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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 서서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by 레인송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빌보드차트와 아메리카 탑 40의 차트를 줄줄 꿰는 열혈 팝 애호가였다. 카세트플레이어 없는 길과 밤은 상상할 수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팝송 전문가나 다름없었다.


80년대 초반, 초등학생에게 용돈은 부르주아들에게나 있을법한 호사였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일주일에 오천 원을 받게 되었다. 받을 때는 큰돈이었지만 친구들과 분식집 한, 두 번 가고 트램펄린 두어 번 타면 금세 동이 났다. 갖고 싶은 LP나 카세트테이프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 서랍 속은 듀란듀란의 사진과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바쁘게 일하는 엄마를 둔 어드밴티지라고 해두자. 똑같은 자습서 핑계를 서너 번 들이밀어도 엄마는 기억하지 못하고 그때마다 돈을 주셨다. 먹고사느라 정신없는 엄마의 뒤통수를 친 셈이다. 덕질은 어쩔 수 없이 불효를 동반한다.



빽판의 성지 세운 상가와 청계천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종로에 발을 들였다. 가난한 팝 마니아를 위한 최후의 보루가 바로 세운상가와 청계천의 리어카 상점이었다. 그곳은 일명 '빽판'의 성지였다. 빛바랜 겉표지와는 달리 잘만 고르면 반의 반 값으로 원하는 LP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음악의 시조는 역시 록 이라며 록 밴드의 앨범을 열심히 사 모았다. 레드 제플린과 딥퍼플, 레인보우,비틀즈와 블랙 사바스 등의 앨범을 신줏단지 모시듯 했다.



레스토랑 'SM과 '윈첼' 도넛가게

1980년대 중반, MTV의 등장으로 듣는 음악에서 이제는 보는 음악으로 바뀌게 되었다. 듣기만 했을 때와 뮤직비디오를 보며 듣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영화의 OST가 관객의 감정을 한층 더 깊이 있게 끌어당기듯 뮤직비디오는 음악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지금과 달리 다양한 장르의 TV채널이 많지 않은 시대였다. 내 기억으로 팝 뮤직 비디오를 접할 수 있는 채널은 AFKN의 'Soul Train'과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토요일 오후 신곡 뮤비를 소개하는 프로, 한국의 공중파 채널에서 방영했던 ‘지구촌 뉴스’의 해외 가수 소개 코너가 전부였다. 팝 마니아들은 뮤직비디오가 재생되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나처럼 팝 마니아인 사촌오빠로 부터 입수한 장소가 종로에 있었다. 한 곳은 레스토랑 ‘SM’이고 다른 한 곳은 SM 옆 건물에 새로 생긴 ‘윈첼 도넛’ 가게였다. ‘SM’에서 틀어주는 영상을 ‘윈첼’에서 송출받아 보여주는 거라 어딜 가나 상관없었다. 다만 ‘SM’에서는 노래 신청이 가능한 대신 음식 가격이 비싸 우리 같은 학생이 발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윈첼’은 도넛 하나만 시켜도 하루 종일 앉아 뮤직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지만 곡 신청은 할 수 없다. 돈 없는 중학생 때는 ‘윈첼’이 제격이었고 용돈이 그나마 후한 여고생 때는 ‘윈첼’과 ‘SM’을 번갈아 드나들었다.


윈첼 도넛은 아주 작은 2층 건물이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달콤한 도넛향이 소녀의 들뜬 마음을 한결 더 부풀렸다. 1층 좌석은 창가에 바 형식의 4자리 정도뿐이었고 2층도 테이블 대여섯 개 정도와 창가 자리 7석 정도였다. 주말엔 대부분 만석이라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자리가 났다. 어찌 됐든 협소한 덕에 어느 자리에 있어도 1m 남짓한 크기의 작은 스크린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피카디리 극장과 이웃하는 윈첼의 2층 창을 통해 피카디리 광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말의 낮을 이곳에서 보내고는 했다. 사실은 이곳에 뻔질 나게 드나들었던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서울에 팝 애호가가 소녀들만 있던 게 아니었다. 이곳은 우리 같은 일명 죽순이처럼 죽돌이들도 많았다. 오고 가는 눈빛 만으로도 밤잠 설치는 썸이 난무했다.


중학생 때는 윈첼을 주로 갔다. 윈첼은 협소하고 패스트푸드점 특유의 번잡스러운 장소였지만 낭만이 있었다. 무엇보다 저렴하고 오래 머물러도 눈치 주는 이가 없었다. 어리고 가난한 팝 마니아들의 성지라고나 할까.

윈첼은 헐값으로 우리에게 낙원을 대여해 주었다.



낭만의 윈첼 시대가 저물고 어른의 세계이자 우아한 고품격의 ‘SM’ 시대로 들어섰다. SM을 드나들기 시작하고부터는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패션도 신경 쓰고 무엇보다 신청곡을 엄선하느라 금요일 내내 고심해야 했다.

SM은 피카디리 극장 바로 옆 큰 건물 지하에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웅장하다.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큰 스크린에 압도된다. 소극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크다. 입구의 문을 열면 정장을 입은 호스트 여러 명이 정중한 인사로 맞는다. 커다란 홀에는 원형 테이블이 빼곡하고 가장자리는 2인석의 작은 테이블들이 줄지어 놓여있다. 화면이 가장 잘 보이는 좌석도 좋지만, DJ박스가 잘 보이는 위치도 중요하다. 내가 신청 한 뮤직 비디오를 빨리 틀어 주십사 갈구하는 애절한 눈빛을 발사하기 좋은 위치말이다.


첫 신청곡은 당연히 듀란듀란의 ‘RIO’였다. 큰 화면 속, 요트 위에서 바다를 가르며 웃는 왕자님들은 비현실적이었다. 우리뿐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뮤직 비디오를 신청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야흐로 듣고 보는 음악의 시대이다 보니 팝 가수들은 뮤직 비디오에 공 들였고 영화 뺨치는 퀄리티의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뮤직 비디오에 대한 인기와 관심도 폭발적이어서 ‘마이클 잭슨’ 같은 슈퍼스타가 신곡과 함께 뮤직 비디오를 발표할 때면 지구촌 전체가 시끌시끌할 정도였다. 후식으로 나오는 콜라를 홀짝이며 다른 사람들이 신청했거나 DJ가 선곡한 뮤직비디오를 보다 보면 솔깃한 가수와 곡을 만나기도 한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SM과 신나라 레코드샵을 신나게 드나들었다. 양심은 있어서 고3이 되면서 발을 끓었고 가끔 극장에 가는 일 말고는 종로에 가는 일도 뜸해졌다.



카페 'TV Session'


20대부터는 극장이 놀이터였다. 극장이 많던 종로는 미팅 장소이자 데이트 코스였으며 친구들과 만남의 장이기도 했다. 피카디리 극장, 서울 극장, 코아 아트홀, 명보극장과 단성사를 종횡무진 누볐다.

1993년, 을지로에서 종각으로 이동하던 중 발견한 카페를 한눈에 사랑하게 되었다. 삼일빌딩, 옆 건물 1층에 위치한 카페는 지금 오픈해도 독특하고 멋진 분위기로 SNS를 달궜을 것이다. 커다란 통창 옆으로 무광 스텐 재질의 문이 있다. 벽은 온통 흰색이고 한쪽 벽만 물결 패턴의 스탠이다. 모든 테이블과 Bar 역시 은색이다. 단출한 조명임에도 카페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발한다. 흰색 벽면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은색 스탠 벽면엔 얼마 전 작고하신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 포스터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낸다. 도로를 향해있는 통창에는 빈티지 '제니스' 텔레비전 여러 대가 지그재그로 쌓여 있고 때로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때로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흑백영화 '라쇼몽'이 하루 종일 재생되었다. 그 위대한 '라쇼몽'말이다. 카페 'TV Session'의 매혹적인 분위기에 반해 아르바이트생 필요할 때 꼭 연락 달라는 부탁을 방문할 때마다 했고 결국 그곳과 2년 가까이 함께했다. 나뿐만 아니라 차례로 주연이와 승희도 이 카페의 스탭이 되었다. 이곳은 분위기만 끝내주는 카페가 아니었다. 모든 커피가 핸드드립이었고 원두종류도 십여 가지나 될 정도로 커피에 탐닉한 커피전문점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사장님이 늘 부재중이었다. 이런 멋진 공간을 만들고, 커피 철학 또한 남다른 사장님을 만나고 싶었다. 사장님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일 년이 되어갈 즈음 나타나셨다. 딱 한번 1시간 남짓의 만남 이후 다시 잠적한 사장님을 며칠 후 신문에서 보게 되었다. 재벌 3세 다수와 연예인 몇과 함께 대마초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는 소식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내 공간처럼 손님들을 대했고 누구보다 이곳을 사랑했다.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멋을 존중하는 사람들, 영화 관계자들과 종로 일대 유지인 회장님들 또한 이곳을 사랑했다. 출근길이 행복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일터였다.



3차는 늘 피맛골


대학생이 되자마자 통과의례처럼 술을 달고 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가 끓이지 않았다. 1차는 학교 앞에서 시작했지만 늘 막차는 피맛골행이었다. 낡고 지저분한 가게들과 사방이 취객인 그곳이 싫었다. 그럼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가고야 말았다. 발 들이때는 코를 틀어막으며 불쾌한 티를 팍팍 냈지만 그곳을 떠 날 때는 그지없는 행복에 취해 실없이 웃고 춤추듯 흐느적거리며 안녕을 고했다. 이 맛에 그 싫은 곳을 가고, 가고 또 가게 되었다.


취직과 함께 종로와의 인연은 서서히 식어갔다. 패션 회사는 거의 강남에 위치해 있었고 업무강도가 세다 보니 밤 열 시 이전에 퇴근하는 날이 드물었다. 퇴근 후 술자리도 회사 근처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끔 영화를 보러 갔고 종로 금방 거리에 귀금속을 사거나 팔러 가는 게 고작이었다. 20대는 멋지게 차려입고 강남에서 술 마시는 게 좋았다. 30대가 되니 대학생 때 뻔질나게 드나들던 피맛골 술맛이 그리웠다. 마침 신사동에 있던 회사가 장안동으로 이전을 하는 바람에 다시 종로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매번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심야에 방문했지만 덕분에 종로의 쾌쾌한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좋았다.


결혼 후 옛 직장 동료들과 예전 기분 내보자며 오랜만에 피맛골을 갔었다. 재재발을 앞둔 터라 진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수년간 찾지도 않았으면서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변신을 꾀하는 피맛골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역사가 사라지는 기분, 추억이 매장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2024년 10월, 친구와 혜화동에서 차를 마신 후 산책하다 마주친 종로는 예전과 다름없는 곳과 전혀 다른 장소로 환골탈태한 곳이 공존했다. 대부분의 극장이 사라지고 피카디리극장만이 CGV 피카디리로 개명해 종로 극장 3 대장의 명맥을 지키고 있었다. SM, 윈첼 도넛 가게가 있던 건물은 리뉴얼되어 제 살길을 찾은 듯했다. 나처럼 종로 역시 살길 찾느라 고생했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니 착잡하기도 했지만 위로도 되었다.


그곳에 다시 서니 달콤한 도넛 냄새가 떠올랐다. 나의 한 시절을 함께 보낸 도시를 걸으며 드는 감정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시인의 혀를 갖고 있다면 참 좋으련만.



Immigrant Song ... Led Zeppelin

Together Forever ... Rick Astley

A Summer Song ... Chad & Jeremy

Everyone Adore You ... Matt Maltese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 ... Eric Car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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