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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장하드가 된 사람들

타인의 머릿속이 내 할 일 목록이 될 때

by 가온담


그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나 그거 다 기억하고 있어.”


그 말의 절반은 진심이고, 나머지 절반은 희망이다.
문제는 그 ‘희망’을 내가 대신 백업해줘야 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머릿속은 마치 오래된 컴퓨터 같다.
파일은 제각각 흩어져 있고, 이름은 ‘최종_진짜_진짜_수정본 2’ 따위다.
그리고 그 혼란의 관리자는 대개 나다.


나는 타인의 외장하드로 살아왔다.
그들의 할 일, 일정, 물건의 위치, 대화의 맥락까지.
나의 기억이 그들의 일정을 구해주는 동안,
나의 하루는 조금씩 사라졌다.


‘착한 사람’이 아닌 ‘기억 대행자’

처음엔 내가 여유롭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나누어주는 사람, 체계적인 사람, 믿음직한 사람.
그러나 그 신뢰는 금세 채무가 되었다.


그들은 묻는다.
“그거 네가 옮겼잖아. 어디 뒀는지 말해봐.”
그 순간, 내 기억은 ‘증거’로 소환된다.


나는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혼란을 대신 짊어지는 인지적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왜 그들은 늘 잊는가

이건 단순한 ‘건망증’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뇌는 이미 과부하된 작업 기억력 속에서 버티고 있다.


작업 기억력(working memory)은
머릿속에서 동시에 여러 정보를 잠시 저장하고 조작하는 능력이다.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그 작은 정신의 책상 위에 한꺼번에 올려두었다.


계획 없이 일들을 쌓는 사람의 뇌는
결국 ‘현재’만을 붙잡는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지금 생각난 일”로 바뀐다.


그들은 기억이 아니라 주의의 위치를 잃은 것이다.


기억의 외주화

도움을 거절하면 냉정하다는 말을 듣고,
도와주면 그 일은 내 일이 된다.


이 기묘한 구조 안에서
그들은 자신의 무질서를 타인의 질서 위에 얹는다.

“네가 기억하고 있잖아.”
그 말은 사실상, “네가 대신 살아줘.”와 다르지 않다.


그런 관계는 결국
인지의 착취로 귀결된다.
(나는 그 단어를 처음 떠올렸을 때,
묘하게 사회학 책 제목 같다고 생각했다.)


질서의 선언

나는 이제,
타인의 무질서에 내 기억을 빌려주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깜빡하면, 깜빡하게 두자.
그들이 잊으면, 잊게 두자.
기억의 책임은 각자의 뇌에 있다.


대신, 나는 내 삶의 기억을 더 단정하게 정리할 것이다.
내 머릿속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위탁할 수 없는 품격의 일이니까.


작고 단호한 깨달음

대신해 주면 일이 빨리 끝난다.
하지만 빨리 끝내려다 보면,
그 일을 평생 하게 될 수도 있다.


기억은 능력이 아니라, 태도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내 기억의 질서를 지키는 중이다.



“나는 더 이상 타인의 혼란을 백업하지 않는다.
대신, 나의 질서를 저장한다.”






연재〈작업 기억력 시리즈 〉1


다음 글 〈머릿속 책상이 너무 좁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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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책임 #정보처리능력 #인지의 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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