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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Nov 16. 2023

오해가 절반

그녀의 첫사랑

그녀, 6.25 전쟁 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강원도 어려운 집안의 장녀였다. 배가 다른 동생들을 셋이나 두고 자신과 피가 같은 남동생을 위해서 십 대 중반부터 시집을 가기 전까지 친척의 식모살이를 해야만 했던 이 시대의 노인이다. 그녀가 노인으로 불리는 것은 명확하게 팔십을 넘긴 생물학적 나이 때문이지만 그녀는 자신을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숱이 많은 머리가 자신을 조금은 젊게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적지 않은 비용으로 머리가 빠지지 않는 약을 사 먹고 일주일에 두 번은 조명아래 다른 이의 손을 잡고 스텝을 밟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감탄할 만큼 젊어 보이거나 건강이 남다르게 좋은 것은 아니다. 온갖 약을 식사량만큼이나 먹고 수시로 한약을 해 먹으며 수면제의 도움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녀는 아직도 술을 즐기며 술잔을 들면 여지없이 십 대로 돌아가 자신을 방치하거나 욕지기를 한 친척들이 등장하고 종국엔 그녀의 거친 입에 민망하게 오르내린다.


다 나쁜 놈들이며 못된 년들이 된다.


오랜 기간 댓가도 없이 남의 집안일을 하며 끼니만을 해결한 시절, 그녀의 유일한 행복은 모두가 잠든 시각 남의 집 담벼락아래서 만난 눈썹이 짙은 남자와의 사랑이었다. 그녀의 마르고 긴 몸을 사랑해 준 남자와 틀림없이 결혼할 거라 꿈꿨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십부터 뒷짐을 지고 다닌 무능한 가장이었고, 그의 동생인 작은 아버지는 조금 더 배운 덕에 자식이며 조카들의 인생을 자신의 판단으로 좌지우지한 사람이었다. 그의 허세는 이웃의 눈총을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모른 채로 세상과 작별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작은 아버지를 평생 원망하였으나 살아생전에는 덤빌 수 없었음을 아쉬워 술잔을 더 기울이기도 한다. 소위 안줏감이라는 타인에 대한 원망의 감정은 정도를 넘기가 일쑤다.

그녀가 가장 원망한 것은 작은 아버지의 반대로 그녀의 첫사랑은 매질과 함께 끝이 났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에 시집을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뜨거운 스물! 사랑은 정리되었다. 술기운이 최고로 오르면 원망의 욕지기를 붙인 한탄을 듣는 작은 아버지의 자식들도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된다.


그러던 그녀!


자신보다 10살 더 많은 자신의 새어머니 장례에 이곳저곳 훑어보며 조문객들을 살펴본다. 또래의 친척들이 "이제 우리 차례네"라는 말에 정색을 하며 타박한다.

"아이고 무슨 그런 소릴 해? 나는 아무 걱정도 없고 사는 게 너무 행복한데!"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다.


조문을 마친 친척들과 오랜 안부를 물으며 둘러앉아 음식을 먹는 사이 그녀의 바로 아래 여동생이 상주인 오빠에게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한다.

"일어나! 오빠, 조문객 오셨어."

"누구?"

"정숙이 아버지!" 사연을 익히 아는 여동생은 서두르는 투로 귓속말을 한다.

뜸한 조문객 사이 젓가락질을 하던 그녀와 동생들은 모두 상주노릇을 하러 몸을 일으킨다. 소리를 듣지 못한 그녀, 동생들을 따라 영정 사진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누가 왔어?


국화꽃을 집어드는 정숙이 아버지는 여전히 눈썹이 짙다. 작고 마른 남자에게서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의 몸가짐이 보인다. 그가 절을 한다. 천천히 절을 하는 그의 작은 몸이 단아하다.


길게 늘어선 상주들 사이 그녀가 갸웃한다.

"누구야? 안경너머 그녀가 인상을 쓰며 옆에 선 또래의 친척에게 재차 묻는다.

" 정숙이 아버지?"

"그래"

"아, 저렇게 작았었나?"


그녀, 수십 년 세월을 보내고야  앞에 첫사랑을 마주하고 묻는다.


저렇게 작았었나?


작은 아버지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첫사랑은 술기운에는 늘 애절했으나 바로 앞에 두고도 고개를 갸웃하며 곁눈질로 기억을 소환한다. 여자보다 조금 작은 키의 남자도 그녀와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들지 않는다.


남자가 식사를 거절하며 잰걸음으로 총총히 사라진 후 그녀숨을 길게 내쉰다. 숨과 함께 어깨축이 떨어진다. 고개를 잠시 도리질하다 자신이 앉을만한 테이블을 찾아 걸음을 옮긴다.


이제 술잔을 기울일 때 그녀의 첫사랑은 작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 앞서, 몰라보게 변한 작은 키의 남자로 등장할 것이다. 


어쩌면 작은 아버지에게 따라붙던 원망의 욕지기는 조금 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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