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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게 죄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by 레인송

뉴스에서 네팔의 반부패 시위 군중들을 덮친 하얀 최루탄가스를 보며 나도 저 군중 속에 있는 것처럼 재채기가 나왔다. 80년대의 우리나라처럼 네팔도 곧 많은 변화가 오겠지. 그 시절, 누군가는 개혁의 바람에 기꺼이 뛰어들었지만 나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세상 일에는 전혀 무관심했다. 나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수현이에게는 두 명의 오빠가 있었다. 첫째 오빠는 명문 S대 법대생이고 둘째 오빠는 K대생이다. 수현인 강원도 감자 같은 첫째 오빠보다 곱상하게 생긴 둘째 오빠 자랑을 유독 많이 했다. 언젠가부터 둘째 오빠 자랑이 차츰 사라지더니 느닷없이 동물원 구경 가듯 오빠 구경을 하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어디로 오빠 구경 가자는 건데?"

"오빠 학교. 걔 머리 삭발하고 교문 앞에서 석고대죄 자세로 시위하고 있거든"

"왜 그러고 있데? 뭐 잘 못했데?"

"걔 데모하잖아. 학교 회장 되더니 집에도 안 들어오고 교문 앞에서 저러고 앉아 있나 봐. 엄마가 오빠 옷이랑 돈이랑 갖다주래. 같이 자자"


우리는 수현이와 세트로 둘째 오빠에게 늘 무시당하는 처지였기에 수현이의 제안을 냉큼, 기꺼이 받아들였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큰 언니, 오빠들의 지성의 터전인 K대학에 도착했다. 학교 주변이 어수선했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한 무리의 언니 오빠들이 전단지를 나눠주었고, 거리 곳곳에 빨간 글씨의 현수막이 비장한 자태로 가로수 사이에 팽팽히 버티고 있었다. 긴장감이 돌았다. 대학 교문은 중, 고등학교 교문과 사뭇 다르게 위엄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 곱상했던 동네 오빠가 맨바닥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수현이 말대로 눈을 지그시 감고 미동조차 없는 그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수현이는 오빠를 보자마자 "저 미친놈" 하고는 오빠 앞에 서더니 봉투를 내밀며 "야! 엄마가 갖다 주래"

눈을 뜬 오빠는 말없이 수현이를 눈빛으로 갈구었다. 우리를 힐끔 본 오빠가 한마디 한다.

"한심한 것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위험하게"

오빠는 친구들 데리고 어서 가라고 소리치고는 다시 눈을 감고 비장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수현이의 둘째 오빠는 지명 수배까지 받는 유명한 데모쟁이였다. 우리는, 동네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데모쟁이. 우리가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사태가 더욱 심각해져 수현이의 집에 형사들이 수시로 찾아오고 집안 곳곳을 수색하기도 했다. 수현이의 부모님은 둘째 오빠도 걱정이었지만 첫째 오빠에게 불똥이 튈까 노심초사하셨다. 첫째 오빠는 더욱 몸을 사리고 학업에만 매진했다. 수현이는 수년간 둘째 오빠의 상황을 우리에게 보고했다. 우리에게 오빠는 일종의 가십거리였다.




강 건너 한양대와 건국대 일대서 시위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 동네까지도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하얀 연기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후춧가루를 뿌린 것처럼 느닷없이 코가 맵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 시절 국민 필수품은 아마 손수건이었을 것이다. 코로나 때의 마스크처럼, 없으면 절대 곤란한 필수품이었다. 여차하면 눈과 코, 숨구멍을 막아야 했고 줄줄 흐르는 눈물, 콧물을 닦아야 했다. 최루탄이 왜, 어디서, 누가 쏴 대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 또한 세상의 일부처럼 받아들였다. 황사처럼 말이다.


어른들은 대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데모나 한다며 욕을 했다. 뉴스에서는 서울시내 상인들이 데모 때문에 며칠 동안 장사를 못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하소연하는 기사가 종종 보도되었다. 수현이는 둘째 오빠 때문에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간다며 허구한 날 오빠 욕을 쏟아냈다. 오빠는 우리에게, 동네 어른들에게 그저 문제아였다. 올림픽이 성황리에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오빠가 잠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교도 휴학하고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축제 분위기인데 오빠는 사활을 건듯 국가를 상대로 투쟁 중이었다.




1989년 봄 주말, 도진이와 수현, 승희와 나는 버스를 타고 왕십리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종로 나들이에 한껏 신이 났다. 버스가 성수동을 지날 때쯤 허연 최루탄 가스가 순식간에 버스를 덮쳤다. 손수건도 속수무책이었다. 한양대를 코앞에 둔 성동교를 지날 때부터는 앞이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최루탄이 사방에 깔렸다. 눈물과 콧물, 신음이 멈추지 않았다. 성동교를 지나자마자 버스는 멈췄고 기사님은 내려서 되돌아가라며 문을 열었다. 승객들 모두 버스에서 내렸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야만 했다. 꼴통들은 겁도 없이 정면 승부를 택했다. 한양대만 지나면 시위가 잠잠할 터이니 택시를 타고 기어코 종로를 가기로 말이다. 우리는 머리 쓴답시고 골목길을 통해 한양대 일대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앞뒤 분간 없이 그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골목길을 헤매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시민과 데모하는 언니, 오빠들도 최루탄에 괴로워하며 골목을 뛰어다녔다. 그들은 그 와중에도 저항의 소리를 지르며 치타처럼 빠른 속도로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행군하듯 뛰어다녔다. 분비물로 얼굴이 엉망인 채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걷는 듯 뛰어가던 어느 언니도 '물러나라 물러나라'라며 울부짖었다.


어디선가 함성 소리가 거세지더니 비명 소리도 커졌다. 갑자기 골목으로 사람들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었고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제야 우리는 겁에 질려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이제 어떡하지'만 연신 뱉어냈다. 그때 한 무리의 언니, 오빠들이 우리에게 뒤 따라 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들을 따랐다. 한참을 달려 어느 빌라 지하 1층 집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어린 우리들부터 얼굴을 씻게 했다. 그곳은 그중 한 분의 자취집이었다. 작은 원룸에 열명 정도가 있으니 바깥 못지않게 최루탄이 방 안의 공기를 장악해 버렸다. 세수를 하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그들은 시위대가 흩어졌으니 몇 시간 후면 정경들도 사라질 거라고 했다. 서너 시간이 지나도 최루탄은 방에서 사라질 줄 모르고 맴돌았다. 라면도 빵도 제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의 사연을 듣고는 많이 웃었다. 누군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너네 뭐가 돼도 되겠다, 야"

이상하게 그 말을 듣고 창피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기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바깥이 조용해지고 한참이 지나자 어떻게 우리를 집에 보낼 것 인지 논의가 시작되었다. 두 명의 언니가 나서서 우리의 귀가 작전을 책임지기로 했다. 언니, 오빠들은 한 동안 이 근처는 얼씬도 말라는 당부의 말을 해주었다. 우리는 무학 여고 근처에서 언니들과 헤어졌다. 다행히 우리 동네 가는 버스가 있었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어디서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쓰고 왔냐며 야단을 쳤다. 씻어도 씻어도 맵고 쓴 연기가 사라지지 않고 쏘아 댔다. 자려고 누우니 언니, 오빠들 생각이 났다. 무사히 집에 갔는지, 그들의 내일은 또 어떨는지. 문득 수현이가 골목을 질주하다 말고 우리를 붙잡고 한 말이 생각났다.

"얘들아 우리 찢어져서 도망가자"

"왜? 왜 찢어져?"

"나는 오빠 때문에 블랙리스트 집안이잖아. 나랑 같이 있다 저 새끼들한테 걸리면 너네까지 뒤집어써"

도진이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큰 소리로 대꾸한다.

"야! 우리 미성년잔데 왜 잡혀가?"

내가 거든다. "잡생각 말고 빨리 걷기나 해!"

성질이 더러워도 수현이가 우리의 친구인 이유가 있다.




1994년 여름 토요일, 종로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이 카페가 너무 좋아서 수개월 대기를 한 끝에 일하게 된 곳이다. 이어서 친구 주연이와 승희도 불러들였다. 손님이 많으나 적으나 상관없이 이곳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오전 11시 오픈 준비를 막 끝내고 다 같이 창가 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요란한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성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곧이어 최루탄 가스가 스멀스멀 길바닥에 깔렸고 가스와 함께 사람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길 건너 을지로 3가에서부터 사람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우리는 얼른 카페 현관의 도어록을 잠갔다. 질주하는 그들은 이미 최루탄에 노출되어 눈물, 콧물로 몹시 괴로워했다. 우리는 가게 문을 다시 열어 지나가는 이들에게 휴지를 건넸다. 사람들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겁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멀리서 정경들이 보였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가게로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삽시간에 십여 명이 가게로 들어왔다. 우리는 가게 문을 닫고 재빨리 셔터를 내렸다. 그들은 대부분 내 또래이거나 더 어린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예전 수현이의 둘째 오빠처럼, 한양대에서 시위하던 언니, 오빠들처럼 사회 정의 실현과 민주 시민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투쟁 중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은 일이라고는 그들에게 휴지를 주고 음료를 대접하는 일이었다. 수개월째 부재중인 사장님이었기에 가게는 아르바이트생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비록 사장은 아니지만 카페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컸기에 가게는 잘 돌아갔다. 평소에 잘 지켜나간 가게이니 그날도 가게를 위해 의로운 일을 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마시고 싶은 음료를 물었다. 그들이 엉망이 된 얼굴을 돌보고 마음을 가다듬을 동안 우리는 핸드 드립 커피를 내리고 음료를 만들었다. 우리 카페는 원두 종류가 10여 개나 되고 핸드드립을 고수하는 커피 맛집이었다. 커피를 마시는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까의 공포는 사라지고 커피맛을 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카페를 나서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들 중 일부는 이후 다시 카페를 찾았다. 우리에게 간식을 건넨 후 친구와 함께 커피 맛을 음미하며 웃는 그 사람 얼굴에서 우리를 구했던 한양대 언니, 오빠들 얼굴이 비췄다.




1987년 봄과 여름, 하루가 멀다 하고 한강을 건너왔던 매캐한 가스에도, 1989년 목숨이라도 내놓은 사람들처럼 '물러나라'를 외치며 항쟁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는 그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기만 했다. K대학 교문 앞 결의에 찬 수현이의 오빠도 나에게는 그저 구경거리였을 뿐이었다. 심지어 20대가 되어 마주친 시위 앞에서도 나는 영문도 모른 체 그저 그들이 딱해 가게 문을 열어주고 음료를 나누었을 뿐이다. 세상과 등지고 산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무심했는지.


동화 작가이신 권 정생 선생님께서 광주의 한 소년에게 쓰신 편지가 있다. 5.18 광주 항쟁 때 아버지를 잃은 5살 소년의 사연을 뒤늦게 알게 된 선생님께서 소년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 속에 이런 글귀가 있다.


'정말 우리는 몰랐다고 말해도 될까'




20대 중반, 수현이가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 약 먹고 죽는다며 난리 치다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병원에서 우연히 둘째 오빠를 마주치게 되었다. 30대가 된 오빠는 신수가 훤해 보였다. 오빠는 생전 없던 미소로 우리를 보더니 명함을 한 장씩 나눠주었다. 직장도 없이 백수로 지내는 줄로만 알던 오빠는 지역구 청년 의원이 됐다면서 자신의 정당을 밀어 달라는 당부를 했다. 명함 속 그의 소속은 한나라당이었다. 도진이가 명함을 훑더니 한마디 한다.

"뭐야, 변절했네?"

수현이가 쏘아붙인다.

"애국 자니까 다 생각이 있겠지"




희생을 감수하며 독재와 부패에 맞선 사람들을 괴롭히던 최루탄 가스에 툴툴 데던 철딱서니 시절을 참회한다. 그들 덕분에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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