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인가 싶어 유심히 봐도 내 눈엔 영 아니었다.


재수생들의 신경전이 한창일 때 독서실 앞 놀이터에서 우연히 두 녀석을 마주쳤다. 자초지종을 묻자 내심 억울하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듣자 하니 주로 떠드는 녀석은 성도였다. 준서는 옆에서 말없이 먼 산만 보고 있었다. 녀석들과 오며 가며 한두 마디 나누다 보니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나는 남자아이들과 통하는 부분이 많아 금방 대화의 물꼬를 트는 편이었는데, 이유는 내가 헤비메탈과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남자애들보다 롹 음악과 헤비메탈에 박식했고, 모든 스포츠에 열광했지만 특히 해외 3대 축구 리그는 꽉 잡고 있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녀석들도 헤비메탈을 좋아했다. 내가 음악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면 둘은 존경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형님이라 부르며 치켜세우고는 했다.


우리는 음반을 공유하고 좋아하는 곡을 녹음해 서로에게 선물하기도 하며 제법 쿵 짝이 잘 맞는 친구가 되어갔다. 녀석들과는 1989년의 가을과 겨울을 줄기차게 붙어 다녔다. 거의 매일 드나드는 단골 카페에서 비록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때 묻지 않은 우정을 쌓았다. 성도는 늘 웃기는 녀석이었다. 왜 재수생들이 이 친구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반면 준서는 매사 진중한 아이였다. 웃음도 크지 않고 표현도 작은 친구였다. 결국 가장 좋은 대학에 진학한 친구도 그였다. 성도는 집이 꽤 멀어 독서실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갔고 준서는 늘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자신의 집은 우리 집을 지나 좀 더 가면 된다며 항상 집에 갈 시간을 미리 묻곤 했다.


독서실에서 나와 집까지 가는 길은 엄청 큰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다. 그 길은, 여름은 플라타너스 나무의 그림자로 덮이고 가을은 플라타너스나무의 마른 잎으로 덮인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길이다. 깊은 밤의 그 길은 고요하다. 차도, 사람도 거의 없다. 그래서 그 시간에 걷는 그 길이 더 맘에 들었다. 걷는 내내 떠드는 사람은 나였다. 그는 항상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내 옆에서 말없이 발맞춰 걸었다. 어느 순간부터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준서를 찾을 정도로 우리의 심야 산책은 오래 지속됐다. 학력고사가 끝나고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붙어 다녔다. 사람들은 내가 둘 중 누군가와 사귄다고 생각했지만 단연코 이성으로 녀석들을 바라본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곧 대학 진학을 한다고 생각하니 나도 슬슬 변신을 시도하고 싶었다. 귀 밑으로 머리를 길러 본 적 없는 선머슴 같은 이미지를 떨쳐 낼 때가 온 것 같았다. 머리를 처음으로 귀 밑까지 길렀다. 드디어 귀 뒤로 머리를 넘기는 데 성공하니 바가지 머리가 되었고 과감히 파마를 감행했다. 요즘 핫한 배우‘티모테 샬라메’ 헤어스타일이다. 나의 변화를 본 주변 사람들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처음엔 호탕하게 웃고 다음은 더 짓궂은 잘 생긴 소년으로 보인다는 평이었다. 가발 같다는 평이 가장 많았다. 성도는 가장 크게 웃은 녀석이다. 툭하면 뽀글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비비는 통에 나에게 무릎을 수차례 까이면서도 장난을 그치지 않았다. 나의 뽀글거리는 머리를 본 준서는 큰 아빠처럼 그저 지긋이 웃고 말았는데 밥 먹는 도중 차분한 톤으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볼수록 예쁜데”

낯 뜨거운 멘트라며 성도와 내가 야유를 보냈다. 나는 스타일의 변신을 꾀한 후 바람이라도 난 듯 세상 구경에 나섰다. 동네에 머무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붙어 다니던 녀석들과도 2주 넘게 연락조차 안 하는 날이 이어졌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틀림없이 또 무언가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대학에 적을 두고 나서야 동네나 어슬렁거리는 코흘리개 신세에서 벗어났다.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대학 새내기 생활에 정신 못 차릴 동안 우리 셋은 서로를 조금씩 잊어갔다.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귀가하니 책상에 메모지가 놓여있었다. 군 입대하며 전화했다는 준서로부터의 연락이었다. 그날 밤, 이불속에서 1년 전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을 들여다보며 불현듯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 준서와 내 모습이 그리워졌다.

나의 밤 산책을 말없이 지켜주던 아이.

이후 한참이 지나 우연히 마주친 성도로부터 준서의 집이 우리 집과 정 반대였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자신도 군에 곧 입대한다는 말과 함께 언젠가 준서와 자신 모두 제대하면 함께 보자고 했다. 녀석들과의 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작년 가을, 그간 잊고 있던 준서가 느닷없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마음 깊숙한 곳, 파편처럼 흩어졌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 아이의 얼굴, 미소와 말투, 즐겨 입던 회색 운동복 바지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부드럽던 눈빛까지 마구 튀어 오르더니 사무치게 그립기 시작했다. 친구의 귀한 배려와 사랑을 함부로 가늠해서 미안하고, 그 예쁜 마음을 알아봐 주지 못해 미안하다.

두 달 가까이 그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노트에 필사하듯 옮겨 적었다.




재작년 늦가을 어느 날, 딸아이의 교정치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미 해가 지고 딸아이는 옆에서 잠이 들었다. 명일동 플라타너스 길을 생각하던 차에 라디오에서 오지 오스본의 ’Goodbye to Romance'가 흘러나왔다. 추억이 많은 곡이다. 노선을 바꿔 명일동으로 향했다.


때 묻지 않은 영혼이 살던 동네.


30여 년 전, 독서실을 나와 집으로 가던 길 그대로 천천히 차를 몰며 창밖 풍경을 있는 힘껏 주워 담았다. 횡단보도를 건너 학교 모퉁이를 돌면 드디어 나의 플라타너스 길이 있다. 플라타너스는 예전과 똑같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일부가 담긴 포대자루에 둘러싸인 채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둥은 더 두껍고 단단해졌다. 둥글게 움츠린 채 말라비틀어진 플라타너스 마른 잎들이 장미덩굴 위에 제 멋대로 널 부러져있는 모습이 30여 년 전 그대로다. 음미하듯 천천히 차를 몰았다. 수천 번 오가던 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 아무리 늦은 시간이어도 길의 부름이라도 받은 것처럼 걷기를 망설이지 않던 불가항력의 힘을 지닌 길, 그 길 한가운데 서서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 10대 소녀였던 나를 마주쳤다. 그리고 소녀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길과 함께 그 시절의 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눈물이 흘렀다.


그 소녀는 좋은 아이였을까, 꿈이 많던 아이였을까, 왜 그리 철이 없었을까. 그 길 위에서 좀 더 많은 다짐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좀 더 진지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다른 내가 되었을까.

여전히 길은 많은 상념을 던진다.


300m 정도의 그 길을 지나면 아파트 상가가 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재건축이 안 된 아파트라 상가도 그대로였다. 환하게 빛을 내뿜는 상가를 보니 반갑고 눈시울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상가 1층 모퉁이에는 뻔질나게 드나들던 단골 레코드가게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을 그곳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큰 대로까지 이어진 플라타너스 행렬이 끝나면 배재 학당이 정면에 서있다. 배재 학당을 지나면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우리 가족의 마지막 서울집이 보인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집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작지만 내가 만든 우주가 거기 있다.




이 길 위에서, 10대 시절에 나에게 와주었던 아름다운 소년들에게 외치고 싶다.


“오겡끼 데스까! 와타시와 갱끼 데스! “


“잘 살고 있니? 나는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


“보고 싶다. 너희들이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정말 보고 싶어”



Never Surrender … Cory Heart

My Girl … The Temptation

What Would I Do? … Strawberry Guy

Girls & Boys … Blur

Panic … The Smith

After Love Has Gone … Earth, Wind &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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