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표 닭죽

by 발돋움

"닭죽 먹을래?"


초복인데, 어쩐 일로 조용하나 싶었다.

"비도 오는데 어디서 끓이려고? 하지 마."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내 말은 들을 리 없는 쇠고집. 외고집. 똥고집.

"퇴근할 때 가지러 와."


엄마의 모든 말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 질문 모양을 하고 있지만, 늘 명령어다. 내가 하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너의 선택권 따윈 필요치 않다는 지시.

엄마에겐 이 것이 딸에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의 마지노선이다.

한때는 나도 엄마에게 이런 사랑 말고 다른 사랑을 갈구한 적이 있었다. 마치 죽어라 공부하면 오를 것이라 기대하는 성적처럼. 끝없이 노력하다 보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하자면,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한없는 내리사랑. 눈빛만으로도 표현되는 철철 넘치는 자식에 대한 애정 같은 것들.

그러나, 엄마가 나에게 내어 줄 수 있는 사랑은 자신이 하사하는 음식, 텃밭에서 기른 야채 이외엔 더 이상 바라지도 말고, 줄 수도 없다고 3.8선만큼이나 분명하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며칠 전에도 엄만 나에게 대뜸 전화해 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를 퉁명스레 내뱉었다.

"너, 왜 애들한테 옷을 사주냐?"

얼마 전 남동생 아이들에게 여름옷을 사준 것에 대한 엄마의 반응이었다.

가슴이 또 먹먹해졌다.


고맙다는 표현을 참 차갑게도 한다.

남동생만 내 새끼, 내 가족이니, 딸자식인 남의 식구가 우리 식구에게 선물을 해주는 상황에 대해 인사성 바른 엄마가 남에게 하듯 감사하다는 표현을 잊지 않고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야 마는 현실이 거북스러웠다.


그래 뭐. 딸이 돼서. 엄마가 원한다는데. 기꺼이 남의 식구로 살아가자. 다짐에 다짐을 하며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뚜껑을 닫으려다 뚜껑이 얼크러져 못다 한 말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이럴 땐, 왜 사줬냐? 가 아니고 '고맙다'라고 하는 거야 엄마. 조카 옷을 사줬는데 엄마가 왜 굳이 나한테 그런 감사인사를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모답다. 딸답다. 자식답다는 표현이 시답잖다.

누가 누구 기준으로 만든 말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런 출처 불문의 단어를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각인양 사용하고 있다. 나는 딸다운게 무엇인지 마흔 중반이 되도록 잘 모르겠다. 엄마도 부모다운게 어떤 건지 칠순이 넘어서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무엇답다는 뜻에 기대 엄마를 대하고 있지 않다. 그것보다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곧 엄마가 된 지 오래다.

허리도 다 펴지 못하는 노인이 자식들 주겠다고 초복이고 중복이고 더운 여름 앞마당에 솥을 걸고 닭을 삼고 죽을 끓이는 모습이 안타깝고, 그것으로 아직 자신은 자식들에게 베풀게 남아 있는 유효한 부모로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 애처로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좋아하지도 잘 먹지도 않는 닭죽을 가지러 친정으로 향한다. 그리고 닭죽을 받아 들면 모르는 사람에게 선물 받았을 때처럼, 엄마가 그토록 원하는 남을 대하듯 공손하게 인사할 것이다.


"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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