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맷집이 좋은 편이었다. 언니는 엄마가 이름만 크게 불러도 닭똥 같은 눈물과 함께 바로 주저앉아 싹싹 빌며 매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나는 어디 해보자는 식으로 대꾸도 않고 버틸 준비를 한다. 그래서 늘 나만 더 맞고 더 혼이 난다. 맞을 일이 두렵다면 애초에 저지르지도 않았겠지만 나는 맞아도 상관 않고 일단 하고 싶은 일은 하고야 마는 아이였다. 공부를 이런 정신으로 했더라면.
중학교 1학년, 담임은 수학 선생님이었다. 머리에 있어야 할 털들이 턱과 가슴, 심지어 손가락에도 수북했다. 정수리를 제외한 털부자였다. 말은 없는 편이었고 어딘가 음흉한 기운의 사람이었다. 그는 여자에 약한 사람이었다. 옆반 여자 선생님의 반복적인 부탁에 절대 응했으며 그녀와 대화할 때의 표정은 부끄러운 소년 그 자체였다. 특히 같은 반 오은정의 어머니만 보면 간신배처럼 목을 수없이 조아리고 웃어댔다. 오은정의 엄마는 육성회 회장이었다. 학교 행사나 조회 때마다 교장은 육성회 회장에 대한 감사의 말을 공공연히 내뱉었다.
6월, 교내 합창 대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단짝 하은이가 우리 반 지휘자였고 그녀의 지휘아래 매일매일 합창 연습에 열심이었다. 합창 대회를 며칠 앞둔 종례 시간이었다.
"지금부터 우리 반 지휘자는 오은정이다. 은정이가 피아노도 잘 치고 하니까 앞으로 은정이 지시에 따라 연습하도록"
하은이는 입 뻥끗도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종례가 끝나자 오은정이 나선다.
"얘들아 집에 가지 말고 남아. 합창 연습 할 거니까"
평소 자기 엄마가 육성회 회장이라고 잘난 체 하는 오은정이 고깝던 나는 담임과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나 팔짝 뛸 지경이었다. 못 참고 한마디 한다.
"너네 엄마 때문에 우리 반 일등 할게 뻔 한데 연습은 왜 하냐?"
친구 몇과 함께 교실 문을 나섰다. 우리는 하은이 위로도 할 겸 트램펄린을 타러 가기로 했다. 신나게 타고 있을 때 반 친구 둘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담임의 말을 전했다.
"야 선생님이 너네 빨리 찾아오래!"
교실에 들어서자 오은정과 담임이 두 눈을 부릅뜨고 서있었다. 담임이 물었다.
"너네 왜 합창연습 하자는데 왜 안 하고 갔어? 대답해도 맞을 건데 안 하면 더 맞는다"
친구들은 겁에 잔뜩 질려 고개를 떨구고 가방을 든 손에 힘을 꽉 주고 서있었다. 할 말 많은 내가 먼저 대답했다.
"하은이가 지휘자잖아요. 처음부터 우리 반 애들이 투표로 뽑은 건데 왜 갑자기 바꾼 거예요?"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야 되나?"
하은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선생님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담임은 대답 대신 우리 허벅지를 차례대로 발로 찼다. 5명 모두 뒤로 나자빠졌다.
"일어나!"
이번에는 들고 있던 몽둥이로 종아리를 여러 차례 내리쳤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어서 은정이 한테 사과해!"
"제가 오은정한테 뭘 잘못했는데요?"
그래, 어디 끝까지 해보자 싶었다. 이번에도 대답 대신 발길질이 돌아왔다. 오은정이 말리지 않았다면 우린 피 떡칠이 되어 교문을 나섰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담임은 조회 후 우리를 불러냈다.
"개교 후 첫 행사인데 다들 협조해야지. 지휘 아무나 하면 어때? 오은정이 하고 싶다잖아. 하은인 가을에 그때 하자"
'그래, 오은정이 하고 싶다면 해야지. 뭔지 모르지만 학교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의 자식인걸'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만큼 학교가 만든 육성회장의 지위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우리는 신분제처럼 정해진 그 룰에 의의가 없었다. 부자와 가난의 차이를 몰랐던 그 시절, 우리는 그저 윗분들이 그렇다면 그런 세상에 맞춰져 있었다.
학부모 상담이 있던 날, 엄마를 대면한 담임은 또다시 부끄러운 소년처럼 볼이 발개져 웃기 바쁘다. 엄마는 여식의 엉뚱함을 수차례 강조하며 잘 봐주십사 청했다. 담임이 나를 향해 사랑이 가득 찬 시선을 보낸다. 그는 제자들 앞에서만 폭군이자 냉혹한이 되는 사람이었다.
중2, 이제 15세가 되었다. 예쁘고 여린 나이다. 우리를 인성적으로 교육적으로 지도하는 선생님들 손에는 출석부, 교재와 함께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그 용도는 때로는 지휘봉이자 때로는 모진 매였다. 이제 겨우 키가 150cm 될까 말까 한 성장기의 소녀들이 어디 때릴 곳이 있나 싶지만 몽둥이는 때와 장소, 체형 따위 아랑곳없이 맹활약을 했다.
담임은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 미술을 전공해서 그렇다 쳐도 예술적 기질이 있으면 감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미래의 꿈에 관한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한 친구가 미국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결혼식을 하는 꿈을 그리고 있었다. 담임이 친구의 그림 앞에 서더니 막대기로 그림 속 사람을 가리키며 묻는다.
"이게 너야?"
"네"
"네 꿈이 미국에서 결혼하는 거니?"
친구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네.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곳에서 할 거예요"
"야, 공부도 못 하는데 네가 무슨 수로 미국을 가? 너 부자야? 현실감이 떨어지면 공부를 못 해요"
나는 얼른 스케치북 위의 그림을 지워버렸다. 영국 타워 브리지의 스케치를 막 끝내던 참이었다. 테임즈 강 위에서 존 테일러와 뱃놀이하는 꿈을 그리려 했는데 잔소리 듣기 전에 냉큼 바꿔치기하는 게 상책이었다.
2학기가 되자 학교는 느닷없이 아침 조회 때 영어 듣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잠이 덜 깬 아침에 영어 듣기 라니. 그 시간 동안 담임은 몽둥이를 쥐고 책상 사이사이를 걸어 다녔다. 듣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따라서 입을 벙긋하거나 받아 쓰거나 하지 않는다. 담임이 내 책상 옆에 서더니 호통을 쳤다.
"야! 너 똑바로 안 들어?"
"듣고 있는데요"
"너 금방 창 밖 쳐다봤잖아?"
순간 웃음이 났다.
"들으면서 본 건데요?"
"뭐가 웃겨?"
"듣는 거랑 눈이랑 연관이 있나 싶어서요"
나는 복도행에 처해졌다. 텅 빈 복도에서 담임의 소근 대는 잔소리를 듣자 반항기가 발동했다.
"잘못이 창 밖을 본 건가요 아니면 선생님 말씀에 웃은 건가요?"
순간 담임의 큰 눈이 노란 광채를 띄기 시작했다. 나는 손바닥 10대를 맞았다. 아팠지만 일체의 미동 없이 꼿꼿하게 서있었다. 약이 바짝 오른 담임은 더 큰 소리를 내며 장단 맞추듯 어깨와 팔뚝을 툭툭 쳤다. 영어 듣기가 끝나자 담임은 마무리 폭풍 잔소리를 끝으로 마무리 장단처럼 내 정수리를 몽둥이로 쳤다.
'딱' 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교실로 들어가자 친구들은 내 주변에 모여 손바닥을 만져 주며 나 대신 담임에게 욕을 퍼부었다. 수현이가 묻는다.
"ㅇㅇ야, 많이 아팠지? 근데 맨 마지막에 딱 소리 뭐였어? 벽 친 거지?"
도진이가 이어 묻는다.
"아니지? 너 머리 아냐?"
"설마, 머리 쳤는데 그렇게 딱 소리가 난다고?"
"내 머리였어"
고등학교도 다르지 않았다. 머리에 스프레이 뿌리는 일이 금지였던 터라 멋 내기에 사활을 건 친구들은 대신 딱풀을 바르고 다녔다. 갈퀴 모양의 앞 머리 높이가 곧 멋의 척도였다. 몇몇 선생님들은 경고로 끝나지만 다른 몇몇의 선생님들은 주머니에 작은 가위를 갖고 다니며 걸리는 아이들의 앞머리를 주먹으로 한 움큼 쥔 상태에서 사정없이 잘라내고야 말았다. 소 먹일 꼴 베듯이 말이다. 졸업 사진 찍는 날 가발을 쓴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앞머리가 다 잘렸기 때문이다. 금쪽같은 딸의 앞머리가 쥐 파 먹힌 듯 사라져도 학교에 따져 묻는 부모님은 단 한 분도 없었다.
아침 등굣길, 교문 앞에는 늘 선도부 몇 명과 선생님들이 번갈아 가며 학생들의 복장을 지도하고 있었다. 걸렸다가는 앞일을 예상할 수 없던 게 선생님 따라 그때그때 처벌이 달랐기 때문이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교감이었다. 교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학생들에게 쌍욕을 서슴지 않던 사람이다. 사립이라 가능했는지 아니면 다른 학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나름 완벽한 복장이라고 생각하며 친구와 수다를 떨며 교문을 들어서려는데 교감이 우리를 붙잡았다. 교복의 쟈켓 단추를 풀어 보라고 했다. 교감은 쟈켓과 조끼, 블라우스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어야 등교를 허락했다. 몽둥이로 내 어깨를 밀며 "너는 가" 하고는 친구의 배를 몽둥이로 찌르며 조끼의 단추 하나 어디 갔냐며 호통을 쳤다. 친구는 학교에서 달기 위해 챙겨 왔다며 주머니에서 단추를 꺼내 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친구에게 운동장 오리걸음 두 바퀴가 내려졌다. 이미 운동장은 뒤뚱거리는 오리들로 넘쳐 났다. 교복 치마를 입은 채 말이다. 나는 친구를 두고 갈 수가 없어 뒤뚱이는 친구 뒤를 따라가 가방을 벗겨주었다. 순간 교감이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내 뒤통수를 손으로 내리쳤다.
"벌 받는 애를 누가 도와주래! 가방 도로 주고 얼른 교실로 안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친구의 가방을 든 채 그대로 서있기로 했다. 교감은 내 앞에서 윽박을 질렀다. 나는 눈을 한 곳에 응시 한채 망부석처럼 가만있었다.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너 그대로 한 발자국만 움직여봐"
1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운동장을 힘겹게 돌던 친구들마저 모두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1교시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교감은 수시로 내 앞을 지나며 비아냥댔다. 쉬는 시간이 되자 담임이 오더니 같이 교감에게 가서 빌자고 했다. 절대 그리 할 수 없다고 속으로는 외쳤지만 순순히 담임의 뒤를 따랐다. 교감은 마지못해 용서를 하더니 다짜고짜 나의 미래를 예언하기 시작했다.
"응! 아주 잘 났어! 크게 되겠어, 아주 크게 될 놈이야!"
나는 마음에 품은 생각을 뱉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몇 대 더 맞는 것보다 상대가 스스로 옳다고 믿으며 불의를 휘두르는 일이 더 참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말대꾸를 못 하면 숨이 막혔다. 맷집은 그 지점에서 발휘된다. 매 한대가 추가될수록 내 눈꼬리는 점점 치켜 올라가고, 강도가 세질수록 치기는 거세져 절대 지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래, 때릴 테면 때려봐. 난 절대 빌거나 아파하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는 말대답을 시원하게 해 버린다. 매질 후 멍은 들고 며칠 쑤시지만 속은 후련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녀들은 나와 다르다. 한 대 만 맞아도 눈물을 글썽이고 선생님의 다그침과 호통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체벌에 순응하고 만다.
도진이는 공부를 곧잘 했다. 소련을 숭배하는 우리가 다 같이 러시아어과를 지원했을 때도 도진이 혼자만 10여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도진이는 순한 아이였다. 작고하신 가수 방실이 님을 닮아 동글동글 귀여운 데다 웃음이 많아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의외로 나만큼 엉뚱한 일에 과감했다. 몸이 둔 한 탓에 그녀만 유독 들통 나는 일이 많았다. 도진이는 아마도 교내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 중 가장 많이 맞은 친구였을 것이다. 여름 방학 중 땡땡이치다 걸려서 쓰레기 소각장 옆에서 사정없이 구타당하기도 했고, 첫눈 오는 날 운동장에 있는 친구에게 인사를 한답시고 창틀에 올라갔다 학생주임 투투에게 들켜 발길질을 수 차례 당하기도 했다. 주번일 때 월요일 조회에 땡땡이친 친구 숨겨 주었다고 따귀를 수차례 맞고, 가방 검사 때마다 하이틴 로맨스 때문에 맞고, 등교 때 이름표 핀이 망가졌다고 엎드려뻗친 상태에서 매질을 당했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 할 폭력의 시대였다. 과연 그렇게 까지 맞을 일이었을까.
중학생 시절 내내 친구의 살갗을 파고든 가시 돋친 몽둥이가, 훗날 그녀의 살갗을 다시 뚫고 나와 송곳처럼 날카롭고 삐딱한 시선을 잉태하고 말았다. 대학 시절부터 그녀는 변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는 첫사랑 에게 보기 좋게 차이고부터인 것도 같다. 첫사랑의 실패 때문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는 투사가 되어버렸다. 부당한 언어와 대우로부터, 때로는 사회의 적폐라 여기는 것들로부터,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모든 것 들로부터 그녀는 팔을 걷어 부치고 덤비기 시작했다. 20대 중반의 그녀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여전사가 되어있었다.
술집에서 축구 보다가도 누군가와 시비가 붙고, 고 노 무현 대통령 당선 축하 술자리에서도 같은 편과 시비가 붙었다. 회사에서는 노조가 되어 사측과 대립하고, 비정규직 때는 쟁의에 앞장섰다. 정치적 색이 다르거나 자신의 의견과 다른 모든 것에 분개했다. 죽마고우라고 대우가 다르지는 않았다. 정치적, 사회적 색이 아예 없던 나와 경혜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두 번쯤 그녀의 표적이 되어 그녀의 송곳 같은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녀의 직장 내 모든 상사들이 적폐였고,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녀는 피해 의식에 파묻혀 자신을 과잉 보호 하고 있었다.
공부도 잘해서 당시 유망한 러시아어 전공까지 한 그녀였지만 직장 내 크고 작은 갈등 이후로는 긴 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의 길을 재정비했다. 아무도 그녀가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지 못했다. 거의 10년을 남몰래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는 이민이었다. 미혼의 여자가 홀로 이민 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까닭에 그녀는 IT계열 이민을 계획했고 각종 자격증과 이력을 쌓은 후 혈혈단신의 이민을 가고 말았다. 우리가 35살이 되던 해, 한국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진짜 떠나버렸다.
때리면 맞았고, 잘못이라고 하면 잘못했구나.. 하는 수밖에 없던 시절을 용케 버틴 80년대의 소녀들은 강해 질 수밖에 없었다. 왜 바보처럼 순응했냐고 묻는다면 강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답할 것이다. 목석처럼 단단해서 버틸 수 있었다. 우리가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 IMF가 닥쳤다.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나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 또한 하루하루 영혼이 피폐 해져만 갔다. 그래도 우리는 버티고 살아남았다. 맞지만 않는다면 고된 직장 생활쯤 어려울 게 없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곤 했다. 학교에서 공부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맷집 강화 훈련이 알게 모르게 실행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폭력의 잔흔과 결핍 또한 우리 곁에 남아있다. 철없던 시절의 무지막지했던 폭력은 반골을 낳았다. 나처럼 남기지 않고 뱉어 내는 사람은 그래도 적당히 과거를 덜어내며 살았다.
중학교 때 한 소녀가 불현듯 떠오른다. 담임은 육성회비를 내지 않은 친구를 호명하며 종이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독촉장이었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호명은 계속되었다. 며칠 후 결국 단 한 명의 이름만이 호명되었다. 소영이는 이미 등교할 때부터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눈주위가 온통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이 내 마음을 온통 어둡게 그을려 놓았다. 비열한 담임은 앳된 소녀의 고통 스런 얼굴을 빤히 보며 으름장을 퍼붓고 있다. 이후 소영이는 일주일이나 결석을 했다. 안 낸 게 아니고 못 냈음을 어린 우리도 아는데 과연 그들 머릿속에 어떤 고약한 장치를 해둔 걸까.
떠오르는 그 시절의 모든 소녀가 잘 살아냈길 바란다.
무관심과 폭력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잃거나 혹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찾아내지 못했을까 겁이 난다. 나는 남들보다 대찬 아이였고 좋아하는 것들에 사로잡혀 무감각하게 그 시절을 통과했다. 오히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분에 못 이겨 복수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복수를 대신해 영화'스승의 은혜'를 보며 통쾌한 박수를 쳤다. N여중이 동네 명문학교로 거듭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1회 졸업생으로서 우리가 액받이가 되어준 덕이라고 믿고 싶다.
졸업하고 30여 년이 지난 3년 전, 나는 그곳에서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을 치렀다. 일부러 그곳을 시험장으로 지정했다. 시험의 긴장 보다 다시 그곳에 발을 붙인다는 일이 설레고 좋았다. 남들보다 시험을 빨리 마치고 조용한 운동장을 천천히 걸었다. 나의 소녀들이 곳곳에 보였다.
예쁘고 강했던 나의 동지들.
순수했기 때문에 감각하지 못했던 폭력의 그늘이 모두 거두어졌기를.
Song 2 ... Blur
Crimson and Clover ... Joan Jett
For The Peace Of All Mankind ... Albert Hammond
A Cross The Universe ... The Beat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