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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삶의 힘이다 ᆢ2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by 레인송

난생처음 아파트에 살기 시작했다.

강동구에서 가장 큰 대단지의 주공 아파트였다. 1차부터 4차까지 나뉜 아파트는 대부분 11평부터 15평까지의 소형이었고 서민 아파트답게 낡고 구질구질했다.

13평의 작은 공간이지만 계단을 오르는 집에 산다는 것 자체가 말도 못 하게 좋았다. 그리고 베란다와 화장실이 집 안에 들어와 있는 것도 놀라웠다. 지금과 같은 아파트는 아니었다. 아파트지만 연탄보일러였고 화장실엔 샤워기나 욕조도 없었다. 물론 엘리베이터도 없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이후부터 언니와 나는 겨울마다 연탄과의 전쟁을 치렀다. 귀가가 늦은 부모님을 대신해 집의 난방을 책임져야 했다. 초등학생의 관심이 연탄에 가 있을 리는 없었기에 허구한 날 불씨를 꺼트렸고 번개탄은 우리 집 필수품 중 단연코 일등이었다. 부엌에 달린 조그만 베란다에는 연탄이 백여 장 쌓여있었다. 재가 된 연탄은 베란다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1층으로 배출되었다. 가장 곤욕스러운 작업이 바로 연탄 떼어내기였다. 벌겋게 이글거리며 불타오른 연인처럼 붙어버린 두 개의 연탄을 떼어내려면 오싹할 정도의 큰 식칼만이 해결책이었다. 칼끝을 연탄과 연탄 사이에 재차 쑤셔넣을때마다 뿌연 재와 함께 유독 가스가 천장으로 치솟았다. 멀쩡하던 사람이 연탄가스 때문에 바보가 되었다는 , 일명 ‘동네바보’들이 각 동네마다 포진했고 그들을 마주칠 때마다 여차 하다가는 나도 저리 될까 싶어 공포에 떨었다. 1980년대 중반쯤, 아파트 전체가 연탄보일러 대신 기름보일러로 교체가 되었다. 이제 연탄 가는 일이 사라져서 좋았고 무엇보다 뜨거운 물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문명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이 집에서 초등학생 3학년부터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물론,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두 번 더 이사를 다녔다. 아파트 단지가 큰 만큼 단지 안에는 놀이터도 많았고 공원도 여러 개 있었다. 놀이터에서 묘기 수준의 그네 타기를 연마했고, 철봉 잘하는 애로 불리며 놀이터를 평정했다. 아파트 사이사이 둔덕에는 소나무가 특히 많아 가을이 되면 언덕 주변으로 솔향기가 진동했고 바닥은 갈색의 솔잎으로 뒤 덥혔다. 솔잎을 모아 그 위에 주워 온 비닐을 덮어 집을 만들기도 했고, 벙커처럼 높이 쌓아 전쟁놀이도 했다. 그 당시 작은 아씨들 이야기에 푹 빠져있을 때라 오두막 짓는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라 낡고 흉흉한 모습이긴 했지만 가로수인 은행나무만큼은 말도 못 하게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밤새 가을비가 내린 아침의 등굣길은 무지개너머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도로시가 된 기분을 선사했다. 노란 조명판 위로 펼쳐진 세상은 판타지 영화 속 세트장 저럼 황홀했다. 학교 가는 길에 떨어진 은행잎을 주워 다발을 만들었다. 노란 꽃봉오리를 들고 걷는 등굣길은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다.


아파트 상가에는 많은 상점들이 있었다. 나는 자전거 대여점 단골이었다. 500원을 내면 30분 동안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아파트 끝에서 끝까지 바람처럼 달리다 아파트 단지 뒤, 미나리 밭 사이에 놓인 좁은 길을 질주하곤 했다. 봄이면 바람 사이로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찌르고, 여름엔 매미 소리가 귀청을 쏘아댔다. 가을엔 땅에 떨어진 생명들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냄새가 났고, 겨울엔 축축한 흙냄새가 차가운 바람 속에 숨어 있었다. 그 시기에 나를 키운 것은 바람이었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지 않는 날에는 달렸고, 달리지 않을 때엔 콩콩이를 타며 바람을 들이켰다. 하루가 멀다 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다.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길 남자아이 서넛 키우는 것보다 나 하나 키우는 일이 더 힘들다고 하셨다.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10대 시절을 이곳, 명일동 서민아파트에서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곳에서 음악에 탐닉하고, 찰떡궁합의 친구들을 만났다.


가난이 서글프지 않은 삶, 공부가 뒷전인 일이 인생의 승패와 상관없는 삶.

그저 좋았다.




서울 전체가 재개발 바람으로 들썩일 때, 우리 아파트도 그 바람 속으로 편승하게 되었다. 하나둘 떠나는 이웃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반년이 채 안돼 아파트단지는 사람 사는 집보다 빈집이 더 많은 유령마을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옆 동네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똑같이 오래된 아파트지만 고층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작은 평수라 욕실에 욕조는 없었지만 샤워기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 4층짜리 상가는 내게 별천지와도 같았다. 상가 내에 음식점, 슈퍼마켓, 양품점, 미용실 등 없는 게 없었다. 게다가 레코드 가게(어린 왕자 레코드 샵)까지 있었으니, 엄마의 심부름길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가로등이 무색할 정도로 검은 밤을 환하게 밝혀주던 벚꽃로드는 우리 아파트의 명물이었다. 5월이면 벚꽃놀이 온 구경꾼들의 행렬이 그칠 줄 몰랐다. 벚꽃도 좋았지만, 나는 아파트 둘레 길에 줄지어 서있는 플라타너스나무를 더 좋아했다. 아파트 3층 높이만큼 곧게 뻗은 굵은 기둥과 어른 손바닥의 족히 두 배나 되는 큰 잎들이 무성한 나무는 여름에는 강렬한 햇빛을 가려주었을 뿐 아니라 사계절 내내 운치 있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초겨울, 생을 다한 잎들이 쓸쓸히 도로 위에 드러누워 있을 때는 걸음마다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 갓 튀긴 깻잎을 한입 베어 무는 소리였다. 도로를 점령한 플라타너스 잔해는 얼마 안 가 큰 포대로 들어가고, 겨울이 오기 직전 나무 기둥 곁에는 자신의 분신을 가득 욱여넣은 포대자루들이 줄지어 기대어 서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항상 눈이 내렸다. 그리고 이 집에서 식구 하나가 더 늘었는데 강아지 토미다. 요크셔테리어 종인 토미는 생후 3개월 때 우리 가족이 되었다. 여리고 순한 아이였다. 토미라는 이름은 내가 지어주었다. 애정하는 록밴드 Motley Crue의 드러머 ’Tommy Lee'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거칠고 마초적인 드러머 토미에 반해 우리 가족 토미는 한없이 여리고 심약한 아이였다.


이곳에서 4년을 살고 고덕동으로 이사를 갔다. 마당이 있는 단정한 주택의 2층이 우리의 새 보금자리였다. 고덕동은 아파트보다 주택이 더 많은 동네였다. 작은 산도 군데군데 있어 산책하기 좋았다. 이곳에서 식구 하나가 또 늘었는데 애교가 많던 하얀 강아지 애돌이였다.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토미, 애돌 이를 데리고 약수터로 소풍을 갔다. 약수터까지의 산길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웠다. 우환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나쁠 것 없는 시절이었다. 나는 이 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제법 큰 패션 회사였다. 게다가 삼성동 한복판에 위치한 덕에 핫플레이스이던 압구정동을 안방 드나들 듯할 수 있어 좋았다. 20대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기행을 일삼았고 철이 없었으며 애인도, 친구도 숱하게 만들며 청춘을 영유했다.




IMF가 닥친 후 더 이상 우리 가족의 집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부모님의 파산으로 야반도주하듯 서울을 떠났고 나는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속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루하루를 절망감에 지쳐 생각하는 법조차 잊은 무능한 사람이 되어 세월을 때웠다. 낯선 환경에서는 사람도 동물도 다를 바 없이 연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토미는 엄마가 잠깐 한눈 판 사이 집을 나갔다가 하반신이 마비된 채 발견되었다. 없는 형편이지만 어떻게든 토미를 살려 보고 싶어 서울 단골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미는 병원에서 홀로 맞는 밤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냉동된 아이를 상자에 담아 버스를 타고 엄마에게 갔다. 가족 곁에 토미를 묻고 싶었다. 애돌이는 토미가 죽고 이듬해, 동네를 활보하던 큰 진돗개에게 물려 죽었다. 두 아이의 죽음이 우리 가족의 신세를 보는 듯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마는구나..

더 깊은 무기력 속으로 잠식되었다.


갑작스러운 자취생활로 인해 나는 떠돌이가 되었다. 서럽고 배고픈 7년간의 유랑이었다. 19세에 소박맞았다는 친구 이모님 댁 문간방을 시작으로 고시원, 4명의 이모들 집을 몇 달간 번갈아 가며 신세를 졌다. 안정적인 회사에 취직하고 저축도 가능하게 되자 반지하 단칸방을 얻었다. 다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이때부터 내 공간에 정성을 다 했다.


거쳐 간 모든 공간마다에는 소중한 추억이 있다.

어느 집에서나 눈물로 베갯잇 적시다 잠든 날이 많았지만 잊지 못할 만큼 마음에 새겨지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내 눈물을 닦아내는 음악과 영화가 늘 곁에 있었다.


지금, 여기 내 집에 나의 과거와 현재가 있다. 이곳이 내 딸의 과거와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 귀하게 가꾸고 산다. 피할 길 없는 불행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전부 소유한 것만 같은 포만감도 영원하리란 보장이 없다. 작고 누추함 속에서도 사랑은 꽃 피고, 미래를 꿈꾸기도 하며, 절대 잊히지 않는 추억이 쌓인다.


한때, 살아질 수밖에 없는 동력은 어디서 왔을까를 찾던 때가 있었다. 내가 잠시 등 붙이고 쉬어 갔던 그 모든 공간에서 그 힘을 얻은 게 아니었을까.


그 안에서 나는 태어나고 부서지고 재탄생하는 기적을 만났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 Chris Impellitteri

Everything I Own ... Bread

Wouldn' t Be Nice ... The Beach Boys

Everyone Adores You .. Matt Malt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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